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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437)화 (436/1,192)

제437화

그날부터 백천범은 산굴에 갇혀 지냈다. 매일 그녀의 방을 드나드는 사람은 부인과 노파뿐이었다. 밥을 가져다주고, 방을 정리하고, 변기를 치우고, 향을 피우는 등 반복적이고 따분한 일을 하면서 말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백천범은 여전히 성가신 질문들을 건넸다. 부인은 첫날에만 동요하더니 그 뒤로는 줄곧 태연한 얼굴을 유지했다.

이곳의 주인은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가 백천범과 세자를 잊은 게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러나 백천범은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이렇게 푸대접하면서 그녀의 정신과 투지를 꺾어 놓은 뒤에 처리하려는 건지도 모르니.

상대가 힘을 비축하고 있다면 그녀 또한 한가하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옷장을 뒤져 튼튼한 옷을 찾아 세자와 자신을 함께 동여맸다. 세자가 날이 갈수록 무거워지니 안고 있는 게 힘들 지경이었다. 지금처럼 위험천만한 곳에서는 아이와 조금도 떨어져 지낼 수 없었다. 물론 잘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세자도 제법 잘 협조해 주었다. 이곳에 온 뒤로 한 번도 크게 운 적 없었고, 배가 고플 때도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 직접 백천범의 옷깃을 헤집어 젖을 먹기도 했고 다 먹고 난 뒤에는 옷을 여며야 하는 걸 아는지 옷깃을 끌어당기고 얌전히 잠들었다.

일찍 철이 든 것 같은 아이의 행동에 위안을 느끼는 한편, 가슴이 시큰해졌다. 다 그녀의 잘못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작은 아이를 고생길로 밀어 넣다니.

이 괴상한 곳에서는 도무지 시간을 알 수 없었다. 백천범은 손톱으로 벽에 표시를 남겼다. 밥을 가져올 때마다 표시를 남겨 날짜를 세려는 것이었다. 단단한 벽은 그녀가 힘껏 긁어야 흔적이 남았다.

몇 차례 긁고 나니 가지런하던 손톱은 들쑥날쑥하게 변해 버렸다. 백천범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단단한 진흙은 나름대로 이점이 있는 법이지 않은가.

발이 걷히며 부인과 노파가 음식을 가지고 들어왔다. 백천범은 이제 그들이 부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식탁 앞에 앉아 젓가락을 들고 밥을 먹었다. 노파는 손을 늘어뜨린 채 문 옆에 서 있었고 부인은 여느 때처럼 그녀에게 음식을 덜어 주었다. 반찬 수가 많진 않았지만, 정갈하고 맛도 훌륭했다.

그녀는 밥을 먹다 갑자기 헉 하고 숨을 들이켜며 젓가락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이내 배를 감싸 쥔 그녀가 허리를 굽히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깜짝 놀란 부인이 손짓을 하며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백천범은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젠장, 이런 상황에서도 입을 꾹 다물고 있다니! 말 좀 하면 어디가 덧난단 말인가?

부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그녀도 입을 꾹 다물었다. 아이가 눌릴까 봐 그녀는 아예 바닥에 앉아 인상을 썼다.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초조해진 부인은 책상으로 달려가 글씨를 적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종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어디가 아프십니까?」

훌륭한 서체였다. 한눈에 봐도 오랜 시간 연습한 듯 정갈했다. 백천범은 글자를 흘겨본 뒤, 이를 악물고 물었다.

“글을 쓰면서까지 말을 하지 않는 이유가 뭐예요?”

부인은 조용히 입을 벌렸다. 그녀의 입안을 본 백천범은 숨을 헉 들이쉴 수밖에 없었다. 부인은 혀가 없었다.

백천범은 제 혀까지 굳어진 느낌에 말을 더듬으며 노파를 가리켰다.

“저, 저분도, 말을 하지 못하는 거예요?”

고개를 끄덕인 부인이 종이에 적힌 글자를 가리키며 어디가 불편한지 캐물었다.

