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430)화 (429/1,192)

제430화

서재로 들어선 가동은 곧장 무릎을 꿇었다.

“왕야.”

그는 죗값을 치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묵용감은 아무 말 없이 가동을 바라보았다. 옆에 서 있던 영구도 침묵을 지켰다. 쥐 죽은 듯 고요한 탓에 가동은 방 안 전체가 자신의 심장 박동으로 가득 찬 느낌이었다.

서재에 들어섰을 때 훑어본 초왕의 얼굴이 선연했다. 그는 몹시도 수척해졌다. 눈가는 움푹 파였고, 눈동자에 평소보다 더 깊은 우물을 담고 있었다. 고요하게 자신을 응시하는 그 얼굴이, 평소보다 더 큰 두려움을 안겨 주었다.

한참 뒤, 묵용감이 입을 열었다.

“일어나거라.”

가동은 묵용감이 할 말을 알았기에, 자신이 본 것을 전부 고했다.

가동이 말을 마치자 묵용감이 망설이며 물었다.

“왕비와 세자가 절벽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직접 보았느냐?”

“먼 거리라 정확하게 본 것은 아닙니다. 다만 아주 날렵한 자였습니다. 우리 쪽 인원이 적었다면 쉽게 따돌렸을 겁니다. 어렴풋이 갓난아이가 칭얼거리는 소리도 들렸고, 무언가를 짊어지고 있는 사람도 보였는데 왕비 마마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자를 쫓다 보니 왕비 마마와 세자 아기씨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리 힘들게 납치해 놓고 어찌 절벽에서 뛰어내렸단 말이냐?”

“…….”

가동이 잠시 고민하다 답을 내놓았다.

“소인이 너무 빨리 쫓아갔던 것 같습니다. 병사들에게 쫓기며 포위망이 좁혀지니 자신이 대역죄를 저질렀다는 걸 깨닫고…….”

가동이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소인이 너무 급히 쫓았습니다. 그 때문입니다! 소인, 죽어 마땅하옵니다!”

가동의 말을 듣고 있던 영구가 입을 열었다.

“절벽에서 뛰어내린 사람은 한 명이라지만, 한 명이 꾸민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전서구를 죽였겠습니까? 상대는 우리와 아주 가까운 사이일 테지요. 성 밖 주둔지의 거리도 알고 있었고, 전서구를 죽일 사람을 배치해 소식을 전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가동이 인편으로도 전했으니 망정이지, 시간이 크게 지체되었을 뻔했습니다.”

묵용감이 질문을 던졌다.

“북쪽으로 가리라는 건 어찌 알았느냐?”

가동이 곧장 답했다.

“동쪽은 한 장군님의 군영이니 죽으러 가는 일이나 다름없지요. 남쪽은 수로이니 수군들에게 금방 적발될 겁니다. 서쪽은 지형이 험준하여 걷기 어려우니 추적을 당한다면 난처해지겠지요. 결국 남는 건 북쪽이었습니다. 강에서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니 상인들의 왕래도 잦고, 그만큼 도망치기가 용이할 겁니다.”

묵용감이 영구에게로 화살을 돌렸다.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소인도 가동과 같은 생각입니다.”

그래서 북쪽으로 갔겠다. 난강 북쪽? 아니면 북쪽 도성인 임안성?

한참 침묵에 잠겼던 묵용감이 다시 입을 뗐다.

“절벽 밑에서 주웠다던 것은? 가져오너라.”

뜻밖에도 영구가 잠시 머뭇거렸다.

“왕야…….”

지난 밤의 수색이 마냥 허탕은 아니었다. 세자의 호랑이 신발과 왕비가 늘 하고 다니던 머리꽂이를 찾은 터였다. 그러나 그 물건들을 보게 된다면 묵용감의 심정이 어떠할까. 누구도 물건을 보여 줄 생각을 하지 못했다.

“가져오너라.”

묵용감은 침착하게 말했지만, 목소리는 깊은 동굴에서 흘러나오는 듯했다.

