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1화
그날 밤, 빈전이 세워졌다. 시신이 없으니 관에는 초왕비의 옷을 넣었다. 관 옆에 서 있던 묵용감은 하인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의 슬픔은 짙었지만, 흘러나오는 기운은 포악했다. 평소보다 흉흉한 기세에, 하인들은 그와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으려 들었다.
하인들이 세자의 관을 들고 오자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
“따로 둘 것 없다. 아직 어리니 어머니와 함께 있게 두거라.”
하는 수 없이 학평관이 세자의 관을 돌려보냈다. 세자의 옷은 왕비의 관 안에 넣어 두었다.
빈전은 조문객의 편의를 위해 앞뜰에 세워졌지만 관은 후원 곁채에 놓였다. 창문을 잠그고 발까지 꼼꼼히 친 곁채 한가운데에 관을 놓았고, 주변에는 하얀 초를 밝혀 두었다.
노란 불빛에 둘러싸인 관은 불빛의 움직임에 따라 기이하게 흔들려 보였다. 묵용감은 관 앞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지전을 한 장 한 장 화로에 던져 넣었다.
푸르스름한 불씨가 끊임없이 춤을 추었다. 검은 잿더미가 될 때까지, 커졌다 작아지기를 반복하며 노란 지전을 집어삼켰다.
영구는 무표정하게 서서 문밖을 지키고 있었다. 초왕은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다만 식사를 챙기는 기홍만은 출입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문 앞에서 조용히 시선을 주고받았다. 짙은 슬픔이 두 사람의 얼굴에 드리웠다. 기홍은 방을 나설 때도 똑같은 상을 가지고 나와야 했다. 마치 저도 죽겠다는 듯, 초왕은 밥을 한 술도 뜨지 않았다.
기홍이 식사를 가져다줄 때마다 한결같은 모습의 묵용감을 봐야 했다. 그는 변함없는 자세로,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묵묵히 지전을 태우는 그의 얼굴은 텅 비어 있었다. 지켜보는 기홍의 가슴이 시큰했다. 왕비와 세자가 이토록 허망하게 떠났으니, 초왕의 세상은 완전히 무너졌으리라.
다만 조금 의문스럽기도 했다. 왕비와 함께 지낸 후, 초왕은 감정을 곧잘 드러내었다. 왕비와 재회한 날도, 세자를 출산한 날에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던가. 그러나 막상 지금은 단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그는 우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가만히 앉아 넋을 놓고만 있었다.
이렇게 끼니를 거르다간 정말 사달이 날지도 몰랐다. 기홍은 결국 묵용감에게 다가가 조금이라도 들라고 타일렀지만, 묵용감의 정신은 지전을 태우는 데에만 쏠려 있었다. 지전을 태우는 것 외에는 그의 정신을 쏟아부을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그 후로 기홍은 아무 말도 건넬 수 없었고, 음식이 그대로 남은 쟁반을 가지고 나올 때마다 슬픔에 젖은 한숨을 내쉬었다.
처량하고 적막한 후원과 달리 앞뜰은 어느 때보다 소란스러웠다. 초왕비와 세자의 변고를 공공연히 알리진 않았지만, 소문이 퍼져나가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조문객이 끊임없이 앞뜰을 찾아왔다. 관원들부터 성안의 부호들, 명문대가 할 것 없이 앞다투어 조문을 하러 왔다.
개중 눈길을 끄는 이들은 오수진 주민들이었다. 집마다 대표로 한 명씩 찾아와 영전 앞에 향을 꽂았다. 다들 슬픔을 주체하지 못해 흐느꼈는데, 월향이 가장 서럽게 울고 있었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가슴을 움켜쥔 채 큰소리로 울부짖었다. 양보전이 몇 차례나 그녀를 일으키려 했지만, 무너져 버린 그녀는 도통 일어나지 못했다.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온 월규도 월향을 껴안고 눈물을 쏟았다. 두 사람은 백천범과 남다른 사이였다. 단순히 주인과 하인의 사이를 넘어, 진정한 자매의 정을 나누었다. 두 사람은 백천범이 어딜 가든 뒤를 따랐지만, 백천범은 영영 따라갈 수 없는 곳으로 가 버렸다. 그곳은 이곳과 이어지지 않는 세상이었다.
