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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429)화 (428/1,192)

제429화

모든 이들은 묵용감이 사흘이 지난 뒤에야 깨어날 거라고 생각했다. 놀랍게도 이튿날 아침이 되자 묵용감은 눈을 떴다. 마침 침대 옆을 지키고 있던 학평관은 눈을 뜬 그를 보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아이고, 왕야. 깨어나셨군요. 정말 놀라 죽는 줄 알았습니다. 물 좀 드시겠습니까? 소인이 어서 드실 걸 준비하라고…….”

묵용감은 몸을 일으켜 앉으려 했다. 학평관이 서둘러 그를 막았다.

“왕야, 아직은 쉬셔야 합니다. 누워 계십시오. 조금 전 위 의원이 왕야의 상태를 확인하고 자리를 비웠습니다. 소인이 얼른 불러오겠습니다.”

묵용감이 나직하게 말했다.

“필요 없다.”

그의 목소리는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멍한 얼굴로 침대에 앉아 있었지만 이내 몸을 일으켰다.

담담한 그의 모습이 오히려 학평관의 불안함을 부채질했다. 지금쯤 몹시 비통해하고 슬퍼해야 정상이었다. 한데 어찌 아무 일 없는 것처럼 행동한단 말인가…….

그가 고집스럽게 일어나려 하자 학평관은 별수 없이 그의 환복을 도왔다.

“왕야, 시장하시지요? 소인이 식사를 가져오라고 분부하겠습니다.”

묵용감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뻗어 도포를 걸쳤다. 발을 떼려는데 갑자기 현기증이 느껴졌다. 그가 몸을 휘청거리자 학평관이 서둘러 그를 붙잡았다. 묵용감은 다시 중심을 잡고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그가 여전히 갈라지는 목소리로 분부했다.

“영구와 가동을 불러오너라.”

학평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가동은 병이 나서 고열에 헛소리까지 하며 누워 있습니다. 우선 영구부터 불러오겠습니다.”

정신을 차린 후로 묵용감은 유독 말수가 줄어든 듯했다. 눈치만 보던 학평관이 슬그머니 밖으로 나갔다. 마침 밖에서 위중청을 마주치자, 학평관이 눈짓을 보냈다.

“왕야께서 깨어나셨으니 어서 가 보게.”

그 말에 위중청은 안도했다. 적어도 영구가 그의 목숨을 거둬갈 일은 없을 테니. 그가 활짝 웃어 보였다.

“왕야께서는 역시 복이 많은 분이십니다. 예상보다 일찍 깨어나셨군요.”

위중청이 서둘러 방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장막은 이미 침대 봉에 고정되어 있었고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누군가 서재 쪽으로 향하는 인기척이 났다.

위중청은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초왕이 아직 침대에 누워 있을 거라 생각했건만. 당장 서재에 갈 정도로 회복하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닌가.

그는 서둘러 묵용감의 뒤를 따랐다.

“왕야, 소관이 맥을 짚어 보겠습니다. 하루하고도 꼬박 하룻밤을 혼절한 상태로 계셨습니다. 상태를 조금 더 지켜보아야…….”

묵용감은 벽에 걸린 검을 집어 들었다. 그가 등을 돌린 채 대꾸했다.

“필요 없다.”

“왕야, 한 번만 짚어 보겠습니다. 울기가 오랜 시간 쌓이면…….”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날이 선 검이 뽑혔다. 날에 푸른빛이 감도는 명검이었다. 위중청은 방 안에 퍼지는 검의 스산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영구가 누굴 닮았나 했더니 자신의 주인과 똑 닮아 있었다. 위중청은 입을 꾹 다물고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린 뒤, 조용히 문을 나섰다.

겨우 처소에서 빠져나온 그는 얼이 쭉 빠져 있었다. 그간 의원 생활을 하며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초왕 같은 사람은 처음 보았다. 울기가 한데 쌓이면 기를 막으니 몸이 상하는 법이었다. 이처럼 빨리 회복할 수 없을 텐데, 대체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아침 식사를 들고 오던 기홍이 문 앞에 서 있는 위중청에게 물었다.

“위 의원님, 왕야께서 깨어나셨다면서요. 이런 음식은 드실 수 있습니까?”

위중청이 쟁반에 놓인 음식을 바라보더니 턱을 만지작거렸다.

“소 한 마리도 문제없을 듯합니다. 어서 들어가 보십시오.”

그는 기홍이 들어갈 수 있게 발을 올려 주었다.

기홍은 위중청이 농을 한다 생각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초왕이 깨어났다는 소식에 모든 하인들이 기뻐했다. 기홍은 특별히 초왕이 좋아하는 담백한 좁쌀 죽을 만들고 상쾌한 맛이 일품인 참외까지 준비했다. 정작 방 안에 들어서니 아무도 없기에, 기홍이 두리번거렸다. 문득 서재에서 인기척을 느낀 그녀가 가까이 다가서니, 그곳엔 묵용감이 책상에서 검을 닦고 있었다.