영구가 마지못해 물건을 가지러 가자, 다시금 적막이 내려앉았다. 가동이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왕야, 소인 무리한 청이 하나 있습니다.”

“말하거라.”

“소인, 죽을죄를 지었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왕야께서 소인의 목숨을 거두시더라도 결코 억울하지 않을 겁니다. 다만, 녹하만큼은 용서해 주시고 제가 죽은 뒤에 재혼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묵용감은 한참이 지나서야 대꾸했다.

“그래. 약속하마.”

그제야 가동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왕야.”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구가 물건을 가져와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묵용감은 백천범의 머리꽂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정말 불길한 물건이 아닌가. 그녀가 처음 그의 곁을 떠났을 때는 황제의 손에 있더니, 이번에는…….

그가 손을 뻗어 머리꽂이를 손에 쥐었다. 이번에는 영원히 그의 곁을 떠났다…….

그의 손에 조금씩 힘이 들어갔다. 머리꽂이의 뾰족한 끝이 손바닥을 찔렀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묵용감의 손가락 사이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영구가 놀란 목소리를 내었다.

“왕야!”

묵용감은 이제 막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멍하니 손을 내려다보았다. 머리꽂이는 그의 손에서 잔뜩 구부러져 더는 원형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모습에 가동은 가슴을 저미는 아픔을 느꼈다.

“왕야, 위 의원을 불러 약을 발라 드리라고 하겠습니다.”

묵용감은 고개를 저으며 머리 꽂이와 호랑이 신발을 서랍에 넣었다.

“난 괜찮다.”

그때, 문 앞에서 학평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자 전하, 오셨습니까. 풍한이 드셨다면서요, 좀 나아지셨습니까?”

태자가 입을 가리고 기침을 한 뒤 대답했다.

“괜찮다. 초왕이 깨어났다고 하길래 잠시 보러 왔다.”

묵용감은 눈을 내리깔고 손바닥에 난 상처를 바라보았다. 그는 주먹을 세게 쥐어 상처를 가렸다. 어느새 서재에 들어선 태자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방금 깨어났다면서, 몸은 좀 나아졌느냐?”

“전 괜찮습니다.”

묵용감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대접이 소홀했습니다. 어서 앉으십시오, 형님.”

태자가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식구끼리 어찌 그리 예를 차리는 것이야. 조금 서 있는 건 아무렇지도 않다. 지금은 사람을 찾는 게 우선이지. 하지만…….”

태자에게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듣기 싫어할 거라는 거 잘 안다. 그래도 한마디 하마. 죽은 이는 되살릴 수 없으니, 부디 마음을 단단히 먹거라. 네가 결정해야 할 일들이 아주 많다. 가장 시급한 일은 왕비와 세자가 빨리 환생할 수 있도록 상을 치러 주는 일이 아니겠느냐. 두 사람을 납치한 자를 처단하는 건 그 후의 일이다.”

“형님께서는 누구의 소행인지 알고 계십니까?”

태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알았다면 곧장 잡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말머리를 돌렸다.

“의심되는 자가 없는 것도 아니지.”

그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묵용감을 응시했다.

“잘 알지 않느냐? 진즉 병력을 배치해 둔 그들 말이다. 우리를 칠 구실이 없으니 내내 속앓이를 했겠지. 그는 어진 군주가 되고 싶어 하는 데다 죄를 짓는 것도 원치 않으니 매번 졸책을 써 왔다. 우리가 공격을 개시하고 그에 맞서려는 것처럼 행동해야 백성들의 질책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 더욱이.”

태자의 말이 잠시 멈췄다가 이어졌다.

“왕비를 넘본 게 이번이 처음이더냐? 지난번은 거짓이었지만 이번에는 진짜였을 뿐이지.”

안색이 어두워진 묵용감이 찻잔에 손을 뻗었다. 손이 조금 떨리는 탓에 뚜껑이 찻잔에 부딪혀 맑은 소리를 냈다. 태자가 묵용감의 손을 응시했다.

