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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438)화 (437/1,192)

제438화

관웅이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그래도 겁낼 건 없습니다. 수상 전투야 저들이 우세라고 해도 육지에서는 우리 철기 부대를 쉽게 이기지 못합니다.”

백장간이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런 상황을 만들어선 안 된다.”

관웅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그럼 어찌해야 합니까?”

“강이 얼거든 표면에 소금을 뿌리고 병력을 대기해야 한다. 밤새 창을 들고 진을 치다 얼음이 얼거든 곧바로 깨뜨려야지. 아둔해 보여도 제법 실용적인 방법이다. 또한.”

그가 잠시 고민하다 말을 이었다.

“적을 잡을 땐 우두머리부터 잡아야 한다. 하여 내가 한번 시도해 볼 계획이다.”

관웅이 화들짝 놀라 질문을 퍼부었다.

“어찌 시도하시겠단 말씀이십니까? 초왕은 평범한 자가 아닙니다. 그리 쉽게 얼굴을 드러낼까요?”

“내가 미끼가 되겠다.”

백장간이 시선을 거두며 답했다.

“무방비 상태일 때 곧바로 참살할 것이다!”

“장군, 절대 안 되옵니다.”

관웅이 그를 말렸다.

“차라리 말장이 가겠습니다…….”

“너로는 부족하다.”

백장간이 비로소 희미한 웃음을 보였다.

“호랑이 새끼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직접 들어가야 하는 법이 아닌가. 이번 전쟁은 폐하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나 자신을 위한 게 더 크다.”

그가 여동생의 석연찮은 죽음 때문에 묵용감과 결판을 내고 싶어 한다는 걸 관웅도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가 결정을 내린 이상, 고집을 꺾을 생각은 없을 터였다.

“장군, 그럼 말장도 함께 갈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너와 내가 이곳을 동시에 떠날 수 없다.”

백장간이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이곳의 상황을 속속들이 파악하긴 힘들다. 우리에게 복종하지 않으려는 자들도 있지 않았던가. 우리 둘 다 이곳을 떠나면 일을 벌일 수도 있다. 내분이 생기면 안 되니 나 대신 이곳을 잘 지키거라.”

그의 말대로였다. 철기 부대는 황제의 권력과 직결된 가장 강력한 부대였다. 철기 부대의 수장은 원훤袁烜이라는 사람으로 백 승상과 남다른 친분을 자랑했다. 그러나 사이가 아무리 좋아도 자신의 이익을 침범하면 조금씩 변하기 마련이었다.

겉으론 조카님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백장간과 화기애애한 척했지만, 암암리에 그를 모함하여 위험에 빠뜨리려 했다. 다행히 백장간은 그의 농간을 빠르게 알아차렸고 본보기로 엄한 처벌을 내려 그의 위세를 억누를 수 있었다.

* * *

백장간이 강가에 서서 맞은편 기슭을 바라볼 때, 묵용감도 강가에서 맞은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옆에 있던 제갈겸유에게 문득 질문을 던졌다.

“선생은 기상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얼마나 더 기다려야 눈이 오겠습니까?”

제갈겸유가 몸에 걸친 두봉을 여미며 말했다.

“노부도 며칠 동안 유심히 관찰해 보았지요. 구름이 걷히지 않으니 조만간 내릴 듯합니다. 다만 적어도 열흘은 지나야 할 겁니다.”

“열흘은 너무 깁니다.”

묵용감이 잠시 망설이다 한통에게 물었다.

“내일 매진梅鎭을 함락할 때, 누가 병사를 통솔하기로 하였느냐?”

“유무전이 할 예정입니다.”

묵용감은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반년 가까이 백천범을 찾지 못할 때, 유무전이 그녀를 데리고 왔었다. 그렇게 힘겹게 돌아왔음에도, 그가 제대로 지켜주지 못한 탓에 그녀는 영영 먼 곳으로 떠나 버렸다…….

그는 수면을 바라보며 침묵을 지켰다. 한통은 그제야 괜한 말을 꺼냈다는 걸 깨닫고 자신을 질책했다. 그냥 아무 이름이나 대면 될 것을, 기어코 유무전의 이름을 꺼내 초왕의 상처를 건드리고 말았다.

