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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436)화 (435/1,192)

제436화

황제는 한참 동안 고민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다음은? 초왕이 태자를 제거한 뒤에 짐이 그 애를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초왕의 손으로 태자를 처리한 뒤, 조정으로 불러 연회를 베풀어야지요. 궁에 들어오기만 기다렸다가 곧바로 궁을 봉쇄하고 처단하면 되옵니다.”

황제의 입이 살짝 달싹였다. 백 승상의 계획에 적잖은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황제의 대답은 한참 후에야 돌아왔다.

“예전에 그런 일이 있었으니 초왕을 궁에 끌어들이는 게 쉽지 않을 걸세. 더욱이 태자가 하는 일은 늘 빈틈이 없지 않은가. 태자가 왕비를 죽였다는 증거를 어찌 찾겠는가?”

승상이 간악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증거가 없다면 새로 만들면 그만입니다.”

그가 눈을 반짝였다.

“설령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한들, 그가 한 일로 만들면 됩니다.”

황제에게는 황제만의 자존심이 있는 법이었다. 가능하다면 그는 두 번 다시 초왕에게 의지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벗어난 초왕의 그림자인데,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은 백장간을 향한 믿음도 굳건했다.

“승상의 말도 일리는 있네. 하지만 이미 전쟁을 시작했으니 시간이 많지 않네. 초왕이 믿을 만한 증거를 만드는 일이 쉽지는 않을 걸세.”

황제가 긴 손가락으로 탁자를 가볍게 두드렸다.

“짐이 보기에는 두 가지 모두 준비하는 게 좋겠네. 승리를 거두거든 저들을 한 번에 없애면 되니 모든 걸 순조롭게 끝낼 수 있겠지. 패배한다면… 준비해 둔 증거를 꺼내 초왕에게 직접 결정을 내리라고 하겠네. 승상의 뜻은 어떠한가?”

백 승상은 쓴웃음을 삼켰다. 그가 이렇게 많은 말을 늘어놓은 것은 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였다.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면 지조가 무슨 소용이랴. 황제는 이러한 이치조차 알지 못했다……. 이제 그는 초왕이 백천범의 체면을 봐서 자신의 목숨만은 살려 주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 * *

정신을 차린 백천범은 자신이 산굴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부는 매우 넓었고 곳곳에 커다란 나무 말뚝을 기둥처럼 세워 놓았다. 무너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인 듯했다. 천장에는 가는 죽순대를 대어 진흙이 밑으로 떨어지지 못하게 막았고, 바닥에는 두꺼운 물소 가죽을 깔아 습기와 찬기를 막았다.

얼핏 보기에는 평범한 집과 다르지 않았다. 산굴 안에는 침대와 의자, 탁자, 장, 병풍이 놓여 있었고 모퉁이에는 예쁜 향로까지 있었다.

탁자에 놓인 하얀 등불이 안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 백천범은 얼이 빠진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어쩌다 이런 곳에 오게 된 것이란 말인가?

그때 그녀의 옆에서 무언가 꾸물거리는 걸 발견했다. 고개를 숙여 바라보니, 세자였다. 그녀 옆에 누워 있던 세자는 까만 두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신기하다는 듯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녀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아이를 품에 안았다. 그녀와 세자는 누군가에게 납치를 당해 이곳에 온 것이다. 대체 누가, 무엇 때문에 납치를 한 것이란 말인가? 대체 자신과 세자를 어찌하려고?

수많은 생각이 스쳤지만 결국 그녀의 머리를 지배한 생각은 단 한 가지였다. 그녀와 아이의 목숨을 지켜야 했다. 목숨을 부지해야 이곳에서 도망칠 수 있었다.

도망은 그녀의 특기 중 하나였다. 어려운 상황일수록 그녀는 더욱더 냉정해졌다. 다만 아이를 지켜야 했기에 예전보다 신중하게 행동해야 했다.