“네가 묵용한과의 형제애를 잊지 못한다는 것 잘 안다. 하지만 네가 그를 생각해 준다고 해서, 그 또한 널 그리 생각하더냐? 셋째야, 더는 마음 약해지지 말거라.”

묵용감은 침묵으로 답했다. 태자가 조용히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물론 증거를 찾진 못했으니 확신할 수는 없지. 다만 그자가 아니라면 이렇게 큰일을 벌일 수 있는 이가 있겠느냐? 이렇게 하자꾸나. 비밀 조직에 있는 이들에게 수사를 맡기겠다.

부윤 관저까지 숨어들어 사람을 납치하려면 실력이 상당하겠지. 비밀 조직에 있는 이들은 강호 문파를 훤히 꿰고 있으니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실마리만 찾는다면 이 일의 배후도 금방 드러나지 않겠느냐…….”

“치겠습니다.”

찻잔을 내려놓은 묵용감이 불쑥 입을 열었다.

태자가 깜짝 놀라 물었다.

“지금 뭐라 하였느냐?”

“치겠습니다.”

묵용감의 손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고, 표정도 초연했다.

“조만간 전쟁을 치르겠습니다.”

“왕야!”

영구가 황급히 나섰다.

“전쟁은 아이들 장난이 아닙니다. 부디 숙고해 주시옵소서.”

태자가 바로 말을 뺏었다.

“그래. 내전을 치르는 일은 아이들 장난과는 다르지. 일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자가 아니라 우리가… 끌려다니는 신세가 되지 않겠느냐? 내가 보기에 이 일은 그리 급하지 않으니 좀 더 고민한 뒤에 결정하자꾸나.”

“천 명을 죽이는 한이 있어도 그 한 사람만큼은 절대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묵용감의 안색은 더없이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감히 내 사람을 건드렸으니, 그 정도 후환은 감당해야지요.”

선연한 살기에 태자는 가슴이 서늘해졌다.

“네가 군의 수장이니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조금 더 고민해 보는 게 좋겠구나.”

묵용감이 흉흉한 시선을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형님께서는 줄곧 북을 치고 싶어 하지 않으셨습니까? 어찌 생각이 바뀌신 것입니까?”

“전쟁은 홧김에 하는 일이 아니다.”

태자가 천천히 답했다.

“원래는 전쟁을 하고 싶었지. 다만 생각해 보니 네 말이 맞더구나. 어쨌든 우리 묵용씨의 천하인데 양쪽으로 나눠진 게 그리 대수라고. 결국에는 형제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지. 게다가 금릉도 준비를 마쳤으니 다음 달이면 거처를 옮겨야 하지 않더냐.

정말 그가 한 짓이라면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 애당초 내가 너희 가족을 휘말리게 한 것이니. 왕비와 세자의 복수를 위해서라면 네가 무슨 결정을 내리든 무조건 승낙할 것이다. 다만… 전쟁은 사소한 일이 아니니 재차 고민해 본 뒤에 결정하거라.”

“전 이미 결정을 내렸습니다.”

묵용감이 가동에게 분부했다.

“각 군영으로 병사를 보내 사령관을 집합시키거라. 본왕이 발표할 게 있다.”

명을 받은 가동이 밖으로 향했고, 영구는 작은 한숨만 내쉬었다. 태자는 엄지손가락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근심에 잠겨 있었다. 아무래도 조만간 전쟁이 날 듯했다…….

* * *

믿고 싶지 않았지만 절벽 위에서는 장난감이, 아래에서는 머리꽂이와 신발이 발견되었다. 초왕비와 세자가 절벽에서 떨어졌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시신을 찾지 못했으니, 하천에 떨어진 것이 틀림없었다. 살아 있을 가능성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학평관은 더 이상 장사를 미룰 수 없었다. 그의 일은 서둘러 초상을 치르고 왕비와 세자가 환생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일이었다.

기회를 엿보던 학평관이 조심스레 장사 이야기를 꺼냈다. 묵용감의 어두운 눈빛이 한참이나 그에게 머물렀다. 결국 묵용감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리하거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