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434)화 (433/1,192)

제434화

태자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실망했겠구나. 나다.”

“태자 오라버니.”

황보주아는 눈물을 닦으며 한숨을 쉬었다.

“보셨지요?”

“그래. 봤다.”

태자가 그녀를 위로했다.

“왕비가 떠난 지 얼마 안 되었으니 기분이 좋지 않겠지. 조급해할 것 없다. 천천히 하거라. 언젠간 저 애도 다 알게 될 것이다.”

황보주아가 처량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겁니다. 왕비가 떠나면 오라버니와 제 사이에 장애물이 사라질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아예 마음의 문을 닫아 버렸으니 이젠 누구도 들어가지 못하겠지요.”

태자가 목소리를 낮췄다.

“요즘 들어 변하고 있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느냐? 예전의 초왕으로 돌아오고 있다. 마침내 치정에서 벗어났으니 무엇이 중요한지 깨달은 것이지.”

황보주아는 묵용감이 사라진 곳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지만 슬퍼만 하시고 통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걸요.”

“사내가 가장 갈망하는 것은 권세와 성취다. 저 애의 도움을 받아 내가 천하를 갖거든, 그에 걸맞은 높은 지위를 내릴 것이다. 만백성이 머리를 조아리면 그땐 저 애도 내 깊은 뜻을 깨닫지 않겠느냐.”

황보주아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셋째 오라버니께서 바라는 것은 그런 게 아닙니다.”

“너도 알고 있지 않느냐? 저 애가 바라는 것은 잘못된 길이다. 그러니 우리가 저 애를 되돌려야만 하지.”

잠시 말을 멈춘 태자는 깊은 고민에 잠겼다.

“주아야, 사실 넌 저 애를 더 은애하는 게 아니더냐?”

갑작스레 속마음을 들킨 황보주아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곧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사실 태자 오라버니의 마음속에 저는 없었습니다. 제 말이 맞지요?”

긴긴 시간 동안 두 사람은 이 문제에 대해서는 모호한 말만 늘어놓았다. 솔직히 털어놓아서 좋을 게 없었으므로. 하지만 찬 바람이 불고 달빛도 쓸쓸한 오늘 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아직 드리운 망설임을 들킬 때면, 다른 질문으로 답했지만.

두 사람은 같은 부류의 사람이니 늘 호흡이 잘 맞았다.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자신을 속이는 것쯤이야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 * *

이날 밤, 하늘을 올려다본 많은 이들은 솜털이 난 듯한 달무리를 보곤 아침에는 비바람이 몰아칠 거라고 추측했다.

막상 동틀 무렵이 되자 새빨간 태양이 지평선에 떠올랐다. 바람이 심하게 불긴 했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다. 근래에는 보기 드문 좋은 날씨였다.

학평관은 붉은빛으로 물든 동쪽 하늘을 바라보며 합장을 했다. 맑은 날씨를 내려준 하늘에게 감사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날씨가 좋으니 왕비와 세자도 마음 편히 길을 떠날 수 있을 터였다.

정해진 시간이 되자, 악단 무리가 앞장섰다. 뒤이어 스물네 명의 기수가 펄럭이는 하얀 깃발을 들고 길을 나섰다. 이어 종친 왕비의 의장대가 그 뒤를 따랐다. 대략 오백 명 가까운 사람들이 왕비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고 있었다.

왕비를 위해 태울 종이와 천으로 만든 각종 공예품부터 지전, 금은 식기를 손에 든 행렬이 거리를 따라 성 동문으로 향했다. 관을 드는 예순네 명의 인부들 뒤로 그들과 교대할 다른 인부들, 자발적으로 따라나선 문무 관원, 상인, 일반 백성들의 행렬이 이어졌고, 법의를 입고 법구를 든 도사, 비구니, 스님들이 그 뒤를 따르며 끊임없이 경전을 외웠다.

가장 끝에 있는 무리는 은백색 갑옷을 갖춰 입은 호위대였다. 호위대 앞에 서 있던 가동은 금색 실로 ‘초’ 자가 수 놓인 깃발을 들고 호위대를 이끌었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많은 백성들이 초왕비가 가는 길을 배웅했다. 백성들은 소설 같은 삶을 살다간 왕비를 공경했다. 다들 그녀를 상냥하고 착하며 정의로운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특히 그녀가 오수진에서 지냈을 때의 이야기에 많은 백성들이 흥미를 보였다.

