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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435)화 (434/1,192)

제435화

“이곳은 어쩐 일이십니까, 형님.”

묵용감이 그를 바라보며 건조하게 말했다.

“전투는 염려 마십시오. 이번엔 임안성까지 쳐들어갈 것입니다.”

“네가 걱정이 되어 온 것이다.”

태자가 말했다.

“다른 일에는 신경을 쓰지 못할 테니 옆에서 상황을 봐 주려고 온 것이지.”

묵용감이 쓴웃음을 지었다.

“제가 걱정될 게 뭐가 있겠습니다. 지난번에는 마땅한 정착지가 없어 저와 함께 계셨지만, 이제는 지켜야 할 곳이 있으니 형님께서 자리를 비우시면 안 될 것입니다. 수성으로 돌아가시지요.”

“그리 떠밀지 말거라.”

태자가 그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어젯밤 한숨도 못 자지 않았느냐? 식사를 마치거든 오늘은 일찍 쉬거라. 정신을 맑게 다스려야지. 내일은 행군도 해야 하지 않더냐.”

한통은 태자의 말뜻을 곧장 알아들었다. 초왕은 언뜻 보기엔 평소와 다를 바 없었지만, 그의 속이 지옥이리라는 건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는 양쪽 구레나룻이 하얗게 셀 정도로 마음을 쓰고 있었다. 한창 혈기 왕성할 나이에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아리게 했다.

사무치는 그리움이 깊어지면 좋을 게 없었다. 그리워하는 마음은 언젠가 재로 변하는 법이었다. 하루가 반복되고 해를 거듭할수록 서서히 기력을 잃다가 끝내 우울감에 지배되어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지금은 왕비의 복수에만 몰두하느라 전쟁 외에 다른 일에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와 영구가 초왕에게 몇 차례나 충언을 올렸지만, 초왕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태자는 군주이자 초왕의 형이니, 그의 체면이라면 조금 봐주지 않겠는가.

* * *

“뭐라 하였느냐?”

백장간이 입꼬리를 아래로 늘어뜨렸다.

“저들이 아침에 소만진을 점령했다?”

“예. 방금 전해 들은 소식입니다.”

관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쥐도 새도 모르게 산을 넘어 소만진을 점령했단 말입니까? 무슨 속셈인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코앞에 이렇게 큰 부대가 있는데 가까운 길을 버리고 멀리 돌아간단 말입니까?”

자신들이 기선을 잡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초왕, 그 여우 같은 놈이 꾸민 일이 틀림없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적의 배를 태우고, 저들은 저쪽에서 마을을 점령하고……. 왕비의 발인이 있는 날 이리 나왔다면, 설마……. 백장간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 초왕은 초왕비의 장례로 눈가림을 했는지도 몰랐다. 혼동을 주어 그들을 현혹하려 한 것이다. 초왕비와 세자의 죽음에는 의심스러운 점이 많았다. 초왕에게 복수하기로 결심한 그의 판단은 역시 틀리지 않은 듯했다.

다행히 저들의 배를 불태웠으니 이번만큼은 무승부라고 볼 수 있었다.

백장간은 지도를 펼치고 붓으로 소만진에 원을 그렸다. 다만 아직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체 소만진을 함락해 무엇을 하겠단 말인가? 보잘것없는 작은 마을을…….

뒷짐을 진 백장간이 방 안을 서성였다.

“수군들의 반응은 어떠하더냐?”

“경계를 강화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다시 불을 지르려 해도 불가능할 듯합니다.”

백장간이 제 턱을 만지며 말했다.

“초왕이 수군을 내버려 두고 산을 오른 걸 보니, 우리가 지키는 곳이 공격은 어렵고 수비는 쉬운 험난한 지대라는 걸 아는 듯하구나. 굳이 지금 남하할 것 없다. 저들이 제 발로 찾아와 공격을 개시하거든 우린 이곳을 사수하면 된다.”

그가 잠시 생각하다 말을 이었다.

“형제들에게 맞은편 수군을 예의주시하라고 이르거라. 조금이라도 움직임이 느껴지거든 곧장 나에게 고해야 한다. 또한 소만진에 병사를 보내 두거라. 저들은 소만진을 돌파구로 삼아 우리를 피해 북쪽으로 들어갈 생각일 테니.