백천범이 성이 난 얼굴로 물었다.

“누가 혀를 자른 거예요? 이곳 우두머리가요? 대체 이곳 주인이 누구예요?”

“…….”

“왜 당신들에게 이런 짓까지 한 거예요? 당신들이 입을 잘못 놀릴까 봐?”

“…….”

“설마, 바깥에 있던 보초들도 말을 못 하는 거예요?”

“…….”

“됐어요.”

쉼 없이 질문을 던지던 백천범은 조금 풀이 죽은 모습으로 식탁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을 못 하는 이유를 알았으니 됐어요. 피곤하니 잠시 쉬어야겠어요. 그만 나가세요.”

부인은 노파를 향해 손짓하더니 상을 정리하고 빠르게 방을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인이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백천범의 어깨를 살짝 토닥이더니 손짓했다.

백천범은 그녀가 하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왜요?”

부인은 손짓을 하며 설명했지만 백천범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인은 하는 수 없다는 듯 글로 적은 뒤, 그녀에게 보여 주었다.

종이에는 ‘숟가락’이라 적혀 있었다.

백천범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숟가락이요? 전 숟가락이 없어요.”

부인은 차분하게 종이에 적힌 글씨를 계속 가리켰다. 숟가락을 달라는 의미였다.

백천범은 어쩔 도리가 없다는 얼굴로 양손을 펼쳐 보였다.

“숟가락이 없는데 어떻게 주겠어요.”

그녀는 더는 신경 쓰지 않고 부인을 등지고 누웠다.

조용히 침대 옆을 지키던 부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밖으로 나갔다.

백천범은 가만히 누워 바깥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발에서 살짝 소리가 나는 게 누군가 안을 몰래 들여다보는 듯했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한참 뒤, 발에서 또다시 미세한 소리가 들렸다. 안을 들여다보던 사람이 자리를 뜬 모양이었다.

이곳에서의 밤은 아주 길었다. 백천범은 조용히 일어나 세자를 침대에 눕혔다. 며칠 동안 지내면서 이 시간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으니 지금 움직여야 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가까운 거리에 세자를 눕힌 그녀는 바닥에 앉아 물소 가죽을 걷었다. 조금 전에 숨긴 숟가락을 꺼내든 그녀가 바닥을 파기 시작했다. 앞서 손으로도 파보았지만 흙이 너무 딱딱해서 단단한 물건을 찾아야 했다.

그러나 숟가락도 쉽지만은 않았다. 그녀는 물을 약간 부어 흙이 조금 부드러워졌을 때 서둘러 숟가락으로 흙을 파냈다.

참 신기한 흙이었다. 손에 쥐어 보면 온기가 느껴졌다. 물이 스며들긴 했어도 흙은 금세 건조해졌다. 그녀는 파낸 흙을 한 덩이씩 뭉쳐 소매 안에 넣었다. 탄환이 없으니 흙덩이라도 모아 두면 쓸모가 있으리라. 숟가락도 발로 밟아 두 동강 내면 가장자리가 날카로워질 테니 무기로 삼을 수 있을 터였다.

방 안에는 등잔불 하나만 남아 있었다. 등잔불의 수를 보니 지금이 밤이란 걸 추측할 수 있었다. 세 끼 식사 시간을 더해 보면 그녀가 계산한 날짜가 거의 일치했다. 하루가 일 년처럼 느껴지긴 했지만, 그녀가 이곳에 온 지도 벌써 이레가 흘렀다.

그녀는 줄곧 한 가지 문제를 생각해 왔다. 산굴에는 창문은 고사하고 밖으로 이어지는 문이 유일한 통로였는데, 늘 두꺼운 발이 통로를 막고 있었다. 그런데도 답답한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분명 이 방 안에 공기가 통하는 곳이 있을 터였다. 그렇지 않다면 진작 숨이 막혀 죽었겠지.