* * *

잠에서 깬 황제는 땀이 흥건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백 귀비가 눈을 비비며 따라 일어났다. 부드러운 비단결이 뱀처럼 그의 몸을 타고 올라왔다.

“폐하, 무슨 일이십니까?”

황제가 땀을 훔치며 황망하게 말했다.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았소?”

백 귀비는 당황스러운 듯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습니다. 무슨 소리를 들으셨단 말입니까?”

황제는 천천히 마음을 가라앉힌 뒤에야 입을 열었다.

“전고, 전고 소리를 들었소.”

황제의 말에 백 귀비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폐하, 폐하께서 근심이 너무 크시어 그런 꿈을 꾸시는 겁니다. 국사가 그날 한 말을 부디 가슴 깊이 새기셔야 합니다. 천하에 군주가 둘일 수는 없는 법이지니, 폐하야말로 진정한 천자이십니다!”

황제가 그녀를 밀어내며 소리쳤다.

“몇 시진이냐?”

“폐하께 아룁니다.”

고승해가 장막 밖에서 고했다.

“진시 삼 각입니다.”

그의 말에 황제가 눈을 부릅뜨더니 벌컥 성을 냈다.

“이런 못난 놈을 보았나, 어찌 짐을 깨우지 않았더냐? 조회가 늦어지면 네가 책임질 수 있겠느냐?”

“폐하, 부디 노여움을 푸시옵소서.”

고승해가 쩔쩔매며 대꾸했다.

“그간 정사를 돌보느라 쉬지 못하셨습니다. 모처럼 휴가를 맞이하셨으니 소인이 깨우지 아니한 것입니다.”

황제가 이마를 쓸어내렸다. 오늘이 휴가인 것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백 귀비가 또다시 그를 휘감으며 애교를 부렸다.

“폐하, 신첩과 조금 더 주무시지요.”

황제가 다시 그녀를 밀어내며 고개를 저었다.

“짐은 할 일이 있으니 일어나겠소.”

그의 말에 고승해는 곧장 밖을 바라보며 손짓했다. 폐하께서 기침하셨으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시중을 들라는 의미였다.

황제는 세안을 한 뒤, 뒷전에서 아침 식사를 했다. 상을 가득 채울 만큼 많은 음식 앞에서도 입맛이 없었다. 몇 젓가락 들고 식사를 마친 그는 안쪽 방에서 책을 읽었다. 영문 모를 불안함이 자꾸만 그를 엄습했다.

방 안에 향을 피우고 푹신한 의자에 몸을 기대니 조금 몽롱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금세 잠이 들었다. 이번에는 아주 깊은 잠이었다.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고승해가 점심 식사를 위해 그를 깨우는 소리가 들렸다. 배가 고프지 않았던 그는 손을 흔들며 무어라 대꾸했다. 고승해가 곧장 물러나고, 다시 적막이 방 안을 감쌌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의 귓가에 희미한 전고 소리가 닿았다. 쿵쿵거리는 소리가 그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는 홀로 어두운 밤길을 내달리는 것 같았지만, 어디에서도 빛을 찾을 수 없었다.

북소리는 점점 커져 온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그는 허둥지둥하다 그만 발을 헛디뎌 까마득히 깊은 못에 빠지고 말았다.

소리를 지르며 일어난 그는땀을 닦을 겨를도 없이 분주하게 다가오는 발소리를 들어야 했다. 심장이 벌렁거린 까닭에 곧장 몸을 일으켜 앉았다. 황제 앞에 다가온 고승해가 어쩔 줄 몰라 하며 고했다.

“폐하, 급보입니다. 백 장군과 초왕이 전투를 벌인다고 하옵니다!”

* * *

초왕비의 운구 행렬이 동문을 나섰을 때도, 거리에 서 있던 초왕의 얼굴엔 어떠한 표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지막 대열이 사라질 때까지 지켜본 그는 고삐를 당겨 말을 돌려세우고 빠르게 북문으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난강을 건너 북쪽에 다다랐다. 일이 잘 풀린다면 그의 선발대가 이미 난강 최북단에 있는 소만진小滿鎭을 점령했을 테고, 병사들이 순조롭게 북진할 기반이 잡히리라.

