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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432)화 (431/1,192)

제432화

관웅은 더는 타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를 꽉 깨물었다.

“알겠습니다. 장군께서 결정을 내리셨으니 말장은 목숨을 바쳐 장군을 따르겠습니다.”

그와 백장간은 생사를 같이할 만큼 정이 깊은 사이였다. 더는 타이를 방법이 없으니 그를 따르는 수밖에.

백장간은 관웅의 어깨를 토닥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려 보였다. 생사를 함께한 이들은 눈빛만으로도 모든 감정을 전하곤 했다.

“우리가 이곳 철기 부대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몇몇 병사들은 복종하지 않더군. 남쪽을 친다는 말에 별다른 기색은 보이지 않았지만, 밤사이 도성으로 서신을 보낼지도 모른다. 그런 자가 있다면 본보기로 삼아 가혹한 처벌을 내리겠다.”

“알겠습니다.”

관웅이 다부지게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사전에 소문을 퍼뜨리는 일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또한 수영에 능하고 민첩한 병사들을 모아 소수 정예 부대를 만들거라. 그들에게 선봉을 맡기겠다!”

백장간이 냉소를 흘리며 덧붙였다.

“그간 자신들의 수군이 뛰어나다며 허풍을 떨지 않았느냐. 어디, 뜨거운 맛을 보고도 허풍을 떨 수 있는지 지켜봐야겠구나.”

“좋은 생각이십니다.”

관웅이 명을 받잡으며 말했다.

“그렇게 하면 그쪽에서 맹렬히 쫓으려 하겠군요. 육지에만 도착하면 우리가 위세를 떨칠 것입니다.”

* * *

사흘 후에야 초왕이 문밖으로 나섰다. 영구가 그를 보며 적잖이 놀라고 말았다. 안색이 창백하게 질린 데다 머리카락도 잔뜩 헝클어져 있었다. 무엇보다 양쪽 귀밑머리가 하얗게 세어 버렸다. 젊은 얼굴에 난데없이 흰 머리칼이 보이니 말로 형용할 수 없이 이질적이었다.

마침 식사를 가져오던 기홍이 그 모습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그녀는 하마터면 쟁반을 떨어뜨릴 뻔했다.

“와, 왕야…….”

묵용감의 반응은 담담했다.

“옆방에 차리거라.”

기홍은 얼른 대답하고는 서둘러 옆방으로 향했다.

속도는 느렸지만, 묵용감은 많은 양의 식사를 들었다. 모든 반찬을 거의 다 비울 정도였으니, 그간 비워 두었던 배를 한 번에 채우려는 것 같았다.

다들 그의 모습에 적잖이 놀랐다. 며칠 사이에 머리가 하얗게 세다니……. 소문으로만 듣던 일을 목격하니 하인들이 충격에 빠지는 것도 당연했다.

사흘 내내 잠도 자지 않고 음식도 걸렀으니 몸이 더는 버티지 못한 게 아니겠는가. 위중청이 용기를 내어 맥을 짚어 보겠다고 나섰다. 묵용감은 의외로 순순하게 팔을 내밀었다. 두 손가락을 펼쳐 맥을 짚은 위중청은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여전히 울기가 가득했지만, 그의 예상보다 나쁜 상태는 아니었다.

나흘째 되는 날, 그는 여전히 백천범과 세자의 관 옆에서 지전을 태웠다. 다만 끼니는 제때 챙겨 먹었고, 얼추 시간을 보낸 뒤엔 서재에서 한통을 비롯한 무관들과 의논을 하기도 했다.

“왕야.”

한통이 가장 최근에 도착한 소식을 전했다.

“백장간이 위수 군영을 떠나 행방이 묘연하다고 합니다.”

묵용감이 낮은 음성을 내뱉었다.

“가서 찾거라.”

흠칫 놀란 가동은 그날 태자가 의심했던 자에 대해 이야기했다. 묵용감은 한동안 침묵에 잠겨 있더니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담도 크구나. 감히 내 관저에 홀로 발을 들이다니.”

한통이 깜짝 놀라 물었다.

“그 만원청이라는 자가 백장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뒤를 밟을 사람을 보내…….”

“여기까지 온 이상, 돌아가는 일도 만반의 준비를 마쳤을 것이다.”