그녀는 맨발로 딱딱한 소가죽을 밟으며 조용히 문으로 향했다. 문은 발로 덮여 있었다. 꼭대기에서부터 바닥까지 꼼꼼히 덮은 두꺼운 발이었다. 함부로 발을 걷을 수 없었기에 그녀는 한 손에 세자를 안고 한 손에 힘을 주어 슬쩍 틈을 벌렸다. 발 가장자리가 손가락을 베는 듯 쓰라린 통증이 느껴졌다.

바깥은 텅 비어 있었다. 안이 너무 밝았기 때문에 제대로 보이는 게 없었다. 그녀가 식별할 수 있는 건 그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반짝거리는 무언가였다.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그녀는 슬쩍 손을 뻗어 그 물체를 가볍게 더듬어 보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그때 그녀는 화들짝 놀라 손을 거두었다. 누군가의 얼굴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바깥의 어둠에 눈이 어느 정도 적응되니 역시나 사람의 형상이 보였다. 무표정한 누군가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한 명이 더 있었다. 허리춤에 기다란 형체가 있는 걸 보아, 검을 찬 보초인 듯했다.

발각된 이상, 백천범도 굳이 숨을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세자를 감싸 안은 채 힘껏 발을 뚫고 나왔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체 누구인가? 날 잡아들여 무엇 하려고? 이곳의 우두머리를 만나야겠네.”

두 보초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입을 굳게 닫고 있었다. 어찌나 고집스레 입을 다물고 있는지, 조각상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들의 침묵에 백천범은 그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스륵 하는 소리와 함께 새하얀 칼이 허공을 가르며 그녀의 앞을 막았다.

백천범이 걸음을 멈추었다.

“좋네. 가지 않을 테니 당신들의 우두머리를 불러주게. 물어볼 것이 있네.”

그녀의 말은 물에 떨어진 낙엽처럼 아무런 반응을 일으키지 못했다. 어차피 예상한 일이었기에 그녀는 힘껏 발을 뚫고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안으로 들어온 그녀는 방 안팎이 아주 따뜻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세히 살펴봐도 불을 땐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알기론 산굴은 축축하고 추운 곳이다. 한데 이리 따뜻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세자를 안은 채 방 안을 뒤졌다. 옷장 안에는 여인과 아이의 옷가지가 놓여 있었고, 상자에는 요와 베개가 들어 있었다. 그녀와 아이를 위해 준비된 물건으로 보였다.

벽 앞에 놓인 책상에는 두꺼운 종이 뭉치와 족제비 털로 만든 붓 몇 자루가 놓여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종이와 붓 모두 고급이었다. 이 물건을 쓰던 주인은 규율을 중시하는 사람이 틀림없었다.

방 안을 샅샅이 살펴본 끝에, 그녀는 한 가지 결론을 도출해냈다. 방 안에는 도자기, 칼, 부시 등 무기가 될 만한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그저 가볍고 부드러운 물건이나 그녀의 힘으로 움직일 수 없는 가구가 전부였다.

그녀는 세자를 안고 흔들의자에 앉아 천천히 몸을 흔들었다. 이렇게 된 이상, 마음을 안정시켜야 했다. 곤란한 상황이 닥칠 때 냉정함을 유지하는 것은 그녀의 장점이자 생활에서 익힌 지혜이기도 했다.

방 안에서는 시간을 알 수도 없었지만, 배가 고파왔다. 문득 고개를 숙여 아이를 바라보니 조용히 자신의 손가락을 빨고 있었다.

정말 사리 분별을 잘하는 녀석이었다. 위험한 곳에 온 사실을 알고 울지도 않다니. 그녀는 저절로 미소를 지으며 아이의 얼굴에 입을 맞췄다.

“우리 아기, 착하기도 하지.”

그녀가 옷을 들쳐 젖을 물렸다. 세자는 대견하게도 칭얼거리지도 않았다.

그녀는 아이의 머리를 가볍게 쓸어내렸다. 묵용감을 쏙 빼닮은 얼굴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쓰려왔다. 어려운 상황에 놓인 것은 그리 두렵지 않았지만, 그와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괴롭게 했다.

