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433)화 (432/1,192)

제433화

사앵앵이 그의 얼굴에 삿대질을 하며 말을 이었다.

“말해 봐요, 갈 거예요, 안 갈 거예요?”

“난 왕야께서 임명한 장군입니다. 전쟁을 치른다면 복직을 해야지요.”

“됐네요. 왕야께서 임명하시기도 했지만 직접 파면하시지 않았습니까? 안 그랬음 당신이 여기 왜 와 있겠어요? 복직은 꿈 깨세요. 다음 생이라면 모를까, 이번 생엔 나랑 열심히 장사를 해야 한다고요.”

말싸움으로 그녀를 이길 수 없었던 사장풍은 발걸음을 돌려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사장풍이 멀어진 후, 사앵앵은 목소리를 깔고 남제화를 책망했다.

“좀 더 빨리 받을 수 없었어요? 심장이 다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고요.”

남제화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왜 구해 줬냐고 책망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지금은 늦게 받았다고 원망하는 겁니까? 이리 소란을 피우는 까닭이 뭡니까?”

사앵앵이 눈을 희번덕거리며 답했다.

“그쪽이 없었더라면 제가 어떻게 뛰어내렸겠어요?”

* * *

어느새 날이 저물고 막사마다 등불을 켜기 시작했다. 창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불빛이 밤을 밝혔다.

관웅은 물소 가죽으로 만들어진 수장의 막사에 들어가 인사를 올렸다.

“장군,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언제 공격할까요?”

백장간은 작게 난 창 앞에 서서 끝없는 어둠을 마주하고 있었다. 밤하늘보다 짙은 슬픔에 잠긴 얼굴이었다. 그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내일은 여동생의 발인이 있는 날이다. 동이 트거든 전고를 울리거라. 여동생이 가는 길을 직접 배웅할 것이다!”

관웅은 명을 받들고 발걸음을 돌렸다. 그는 바로 나가지 못하고 한마디 내뱉었다.

“장군, 이승을 떠난 이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만 슬픔과 괴로움을 떨쳐내십시오.”

백장간은 손을 내저었다. 끝없는 슬픔이 가슴에 차올랐지만 곧 증오가 슬픔을 집어삼켰다. 그녀를 초왕에게 보낸 그의 아버지가, 그녀를 지켜주지 못한 초왕이 끝없이 원망스러웠다.

애처가라는 말은 허울에 불과했을지도 몰랐다. 초왕과 자신의 아버지는 원수지간이었다. 약혼녀도 돌아왔으니 그녀가 필요 없어졌을 테고, 그래서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겠지.

그의 한숨이 끊이지 않았다. 열일곱이 된 그녀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성숙한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그가 떠날 때만 해도 아이였지만, 이젠 얼굴도 활짝 피었을 테니 분명 그녀의 어머니보다 훨씬 어여뻤을 테지.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그려볼수록, 마음이 저려 왔다.

유모가 떠난 후, 그녀가 이런 말을 한 적 있었다. 이제 자신에게 잘해 주는 유일한 사람은 그뿐이라고. 사실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에게 한 번도 말해 준 적은 없었지만, 그에게 그녀는 따뜻하고 찬란한 햇살이었다. 그녀가 있었기에 그는 어두운 날들 속에서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다.

그는 적자도 아니었고 관심받는 자식도 아니었다. 부친은 늘 정권을 다투느라 조정밖에 몰랐고 모친은 아무런 힘도 없었다.

모친은 그의 성공만 바라며 늘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출세해야 한다, 과거에 붙어 관직에 올라야 한다, 남들보다 더 뛰어나야 한다…….

그의 여동생은 차갑고 이기적이었다. 늘 자신밖에 몰랐고 다른 이들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거만하게 굴었다.

그 해, 그는 열두 살 소년이었다. 한창 노는 게 더 좋을 때라 학업을 소홀히 했고, 서책을 외우지 못해 스승님에게 혼이 났다. 첫째 부인은 그 기회를 놓칠세라 사당 안에서 무릎을 꿇고 밤을 보내라는 벌을 내렸다.