묵용감이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오늘 수군을 난강으로 이동시키고 오영五營의 병력을 산으로 보내거라. 왕비의 발인을 하는 날, 전쟁을 시작한다.”

그날, 그는 정식으로 복수의 칼을 휘둘러 그의 행복을 앗아간 모든 자들을 처단하리라.

천범, 부디 천천히 가시오. 이 천하만 맡기고 나면 그대를 찾아갈 테니.

* * *

소식을 들었을 때, 사장풍은 밤사이 내린 우박에 부서진 기와를 손보느라 지붕 위에 있었다. 초왕비와 세자가 사고를 당했다는 말을 들은 그는 비틀거리다 떨어지고 말았다.

사앵앵도 충격을 받긴 마찬가지였다. 검은 그림자가 위에서 떨어지는 광경에 그녀는 본능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때, 재빨리 달려온 누군가가 그녀를 살짝 밀어내고는 사장풍을 받아냈다.

소식을 전하던 역관은 멍한 얼굴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물론 충격적인 소식이지만 그렇다고 지붕 위에서 굴러떨어질 것까지야…….

사장풍을 받아낸 사람은 남제화였다. 그가 아니라면 누가 이렇게 허공을 누빌 수 있을까. 사장풍을 받아든 그는 사앵앵에게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제가 또 한 번 구해 드렸습니다.”

사앵앵은 두 사내가 껴안고 있는 모습을 기이한 광경처럼 바라보았다. 잠시만, 이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그녀는 정신을 잃은 사장풍을 뒤로하고 역관을 붙들었다.

“방금 한 말이 사실입니까? 정말 초왕비와 세자 아기씨가 사고를 당하셨다고요?”

“물론 참말이지요.”

역관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이런 얘기를 어찌 함부로 지어낼 수 있겠습니까?”

사앵앵은 역관을 꽉 붙잡은 채 매섭게 물었다.

“누가 그랬답니까?”

역관은 그녀의 사나운 어조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저를 잡아서 무엇 한답니까! 전 그저 소식을 전하러 왔습니다. 어서 놓으십시오. 천엽성에도 서신을 전하러 가야 합니다.”

사앵앵은 머뭇거리다 손을 놓았다.

역관이 옷깃을 가다듬고 길을 떠나려는데 또다시 누군가가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힘이 어찌나 센지, 이번엔 숨이 다 막힐 지경이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지붕에서 떨어진 그 사내였다. 어느새 정신을 차린 그가 흉악한 표정으로 이를 악물고 있었다. 그가 한 자 한 자 힘주어 내뱉었다.

“누가 한 짓인지 얘기하시오.”

역관이 말을 더듬었다.

“…저, 저는 아닙니다…….”

사앵앵이 불쑥 끼어들었다.

“당연히 아니겠지요. 대체 누가 초왕비와 세자 아기씨를 해한 것입니까? 어서 말해 주세요.”

“제,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그, 그저 초왕비와 세자 아기씨께서 함께 사고를 당하셨다는 것밖에는 모릅니다. 누, 누가 그리하였는지는 모, 못…….”

그의 목이 점점 조여 왔다. 그는 본능적으로 발끝을 세웠고 말을 잇지 못했다.

남제화가 서둘러 사장풍을 말렸다.

“더 힘을 주었다간 죽을 겁니다. 놓으십시오. 아직 말도 다 끝내지 못했잖습니까.”

그제야 사장풍은 역관을 놓아주었다. 역관은 그대로 주저앉으려 했지만, 남제화가 서둘러 그를 붙잡았다.

“어서 말해 보시오.”

사실 알고 있어도 말할 수 없는 얘기였다. 어디까지나 군사 기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경험에 빗대어 보건대 이제는 기밀이 아닐 터였다. 소식을 직접 전하다 보면 시간이 지체되기 마련이니, 지금쯤이면 전쟁이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누가 그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초왕께서 북을 공격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 말은 북쪽과 관련이 있다는 뜻이겠지요!”

사장풍이 매섭게 욕을 내뱉었다.

“죽일 황제 같으니!”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역관은 남제화에게 예를 갖추고 서둘러 길을 나섰다. 또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니, 최대한 빨리 뜨는 게 상책이었다.

사앵앵은 입술을 깨물고 사장풍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사장풍은 보자기에 짐을 싸고 있었다. 사앵앵은 보자기 위에 그대로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뭐 하는 거예요?”