하지만 산세가 험준하여 행군이 어려울 것이다. 정예부대 두 사단을 보내 정면이 아닌 왼쪽과 오른편에서 비스듬히 진격하라 이르거라. 저들의 대열을 흩트려서 산속을 며칠 더 헤매게 한 뒤, 진이 다 빠지면 그때 하나하나 없애 주겠다.”

관웅이 눈을 반짝였다.

“좋은 방법입니다. 저들의 선봉대를 견제하고 각개 격파하면 우리 병사들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것입니다. 초왕은 병력이 부족한 데다 먼 길을 돌아와서 지원을 받기 어려울 테니 막심한 피해를 볼 게 분명합니다.”

* * *

황제의 관심은 오직 한 가지였다. 그가 눈을 커다랗게 뜨며 물었다.

“누가 먼저 친 것이냐?”

고승해가 군보를 내밀며 아뢰었다.

“군보에 적힌 바로는 양쪽 다 동이 틀 무렵 공격을 개시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동시에 움직인 듯합니다.”

황제는 군보를 펼쳐 등불 아래에 가져갔다. 몇 줄밖에 안 되는 내용이었지만 그는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마침내 황제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승상을 불러오너라.”

고승해는 대답을 올린 뒤, 허리를 숙인 채 밖으로 향했다.

황제는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전쟁이 나다니! 그가 손을 쓰지 않아도 초왕이 움직이고 말았다. 물론 이것도 나쁘지만은 않았다. 백성들의 입에 끊임없이 오르내리게 될 주인공은 그가 아닌 초왕과 태자가 될 테니.

역시 형제는 형제였다. 동시에 공격하다니, 마음이 통하는 구석이라도 있단 말인가?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백장간을 위수로 보낸 덕에 초왕이 그의 의중을 파악하고 먼저 공격하기로 결심한 듯했다. 다행히 백장간이 빠르게 반응해,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무승부를 만들었다.

이런 상황은 초왕의 전적에서 아주 보기 드문 일이다. 역시 국사의 말이 옳았다. 백장간은 그에게 복을 가져다주는 장군이었다. 그가 대업을 이루는 데 큰 도움을 줄 사람이 틀림없었다.

남북의 상황은 겉보기에는 제법 평화로웠지만 언제든 꺼질 수 있는 물거품과 같았다. 한 나라에 두 명의 군주는 말이 되지 않았다. 그들 중 이 이치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그런데도 승낙했던 것은 기필코 이기리라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만반의 준비를 마쳤으니 드디어 때가 온 게 분명했다.

소식을 전해 들은 백 승상이 급히 찾아왔다. 어쩐지 그의 안색이 조금 어두웠다.

황제가 물었다.

“승상도 알고 있는가?”

백 승상은 황제의 의도를 깨닫고 허리를 숙이며 맞잡은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예. 신도 방금 백 장군과 초왕이 전쟁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사옵니다.”

“승상은 어느 쪽이 도발했는지 아는가?”

“그것은…….”

백 승상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황제의 명령도 없이 백장간이 제멋대로 전쟁을 시작했으니, 죽어 마땅한 죄였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신이 들은 내용은 초왕의 병사들이 소만진이라는 마을을 함락시킨 후, 백 장군이 그들의 배를 불태웠다는 소식이었습니다.”

황제가 미소를 지었다.

“두 곳의 거리를 생각하면 소식을 전하는 데에만 반나절은 걸릴 걸세. 초왕도 아침에 마을을 점령했고 백 장군도 아침에 불을 태웠으니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 아닌가? 승상은 어찌 그 후란 표현을 쓰는가?”

백 승상은 깜짝 놀라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폐하, 제 우식이 함부로 날뛰었습니다. 신이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탓입니다. 벌을 내려주시옵소서, 폐하.”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직접 일으켰다.

“일어나게. 짐은 책망하려는 뜻이 아니었네. 오히려 그 반대지. 백 장군이 처신을 아주 잘했더군. 짐이 그간 너무 우유부단했네. 백 장군이 움직이지 않으니 저들도 참지 못한 것이지.