왕비와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거란 생각에 월향과 월규는 쉴 새 없이 울었다. 결국 목이 쉬어 꺽꺽거리기만 하는 두 사람의 통곡은 보는 이들의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장사는 학평관이 준비했지만 손님을 맞는 일은 태자가 나섰다. 새하얀 옷을 입은 태자는 관 대신 새하얀 끈으로 머리를 묶었다. 조금 수척해진 그는 슬픔에 잠긴 얼굴로 빈전 한쪽에 서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황태자의 신분인 그는 이런 일에 얼굴을 드러내선 안 됐다. 하지만 그는 거리낌 없이 조문객의 인사에 답례하며 자리를 지켰다. 지금은 황제도, 황태자도 아닌 묵용감의 형으로서 손님들에게 예를 다할 뿐이었다. 조문객들은 모두들 속으로 그를 칭찬했다.
그때 누군가 빈전 안으로 들어왔다. 조문 상황을 낭독하는 진행자는 조문객이 올 때마다 알려주었다.
“염도사鹽都史 이李 대인께서 조문을 오십니다.”
태자는 고개를 들고 질서 있게 들어오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앞에 있는 이는 염도사 이부락李富樂이었고, 그의 뒤를 누군가 따르고 있었다. 얼굴이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큰 슬픔에 잠겨 있다는 건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태자는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다들 슬픈 표정을 짓고 있긴 해도 진심으로 슬퍼하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그저 예의를 차리고 얼굴만 비추고 갈 따름이었다. 한데 저자는 어찌…….
태자는 그자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이부락이 향을 꽂자 뒤에 있던 이도 영전 앞으로 다가와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어찌나 깊게 고개를 박았는지 이마에 재가 묻어 있었다. 그자는 손을 들어 소매로 이마를 훑었다.
태자의 답례에 이부락은 몸 둘 바를 모르며 인사치레를 했다. 한눈에 봐도 황송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데도 그자는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고, 묵묵히 이부락을 따라 밖으로 향했다.
문밖으로 나간 그의 고개는 묶이기라도 한 듯 아래를 향해 있었다. 태자는 그에게서 익숙한 분위기를 알아차렸다. 오랜 시간 군에 있던 이들에게서 형성되는 분위기였다.
태자가 이소로에게 눈짓을 보냈다. 뒤를 밟아보라는 의미였다.
그 모습을 발견한 가동이 다가와 물었다.
“태자 전하, 저자에게 문제라도 있는 것입니까?”
태자가 조용히 말했다.
“이부락을 따라오긴 했지만, 너무 낯설구나. 이런 때일수록 경각심을 가져야지.”
가동이 목소리를 낮췄다.
“제가 붙잡아 오겠습니다.”
“되었다. 괜히 일을 크게 만들 것 없어.”
태자가 희미하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 같은 때는 더 신중해야 한다.”
가동은 태자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곧 전쟁을 치르게 될 테니 신중을 기해야 했다. 소문이라도 새어 나간다면 전쟁을 시작하기도 전에 상대에게 한 수를 내주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이 자리에는 너무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사람이 많으면 선한 자와 악한 자가 뒤섞이기 마련이었다. 이런 상황일수록 더 주위를 경계해야 했다.
이부락과 수상한 자는 함께 가마에 올라탔다. 보통 관원의 가마는 홀로 타는 게 일반적이다. 두 사람이 탈 수 없는 건 아니지만, 성인 남자 두 명이 타기엔 꽤나 비좁았다. 이소로는 의아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가마를 뒤쫓던 그는 두 사람이 조운漕雲 관청 입구에 내려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포착했다. 문을 지키던 보초병에게 얼마간의 돈을 쥐여 주니, 그자가 이부락의 일을 도와주는 조수 만원청萬原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소로는 태자에게 돌아와 본 것을 전했다. 다만 그는 만원청이라는 자가 관청으로 들어간 뒤 즉각 뒷문으로 빠져나가 두 사람과 함께 부두로 향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 * *
부두에 도착한 세 사람은 요패를 보여 준 뒤, 배에 올라타 난강을 건너 북으로 향했다. 밤이 된 후에야 북쪽 부두에 도착한 그들은 검은색 옷으로 갈아입고 짙은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닷새가 되던 날 새벽, 나룻배 한 척이 갈대숲 사이를 비집고 나타났다. 강기슭에는 이미 병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나룻배가 기슭에 오르자 병사들이 서둘러 달려왔다.