엄동설한의 늦은 밤이었지만 첫째 부인은 방석 하나 주지 않고 차디찬 땅바닥에 무릎을 꿇렸다. 널따란 사당에 높인 높은 단상에는 조상들의 위패가 가득했다. 어린 소년에게는 음산한 광경이었다. 그때만 해도 담이 작고 겁이 많았던 그는 고개도 들지 못하고 덜덜 떨었다. 그는 이 어둠 속에서 누군가 자신을 구하러 와 주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누가 그를 구해 줄 수 있을까. 친모는 감히 그를 도와줄 수 없었고, 여동생은 그가 창피했는지 그림자도 비추지 않았다. 늦은 시간까지 접대를 하느라 술에 취한 채 돌아온 부친은 그가 벌을 받고 있다는 소식에도 묵묵부답이었다.

추운 날씨에 굶주림까지 덮쳐오자, 그는 버티지 못하고 옆으로 쓰러졌다. 차디찬 바닥에서 절망감이 스며들었다. 냉랭하고 삭막한 집안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바람은 문틈을 비집고 들어오며 매섭게 불어 닥쳤고, 휙휙 섬뜩한 소리를 내었다.

홀로 사당에 있던 밤을 그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때 어디선가 작게 철걱 하는 소리가 났다. 그녀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

“큰오빠.”

그에게는 천상의 소리와 다름없었다. 저택에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다섯째 여동생이었다. 평소에는 그도 관심을 주지 않았건만, 그녀는 그를 걱정해 찾아와 주었다.

고양이처럼 잽싸게 들어온 그녀가 품에서 꺼낸 찐빵을 하나 건넸다.

“큰오빠, 이거 먹어요. 꼭 안고 가져와서 아직 따뜻해요.”

쓰러져 있던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꽁꽁 언 손으로 찐빵을 건네받았다. 그는 고맙다고 짧게 대꾸한 뒤, 몸을 옆으로 틀고 찐빵을 입에 넣었다. 당시에는 조금 부끄러웠다. 서자이긴 해도 장자인 만큼 어느 정도는 체면이 있건만, 하필 그녀에게 도움을 받다니.

그가 찐빵을 다 먹으니 그녀는 요술을 부리듯 고기만두도 꺼냈다. 그의 앞에 조심스레 들이미는 손길은 마치 보물이라도 건네는 듯했다.

“하나 더 먹어요.”

그는 조금 불만스러운 기색으로 물었다.

“왜 만두부터 주지 않고?”

그녀가 또랑또랑하게 말했다.

“고기만두부터 먹으면 찐빵을 안 먹을까 봐서요. 유모가 그랬어요. 언니랑 오빠들은 좋은 것만 먹어서 맛이 없는 건 잘 안 먹는다고요. 만두부터 먹었으면 찐빵은 안 먹었을걸요? 그렇지만 뭐라도 많이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플 테고, 배가 고프면 견디기 힘들 거예요. 저도 겪어 봐서 잘 알아요.”

그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네 살밖에 안 된 아이가 이런 말을 할 줄이야.

“맛있죠?”

그녀는 만두를 먹는 그를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가 반을 갈라 그녀에게 건넸다.

“너도 먹어.”

그녀가 얼른 손을 들어 막았다.

“전 먹었어요. 배고프잖아요. 오빠가 먹어요.”

그가 물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유모가 걱정하잖아?”

그녀는 눈이 안 보일 만큼 활짝 웃더니 기세등등한 말투로 말했다.

“몰래 빠져나와서 유모는 몰라요.”

“어서 들어가. 밤이라 날이 추워서 몸이 얼지도 몰라.”

옅게 웃은 그녀가 품에서 또 무엇인가를 꺼냈다.

“유모가 만든 과일 껍질 사탕이에요. 먹어 봐요. 달콤하고 시큼한 게 엄청 맛있어요.”

그는 간식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더구나 처음 들어 본 과일 껍질 사탕은 더더욱 내키지 않았다. 그가 사탕을 되돌려주며 말했다.

“아껴 두었다가 나중에 먹어. 나는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해.”

하지만 그녀는 헤헤 웃으며 그의 입에 사탕을 쏙 넣어 주었다. 그리곤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응을 지켜보았다. 그때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었을까? 당황한 그가 얼굴을 붉히며 멍하니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다른 형제들과 함께 규율을 배우며 자랐다. 언행은 늘 점잖아야 했고, 타인과의 신체 접촉 등은 제한된 채 살아왔다. 그러나 그녀는 손가락을 그의 입에 넣어 놓고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히죽 웃으며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맛있어요?”