차라리 잘되었네. 승상이 직접 전쟁을 선포하게. 초왕이 전쟁을 일으켜 짐이 부득이하게 맞서는 것을 똑똑히 전하게. 짐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걸 만백성들이 알아야지.”

백 승상은 황제가 백장간을 위수로 보낼 때부터 이런 날을 예상하고 있었다. 참으로우스운 일이다. 이 순간에도, 황제는 어진 군주의 모습을 꾸며내길 잊지 않았다.

“예. 신, 명 받잡겠나이다.”

백 승상은 잠시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폐하. 초왕은 교활하지만 행군과 전투에 능한 사람입니다. 백 장군이 혈기 왕성한 장군이긴 해도 초왕과 맞서기에는 아직 이르지 않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경험이 많은 장군을 더 보내야 할 것 같은데, 폐하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황제가 못마땅한 얼굴로 그를 흘겨보았다.

“그 말은 적의 기개를 칭송하고 아군의 사기를 떨어뜨리지 않는가. 승상은 제 아들도 믿지 못하는가? 짐은 백 장군을 믿네. 게다가 수장이 많으면 의견 통일이 어려워 독이 될 걸세.

백 장군은 짐이 직접 임명한 전원장군이네. 다른 장군을 보내 백 장군을 억압할 필요는 없지. 혈기 왕성한 젊음이 얼마나 좋은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말도 괜한 소리가 아니지. 초왕을 대적하려면 백 장군처럼 용감한 이가 나서야 하네.”

백 승상은 혹시라도 전쟁에 패했을 때 백장간 홀로 죄를 뒤집어쓰지 않게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전쟁에서 패한다면 초왕은 임안성까지 쳐들어올 게 분명했다. 그때가 되면 황제의 목숨도 부지하기 힘들 터인데 어찌 백장간의 죄를 묻겠는가.

죄를 묻는 건 그리 중요한 일도 아니었다. 초왕은 백씨 집안을 증오하고 있으니. 황제를 끌어내리면, 그는 가장 먼저 백씨 집안을 치러 올 터였다. 그는 천범이 없다는 사실이 애석하기만 했다. 만약 그녀가 초왕 곁에 있었다면 가족들을 위해 몇 마디 거들어 줬을지도 모르는데…….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백 승상의 얼굴에 문득 깨달음이 떠올랐다. 지난번 초왕이 군대를 일으킨 이유는 황제가 초왕비를 데리고 있는 척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초왕은 다시 전쟁을 일으켰다. 설마……. 왕비의 죽음이 황제와 관련이 있다고 여긴단 말인가?

부인을 죽인 원수라면 그야말로 철천지원수가 다름없을 터. 백천범이 떠났으니 초왕은 고삐 풀린 야생마가 되었을 테지. 백 승상은 별안간 오한을 느꼈다. 아무래도 이번 전쟁은 불길하기 짝이 없었다…….

“폐하, 초왕이 전쟁을 일으킨 동기를 아십니까?”

“저들의 동기도 짐과 마찬가지일 테지.”

황제가 느긋하게 말했다.

“한 국가에 두 군주라니, 이전의 통치 방법은 헛소리에 불과하지 않은가.”

“폐하, 잊으셨습니까? 초왕비의 장례가 이제 막…….”

황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승상의 말은 초왕이 공격을 개시한 이유가 초왕비의 죽음 때문이다? 짐과는 연관이 없는 일이 아니던가. 설마 짐이 초왕비를 죽이기라도 했단 말인가?”

“누군가 초왕을 속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황제가 마침내 그의 말뜻을 깨달았다.

“태자를 말하는 것인가? 태자가 왕비를 죽이고 그 죄를 짐에게 뒤집어씌워 초왕이 북진을 했다? 초왕비의 원한을 갚기 위해?”

“아무래도 그런 듯합니다.”

백 승상이 얼른 말을 이었다.

“증거를 찾아 태자가 한 짓이라는 걸 밝혀 내면 초왕의 칼끝은 태자에게로 향할 것입니다. 폐하, 초왕의 손을 빌려 태자를 제거하는 것이 어떠신지요. 그리되면 태자 때문에 속을 끓이실 일은 영원히 없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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