말을 타고 가는 길은 수로가 아닌 산길을 택했다. 한통은 마음이 놓이지 않아 도중에 초왕을 맞이할 사람을 보냈고, 오시가 되자 마침내 초왕이 군영에 도착했다.

묵용감은 고삐를 넘기고 성큼성큼 수장의 막사로 향했다.

“상황은 어떠하냐? 점령하였느냐?”

“그렇게 작은 마을을 점령하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지요.”

한통이 웃으며 말했다.

“백장간은 우리가 먼 길을 돌아갈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한 듯합니다. 보잘것없는 마을을 공격하니 그야말로 무방비 상태였지요. 철기 부대는 육전陸戰에 뛰어나니 저희 기병들과 크게 다를 것 없습니다.”

그가 모래 지도 앞으로 다가가 한곳을 가리켰다.

“왕야의 말씀대로 선발대를 보내 소만진을 점령한 뒤엔 서쪽으로 방향을 틀겠습니다. 적들의 우리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도록 병사들을 배치했다가, 다시 북쪽으로 향하지요. 그리고 방비가 허술한 틈을 타 요충지를 공격할 예정입니다.”

묵용감은 자리에 앉아 모래 지도를 바라보았다.

“방심하지 말거라. 백장간이 군신으로 봉해졌다면 분명 특출난 점이 있기 때문이다. 당장 그자를 만날 일은 없을 테지만, 혹 만일의 사태가 발생해 백장간을 마주치게 되거든 그를 생포하라고 명하거라.”

한통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왕야, 도적을 잡으려면 두목부터 잡아야 하지 않습니까? 부하들은 수장이 죽으면 더는 버틸 수 없습니다. 왕야의 명성에 겁을 먹고 오줌을 쌀 테니, 전투도 치르지 않고 이길지도 모릅니다.”

묵용감이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백씨 집안 사람이다.”

한통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왕야, 전장에서 어찌 친분을 따질 수 있단 말입니까! 그자는 황제의 전원장군입니다. 우리가 치지 않으면 그자가 우리를…….”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누군가 급히 막사 안으로 들어와 무릎을 꿇었다.

“왕야, 백장간의 병력이 우리 쪽 함선 여섯 척을 불태웠다고 합니다.”

“이것 보십시오. 제가 뭐라 하였습니까?”

한통은 자신의 말이 딱 맞아떨어졌다는 듯 두 손을 펼쳐 보였다.

“벌써 여섯 척이나 불태웠다니! 지금 한 짓은 아닐 겁니다.”

그가 소식을 전한 졸병에게 물었다.

“언제 불탔단 말이냐?”

“동이 틀 때라고 합니다.”

묵용감이 간만에 웃음을 보였다.

“때를 참 잘 잡는구나.”

그러나 그 웃음엔 금방이라도 폐부를 찌를 듯 차디찬 기운이 서려 있었다. 무릎을 꿇고 있던 졸병은 괜스레 몸이 떨렸다.

한통이 손을 내저어 졸병을 내보냈다.

“우리 쪽이 움직일 걸 알고 백장간이 반격을 한 게 아니란 말이지요? 설마 내부에 사람을 심어 놓아 계획이 들통 난 것일까요? 어찌 이리 정확하게 시간을 맞출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는 저들의 마을을 공격하고, 저들은 우리의 배를 불태웠습니다.”

관저에 직접 찾아와 조문했으니 오늘이 발인이라는 건 그쪽도 알고 있을 터였다. 이보다 더 적절한 때는 없다고 생각했을 터.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마침내 호적수를, 그것도 백씨 성을 가진 상대가 나타났으니……. 초왕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처남에게 약간의 흥미를 품었다.

“내 예상대로구나.”

그때, 태자가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역시, 묵용한이 백장간을 위수로 보낸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우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해도 저들이 치러 왔을 테지. 차라리 잘되었구나. 누가 먼저랄 게 없이 양쪽 다 기선 제압에 실패했으니, 아주 재미있는 싸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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