“왕야, 바람이 찹니다. 그만 들어가시지요.”

묵용감은 아무런 대꾸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한통은 제갈겸유를 바라보았다. 명석한 선생이니 분명 초왕을 막사로 들여보낼 방도가 있을 터였다.

시선을 느낀 제갈겸유가 빙그레 웃더니 묵용감에게 말했다.

“왕야, 어젯밤 두다 남은 바둑이 노부의 막사에 그대로 놓여 있습니다. 그래도 승부는 가려야겠지요. 다시…….”

그제야 묵용감은 제갈겸유에게 시선을 주었다.

“알겠습니다. 먼저 들어가십시오.”

수성으로 돌아간 태자는 초왕을 돕기 위해 제갈겸유를 군영으로 보냈다. 하지만 제갈겸유의 가장 주된 역할은 초왕과 바둑을 두는 것이었다. 다만 초왕은 여유가 없었기에 늘 한 판을 다 두지도 못하고 돌아가곤 했다.

제갈겸유는 바둑 실력이 뛰어났다. 고수와 바둑을 두는 건 굉장히 즐거운 일이다. 잡념이 사라지고 온 정신을 바둑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마저 바둑을 두고 있는데, 영구가 급히 다가와 묵용감의 귓가에 무언가 속삭였다.

묵용감은 바둑알을 손가락에 낀 채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반짝이는 두 눈동자가 빛을 쏘아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가 바둑알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리할 일이 생겨 먼저 가 보겠습니다. 이번 판은 다음에 다시 두지요.”

제갈겸유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춘 뒤, 그를 문 앞까지 배웅했다.

“왕야, 급한 일부터 처리하시고 짬이 나시거든 그때 노부와 다시 두시지요.”

묵용감은 성큼성큼 자신의 막사로 돌아갔다. 막사 안에 둘만 있게 되자, 그때서야 질문을 던졌다.

“확실한 정보더냐?”

“확실합니다. 실종 시기가 왕비 마마께서 납치된 시간과 일치합니다. 그날 이후로 보이지 않습니다.”

“계속 조사하거라.”

탁자 앞에 선 묵용감의 두 눈망울에 오싹한 한기가 서렸다.

“어떤 실마리도 놓쳐선 안 된다. 세상이 아무리 넓다 한들, 본왕이 이 잡듯 뒤질 것이다!”

두 사람은 굳이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기에, 막사 밖의 보초뿐만 아니라 더 멀리 서 있던 제갈겸유도 그들의 목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제갈겸유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뒷짐을 지고 천천히 자신의 막사로 돌아갔다.

겨울에는 밤이 유독 빨리 찾아온다. 하늘에는 안개처럼 가벼운 연기가 피어올랐고, 날개를 퍼덕거리던 새 한 마리가 막사 뒤에서 날아올라 어두운 밤하늘로 사라졌다.

막사 앞을 지키던 영구가 미세한 움직임을 느끼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찌푸렸던 그의 미간이 조금 느슨해졌다.

* * *

매진 점령은 예상처럼 순탄치 않았다. 그들의 의도를 알아챈 것인지 길 양쪽에 매복해 있던 적군은 그들이 도착도 하기 전에 맹공을 퍼부었다.

유무전은 화가 끓어올랐다. 자그마한 마을이라 안중에도 두지 않았던 곳이었다. 손쉽게 점령해 초왕에게 칭찬 좀 받아 보려 했더니, 매복 공격을 당할 줄이야. 폭발하기 직전이었던 그는 허리춤에서 채찍을 뽑아 힘껏 내리쳤다.

“돌격하라! 끝장을 내야 한다. 물러나려는 자가 있거든 이 몸이 갈겨 죽일 것이다!”

물론 초왕은 군대를 엄히 다스렸기 때문에 물러나려는 병사는 없었다. 그러나 상대도 용맹하긴 마찬가지였고, 무엇보다 병력이 그들보다 족히 두 배는 많았다.