그는 몇 번 씹고는 얼떨떨하게 말했다.

“맛있어.”

그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그녀가 남은 사탕을 쥐여 주었다. 이윽고 기이하게 생긴 손화로를 꺼내 들었다.

“누가 버렸길래 주워온 거예요. 유모가 아직 쓸 수 있다고 했어요. 두고 갈 테니까 이걸로 손 좀 녹여요. 이제 갈게요. 유모가 깨면 걱정할 거예요.”

그는 얼이 빠져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가 네 살이나 더 어리다는 게 믿기지 않는 순간이었다. 그녀가 문 앞에 다다랐을 때, 그가 조용히 말을 건넸다.

“날이 어두우니 조심히 가. 넘어지지 말고.”

문 앞에 선 그녀가 꽃 떨기처럼 환하게 웃었다.

“걱정 말아요. 저는 밤길도 잘 다니거든요.”

삐걱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더니 자그마한 몸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지독하게 추웠던 그 겨울밤이, 그에게는 가장 따뜻한 밤으로 뒤바뀌었다. 그녀는 그에게 따스함과 밝은 빛을 선물했고, 그의 마음에 창 하나를 새겨 주었다.

그 후 긴긴 시간이 흘렀지만 그는 여전히 나약한 장자였다. 하지만 더는 불평하지 않고, 불공평한 운명도 탓하지 않았다. 그는 장차 이루고 싶은 계획을 하나둘 세우기 시작했다. 그리곤 그녀가 하루하루 커 가는 모습을 보며 집을 떠나겠다는 결심을 다졌다. 그녀를 위해, 더 나은 사람이 되어 돌아오고 싶었다.

* * *

같은 날 밤, 수성의 하늘에는 구름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꼭 달에 희끗희끗한 털이 자란 듯, 구름이 스친 달은 탁한 빛을 뿜어냈다.

그녀를 지키는 마지막 날이었다. 내일 아침이면 발인을 하겠지만, 그는 갈 수 없었다. 그러니 오늘 밤, 그녀와 함께 있기로 마음먹었다. 담아둔 말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결국 입 밖에 나오는 말은 한마디뿐이었다.

“천범, 조금만 기다려 주오.”

앞뜰 빈전에서는 도사들이 그녀와 세자의 넋을 달래기 위해 경문을 외우고 있었지만, 어쩐지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웅얼거림 같았다. 갑작스레, 그는 이 모든 일들이 자신과 상관없는 일처럼 다가왔다. 그녀의 관도 텅 비어 있지 않은가.

그를 둘러싼 이 상황이 그저 터무니없는 꿈만 같았다. 그래, 그는 지금 꿈속에 있는 것이다. 깨어나면 사랑스러운 아내가 웃는 모습을 볼 수 있을 텐데.

괴로움에 몸부림치던 그는 결국 방을 나왔다. 멀지 않은 곳에 누군가 홀로 서 있었다. 그가 잊은 지 오래인 사람이었다. 그녀를 힐끔 바라본 그는 무관심한 표정으로 몸을 돌려 복도로 향했다.

황보주아가 그에게 몇 발짝 다가왔다.

“셋째 오라버니!”

검 한 자루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호위무사 영구가 검에서 나는 소리보다 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왕야의 명령 없이는 누구도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오라버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황보주아가 큰소리로 외쳤지만, 묵용감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느릿느릿 앞으로 향할 뿐이었다.

쓸쓸한 그의 뒷모습을 마주한 황보주아의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오라버니, 제가 잘못했습니다. 왕비께 그렇게 화를 내선 안 되었는데, 오라버니, 부디 바로잡을 기회를 주시어요…….”

묵용감은 그녀의 흐느낌을 뒤로하고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영구는 미간을 한번 찌푸리고는 빠르게 그를 따라갔다.

황보주아는 소리 없이 흐느껴 울었다. 커다란 소매로 얼굴을 가린 채 통곡하는데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그녀가 기쁜 마음에 고개를 들었다.

“셋째 오라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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