“장군, 돌아오셨군요.”
장군이라고 불린 이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는 곧장 말에 올라타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질주했다.
두 시진 뒤, 산골짜기 사이로 거대한 규모의 군영이 보였다. 찐빵처럼 둥그런 모양의 담황색 막사가 한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전망대를 지키던 보초병이 멀리 뛰어오는 말을 발견하고 외쳤다.
“장군께서 돌아오셨다! 장군께서 돌아오셨다!”
훈련을 하던 사병들은 일제히 동작을 멈추고 가지런히 대열을 맞춰 섰다. 그가 말 고삐를 당기자 말이 앞발을 들어 올리며 멈춰 섰다. 그가 병사들을 훑으며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준비되었는가?”
“예. 준비되었습니다!”
사병들이 이구동성으로 목청을 높였다.
“목숨을 바쳐 장군을 따르겠습니다!”
“좋다!”
그가 손을 흔들며 호기롭게 말했다.
“형제들이여, 통일의 때가 도래했다. 나와 함께 이 동월국을 통일하자!”
“동월국을 통일하자! 동월국을 통일하자!”
사병들의 우렁찬 함성은 하늘에 닿을 듯 쩌렁쩌렁했다.
그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고 가장 큰 막사로 들어섰다. 피풍과 장검을 수하에게 넘긴 뒤, 모래 지도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는 손에 쥔 자그마한 깃발을 한참 동안 뚫어지게 쳐다볼 뿐, 어디에도 꽂지 못했다.
정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아닌가. 아직도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얼떨떨하기만 했다. 아들을 낳고 부군의 사랑을 받으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더니……. 어찌 이리도 허무하게 가 버렸단 말인가?
그녀를 만나러 갈 기회만 엿보고 있었는데, 허망하게 떠나 버렸으니 다신 만나지 못하리라. 가여운 조카는 이 외숙부도 한번 만나 보지 못하고…….
부하들은 때가 아니라며 극구 반대했지만, 그는 고민할 겨를이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야만 했다. 그녀를 만나진 못해도, 적어도 영전에 향이라도 꽂아야 했다.
그는 빈전에서 초왕을 마주치리라고 예상했다. 초왕은 그의 매부이자 원수였다. 멀쩡하던 사람이 초왕에게 시집간 지 서너 해도 되지 않아 세상을 등졌는데, 이 원한을 어찌 흘려보내겠는가!
안타깝게도 초왕은 빈전에 나타나지 않았고 태자만이 자리를 지켰다. 그는 태자가 보낸 의심의 시선을 금세 알아차렸다. 심지어 미행이 붙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빠르게 적지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가 손에 쥐고 있던 작은 깃발을 수성 위에 힘껏 내리꽂았다. 그의 눈빛이 결연하게 빛났다. 원수와는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으니, 초왕이 죽거나 그가 죽어야 했다.
그때, 부장副將 관웅關雄이 급히 다가왔다.
“장군, 정말 결정을 내리신 것입니까?”
“그래. 결정했다.”
“폐하께서 아직 명을 내리지 않으셨는데, 이리 독단적으로…….”
장군 백장간이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끊었다.
“폐하께서 날 보내셨을 때부터 뜻이 명확하였다. 다만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시는 것이지. 더 지체되었다간 폐하께도 좋지 않을 것이다.”
“장군, 조금만 더 기다려보시지요. 어쨌든…….”
“장수가 먼 곳에서 군을 통솔하고 있으면 제때 군령을 받지 못할 때도 있는 법이다.”
백장간은 모래 지도 위의 수성을 내려다보았다.
“폐하께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시니, 본 장군이 대신 내려드리는 것이다. 큰일을 하는 사람은 꾸물거려선 안 된다.”
백장간의 표정은 절대 흔들리지 않을 듯 단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