그녀는 등잔을 들고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 그러나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죄다 두꺼운 벽이었고, 손가락만 한 크기의 구멍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침대로 돌아갔다. 세자의 이불을 잘 여며 주고 입을 맞춘 뒤, 사랑스러운 아들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아이를 보고 있자니 힘이 다시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래,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이곳을 나가야 했다.

그러나 당장 뾰족한 수가 없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벽은 꼼꼼하게 살펴보았지만, 천장은 한 번도 살펴본 적이 없었다. 설마…….

가구는 전부 멀구슬나무로 만들어져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방에 놓인 커다란 탁자도 쉬이 움직일 수가 없었다.

힘에 부친 그녀는 속상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다. 턱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겨 있는데 문득 곳곳에 설치된 나무 기둥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나무를 타는 데 선수였다. 그간 안락한 생활을 한 터라 나무에 오를 일은 없었지만, 이 정도 기둥은 충분히 탈 수 있었다. 그녀는 손을 비비고 기둥 앞에 섰다. 이윽고 두 다리로 기둥을 꽉 감싼 채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천장은 그리 높지 않았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손으로 만질 수 있었다. 천장에 붙인 얇은 죽순대를 손으로 벌리자 네모난 구덩이가 드러났다.

목을 빼고 자세히 살펴보니, 마침내 공기를 내보내는 구멍이 보였다. 다만 그녀의 팔이 들어갈 정도로 작은 구멍인지라 그 구멍으로 탈출하는 건 불가능했다.

* * *

일 년 넘게 중단되었던 내전은 결국 다시 불이 붙었다. 지난 전쟁과 달리, 이번에는 북쪽에 치우친 불길이었다.

묵용감은 소수의 정예 부대를 이용해 백장간의 병력을 뿔뿔이 흩어 놓았다. 백장간은 점차 수동적으로 방어하는 데만 급급해졌다. 그렇다고 해도 위수 주변의 주력 기지는 꿋꿋이 선점하고 있었다.

엄청난 병력이 험준한 지대의 관문을 지키고 있으니 묵용감도 손쓸 방법이 없었다. 더욱이 황제가 직접 백장간의 뒤를 봐주고 있는 터라 군량과 보급품이 늘 제때 운송되었다. 결국 대치 상황이 한 달이나 이어졌지만, 북이 패할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백장간은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위수 강변에 서서 먼 곳을 바라보았다.

관웅이 다가와 말했다.

“장군, 군량이 도착했습니다. 역시 폐하께서 직접 신경을 써 주셨습니다. 상부에서도저희가 원하는 것들을 전부 넘겨주더군요. 함부로 가져가려는 사람도 없습니다.”

백장간이 냉소를 흘렸다.

“이번 전쟁에 자신들의 목숨이 달려 있으니 우리에게 기대를 걸고 있겠지. 한데 누가 감히 군량을 넘보겠느냐? 초왕은 위수만 넘으면 견디지 못할 것이다.”

“맞습니다.”

관웅이 말했다.

“초왕이 흉포하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그리 잔인할 줄은 몰랐습니다. 피범벅이 된 머리를 성벽에 걸어 놓아 성을 지키던 사병들이 벌벌 떨며 그대로 항복했다더군요. 하지만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대체 그런 구석진 마을에서 무얼 하려는지 모르겠습니다. 설마 우리 쪽 병력을 견제하기 위해서일까요? 아무리 그래봤자 저희의 주력 기지는 이곳인데 말입니다. 저들이 아무리 성동격서聲東擊西의 전략을 펼친다고 한들 소용없는 일입니다.”

백장간이 무심히 말했다.

“가서 지도를 유심히 살펴보거라. 초왕이 점령한 곳들을 이어보면 문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관웅이 흠칫 놀라 물었다.

“산길을 뚫고 올 것이라는 말씀입니까?”

“그럴 테지. 하지만 시간을 지체하고 있다.”

백장간이 앞쪽의 광활한 수면을 가리켰다.

“겨울이 되어 날씨가 점점 추워지고 있으니, 분명 수면이 얼기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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