격렬한 전투가 이어지며 사상자가 속출하자, 유무전은 자신에게 두 가지 선택지가 남았다는 걸 깨달았다. 도망치거나, 항복하거나.

물론 항복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남아 있는 병력을 이끌고 포위망을 뚫었다. 예상과 달리 적군은 끈질기게 쫓아왔고, 미리 점령했던 요충지마저 탈환해 버렸다.

유무전과 병사들이 줄행랑을 칠 때, 뒤에서 요란한 사병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백 장군님! 역시 백 장군님이십니다!”

유무전은 그제야 백장간이 직접 전투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쩐지, 그래서 그렇게 맹공을 퍼부은 것이었다. 전투에서 패했으니 체면을 구겼지만. 이렇게 중요한 소식을 본진에 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북쪽의 군신인 백장간에게 졌으니 그리 망신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유무전은 제법 똑똑한 장군이었기에 포위망을 뚫을 방법을 생각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추격해 오던 적군과 거리가 제법 벌어져 있었다. 그는 양옆의 수하들에게 몇 마디 분부를 내렸다. 그가 직접 깃발을 들어 적군을 유인할 테니 서둘러 이 사실을 본진에 알리도록 당부했다.

소식을 접한 한통은 깜짝 놀랐다. 백장간이 직접 전장에 나올 줄이야. 그는 곧장 초왕에게 이 소식을 전하며 자신을 전투에 투입해 달라는 청을 올렸다.

“왕야, 말장이 백장간을 잡아 오겠습니다.”

묵용감이 손을 내저었다.

“넌 가동과 이곳을 지키거라. 영구를 데리고 내가 다녀올 것이다.”

“왕야.”

한통은 하고 싶은 말이 남아 있었지만 초왕은 그를 저지했다. 그리곤 영구를 데리고 곧장 자리를 떴다.

가동은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씁쓸한 기분을 삼켰다. 그 사건 이후로 초왕은 늘 영구만 찾았다. 가동은 여전히 일급 호위무사였지만,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소식을 전하는 일에 불과했다.

물론 초왕의 푸대접을 탓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그가 초왕의 신임을 저버리지 않았는가. 지금으로서는 별다른 희망이 없었다. 서둘러 왕비를 죽인 납치범을 잡아 왕비와 세자의 복수를 하는 수밖엔.

사실, 가동은 영구에게도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날도 잡고 혼수까지 준비해 두었는데 이런 일이 생긴 탓에 영구와 기홍은 혼사 얘기를 꺼내지 못했다. 가동은 자신이 정말 쓸모없는 사람 같았다. 관저에서 왕비와 세자가 납치를 당하는 것도 막지 못했는데 일급 호위무사는 무슨…….

그의 마음을 헤아린 한통이 다가와 어깨를 토닥였다.

“되었네. 어서 볼일 보게. 왕야께서 가셨으니 백씨 그놈은 꼼짝 못 할 걸세.”

* * *

백장간은 산기슭에 서서 저 멀리서 먼지를 날리며 달려오는 말과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내 입꼬리를 올리며 냉소를 짓고는 부하들에게 분부했다.

“병사들과 매복해 있거라. 난 초왕을 만나러 가겠다.”

그의 부하들은 그의 말이라면 무조건 복종했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직접 초왕을 대면한다고 하니 걱정이 앞설 수밖에 없었다.

“장군, 저희도 가겠습니다.”

“말이 많구나.”

백장간이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었다.

“우리의 계획을 잊지 말거라.”

그가 이곳에 온 목적은 전투가 아니다. 그의 목적은 초왕의 목숨이었다. 설령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야 한대도 아깝지 않았다.

그는 스무 해 넘는 시간을 살면서 열두 살까진 산송장이나 다름없는 삶을 살았다. 기쁨도, 슬픔도 느끼지 못하고 늘 멍하니 넋을 놓았다.

그러나 그녀와 함께 지낸 뒤로 그는 진정 살아 있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니 그녀를 위해서라면 뭐든 기꺼이 바칠 수 있었다. 그게 설령 그의 목숨이라고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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