무엇보다 걱정되는 건 그녀와 아이를 잃어버린 묵용감의 상태였다. 분명 초조함에 오장육부가 다 뒤틀리는 기분을 느낄 테지. 잠도 자지 못하고 두 사람을 찾을 터였다. 혹여 화를 참지 못하고 하인들에게 칼이라도 휘두르는 건 아닐지…….

한창 생각에 잠겨 있는데 발이 걷히며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곧장 몸을 틀고 경계심이 가득 담긴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뜻밖에도 안으로 들어온 이는 사십 대쯤으로 보이는 부인이었다.

하얗고 깨끗한 얼굴에 옅은 자색 옷을 입은 그녀는 단정하게 머리를 틀어 올려 머리 꽂이를 꽂고 있었다. 공손하고 단정한 자태가… 꼭 궁 안의 마마嬷嬷를 보는 듯했다.

그녀는 백천범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동작이 정확하고 노련하여, 궁에서나 볼법한 모습이었다.

젖을 다 먹은 세자가 손을 뻗어 어미의 옷을 끌어당겼다. 백천범은 미소를 지으며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땐, 부인은 밖으로 나간 뒤였다.

백천범은 의아함을 느꼈다. 그저 인사를 올리려고 들어왔단 말인가?

그때, 발이 다시 걷히며 이번에는 노파가 들어왔다. 앞서 왔던 부인과 마찬가지로 단정한 차림새의 노파는 손에 쟁반을 들고 있었다. 그릇이 놓여 있는 걸 보니 그녀에게 밥을 가져다주려는 것 같았다.

백천범은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먹을 게 있다면 그리 겁날 것도 없었다. 음식에 독을 탔을 리도 없었다. 힘들게 납치를 해놓고 독을 먹여 죽일 이유가 있겠는가.

앞서 들어왔던 부인도 다시 들어와 노파와 함께 상을 차렸다. 상을 다 차린 뒤에는 그녀에게 밥을 먹으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백천범은 아이를 안고 식탁 앞에 앉았다. 부인이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아이를 달라는 의미였다. 물론 넘겨줄 수 없었다. 아이를 안은 그녀는 한 손으로 젓가락을 집어 밥을 먹었다. 부인도 더는 강요하지 않고 한쪽에 서서 음식을 집어 주었다.

백천범은 원래 하고 싶은 말을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지만, 부인과 노파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아 그녀도 딱히 말을 건네지 않았다. 밥을 먹다 문득 정신이 든 그녀가 물었다.

“아주머니, 여기가 어디예요?”

부인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이곳 우두머리를 만나고 싶은데요.”

주인이 나타나지 않는데 계획도 없이 움직였다간, 그자의 마음을 읽을 수 없으니 도망치기 더 어려운 법이었다.

부인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백천범은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질문을 건넸다.

“제가 어쩌다 이곳에 온 거죠? 원하는 게 뭐예요? 저와 아이를 죽일 생각인가요? 아니라면 언제쯤 우리를 풀어줄 건데요? 대체 이곳 우두머리가 누구예요? 왜 절 보러 오지 않는 거죠? 설마 제가 아는 사람인가요?”

그녀는 질문을 건네며 부인의 표정을 빠르게 훑었다. 그러나 부인은 줄곧 옅은 미소만 지을 뿐 다른 표정을 떠올리지 않았다.

백천범은 보란 듯이 입 안 가득 밥을 밀어 넣고 우걱우걱 씹어 삼켰다.

“당신들 우두머리는 개자식이 분명해요. 납치할 용기는 있으면서 보러 올 용기는 없나 보군요. 조상들이 덕을 쌓지 못해서 그런 개돼지만도 못한 자식을 낳은 거겠죠…….”

곁눈으로 훑으니 역시나 부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녀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아무런 반응이 없을 줄 알았더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접근하다 보면 답을 얻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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