사장풍은 고개도 들지 않고 답했다.

“돌아갈 겁니다!”

“돌아가서 뭐 하려고요? 원한이라도 갚아 주려고요?”

사앵앵이 그가 들고 있던 옷을 억지로 빼앗았다.

“부군이 직접 복수해 준다는데 당신이 가서 뭐 하려고요. 기어이 왕야 눈에 띄려고요? 이 마당에 당신을 보면 왕야께선 분명 죽이려 드실 거라고요.”

“날 죽인다고요?”

사장풍이 냉소를 머금었다.

“내가 죽일 겁니다. 잘 돌봐 주겠다고, 잘 지켜주겠다고 맹세한 자입니다. 이게 잘 지켜 준 결과입니까? 위세를 부리며 남을 괴롭히는 것 외에 그자가 할 수 있는 게 대체 뭐란 말입니까? 내가 먼저 원한을 갚고 그자를 처단할 겁니다!”

사앵앵은 코웃음을 치며 그가 집은 옷을 또다시 뺏어 들었다.

“능력도 좋으시네요. 초왕야한텐 병력이 있으니 북을 공격할 수 있겠죠. 한데 당신은요. 당신은 뭘 할 수 있는데요!”

“임안성에 잠입해 망할 황제를 죽여 원한을 갚을 거란 말입니다!”

사장풍은 결국 보자기를 포기했는지 문을 향해 다가갔다.

“그래도 날 막을 순 없습니다. 짐을 가져가지 않더라도 반드시 떠나겠습니다.”

“멈춰!”

사앵앵이 그대로 창틀 위에 기어 올라갔다.

“떠날 수 있으면 떠나요. 한 발이라도 떼면 나는 여기서 뛰어내릴 테니까. 가서 왕비의 복수를 끝낸 다음엔 와서 내 시신을 거둬 줘요.”

괴로운 와중에 그녀의 협박까지 더해지니 사장풍은 밀려오는 짜증을 느꼈다. 그가 괴로움에 떨며 사앵앵을 노려보았다.

“뛰어내릴 거면 뛰어내리십시오. 난 그런 걸로 협박을 당할 사람이 아니니까!”

“네. 정말 잘나셨네요!”

이를 악문 사앵앵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내렸다.

순간, 사장풍은 심장이 멎는 기분이었다. 곧장 창문으로 뛰어 올라간 그가 큰소리로 외쳤다.

“앵앵!”

창문 밑에선 남제화가 사앵앵을 안고 있었다. 그가 사장풍을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괜찮습니다. 제가 받았습니다.”

사장풍은 그대로 뛰어내렸다. 안정적으로 착지한 그는 북받치는 화를 꾹꾹 누르며 다가갔다. 그녀는 기절한 척 눈을 질끈 감은 채 속눈썹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사장풍이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무탈한데 무엇 하러 그리 안겨 있습니까?”

사앵앵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남제화의 품에서 내려오더니 매섭게 그를 노려보았다.

“누가 받아 달랬어요?”

좋은 일을 하고도 원망을 들은 꼴이었다. 남제화는 어쩔 도리가 없다는 듯 웃으며 두 손을 펼쳤다.

“그러게요. 왜 저는 죽어가는 사람을 그냥 두지 못할까요?”

사장풍은 급기야 버럭 화를 냈다.

“이봐요, 사씨 아가씨. 제발 이치 좀 따지며 살 순 없습니까? 내가 그쪽한테 팔려 온 것도 아닌데 당신이 왜 내 행동을 억압합니까?”

사앵앵은 손을 허리에 얹고 괴팍한 부인처럼 말했다.

“이것 보세요. 우린 혼사를 올린 사이라고요. 당신은 내 사람이에요. 죽을지언정 버림받은 처지가 될 순 없어요.”

말을 마친 그녀가 얼른 덧붙였다.

“과부도요!”

“마지못해 내린 결정이라는 건 그쪽도 잘 알고…….”

“그런 거 난 몰라요. 혼례도 치르고 절까지 올렸으니… 이렇게 안면 몰수하고 날 떠날 수는 없어요.”

“…….”

이 문제를 거론할 때마다 그는 말문이 막히곤 했다. 혼례를 치르고 맞절까지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일가친척들부터 시작해 마을 주민들, 친구들을 모두 불러 축하주까지 마셨으니 내뺄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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