기홍도 위중청처럼 묵용감이 아직 누워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벌써 일어나 검을 닦고 있을 줄이야. 멍하니 서 있던 기홍이 서재 안으로 들어서며 물었다.

“왕야, 소인이 아침상을 차려 드려도 되겠습니까?”

묵용감은 고개도 들지 않고 짧게 대꾸했고, 계속 검을 닦았다.

기홍은 상을 차리며 슬쩍 초왕의 안색을 곁눈질했다. 어딘가 조금 이상한 느낌이었다.

* * *

영구는 정원에서 홀로 수련을 하고 있었다. 세 시진도 잠을 이루지 못했지만, 도저히 잠을 잘 상황이 아니었다. 때마침 학평관이 찾아와 초왕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는 땀도 닦지 않고 검을 든 채 초왕에게 향했다.

묵용감은 마침 식사를 끝낸 참이었다. 기홍이 조용히 그릇을 정리하고 있었다. 기홍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영구는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곧장 묵용감에게 다가섰다. 그가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위로 올리며 인사를 올렸다.

“왕야, 소인을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분부하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다들 묵용감의 상태를 보고 깜짝 놀랐지만, 영구만큼은 예외였다. 초왕은 응당 이래야 한다고 여기는 눈치였다.

묵용감이 조용히 물었다.

“알아보았느냐?”

“예. 소인이 샅샅이 살펴보았습니다. 가동의 판단이 맞았습니다.”

“네가 보기엔 어찌 된 일인 것 같더냐?”

영구가 기홍을 빤히 응시했다. 기홍은 서둘러 식기를 정리해 밖으로 나갔다. 문을 나서던 기홍은 속으로 작게 투덜거렸다. 그녀에게까지 감추려 하다니.

부엌에서는 녹하가 죽을 끓이고 있었다. 기홍이 들어서자마자 녹하가 질문을 던졌다.

“왕야께서 깨어나셨다면서. 상태는 좀 어떠셔? 식사는 하시고?”

기홍이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도 하셨고 상태도 괜찮으신 것 같아. 그것만 보면 평소랑 다를 바 없는데, 통 말씀이 없으시네.”

녹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이런 일을 겪고 버틸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 왕야와 왕비 마마께서는 누구보다 정이 깊으셨는데. 그리고 세자 아기씨도…….”

통통하고 새하얀 세자를 떠올리자 금세 녹하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기홍이 고개를 내저었다.

“왕야께서도 힘겹게 마음을 추스르고 계시잖아. 왕야 앞에서는 절대 울면 안 돼.”

“나도 알아.”

녹하가 코를 훌쩍였다.

“가동은 오늘 조금 나아졌어. 왕야께서 홧김에 가동의 목숨을 거두실까 봐 너무 겁나. 혼사를 치른 지 일 년도 되지 않았는데 과부가 될 순 없잖아. 그렇다고 왕야께 용서를 빌 면목도 없어.”

“사실 우리 모두 죄인이지. 눈앞에서 왕비 마마와 세자 아기씨가 납치되었으니.”

기홍의 긴 한숨이 이어졌다.

“왕비 마마와 세자 아기씨를 지키지 못했으니 벌을 받아 마땅해. 왕야께서 설령 목숨을 거두신다 해도 우리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

기홍이 뜨거운 김이 솟는 죽을 바라보며 말했다.

“넌 어서 가동 무사님 보살펴 드려. 이따가 죽 가져다줄게.”

녹하는 짧은 대답을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초왕이 깨어난 것은 좋은 일이었다. 다들 한시름 놓았지만,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하는 이도 있었다. 가동은 일급 호위무사인 데다, 그가 있는데도 눈앞에서 왕비와 세자가 납치되었으니 죄를 면하기는 어려울 터였다.

녹하는 초왕을 공경했고 충심 또한 컸다. 언제나 그의 결정을 존중하고 있었지만, 가동은 그녀의 지아비가 아닌가. 가동이 죽는다면 그녀 또한 목숨을 내놓고 죄를 함께하는 수밖에 없었다.

방으로 들어서니 가동은 여전히 정신이 혼미한 듯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호전되었다가 나빠지기를 반복하니, 초왕보다 상태가 좋지 않은 듯했다. 그녀가 손을 뻗어 가동의 이마를 짚었다. 다행히 열은 없었다.

그때, 가동이 눈을 떠 그녀를 바라보았다.

“부인.”

“응.”

녹하는 다정히 대답하며 이불을 여며 주었다.

“좀 나아졌어?”

“난 괜찮아.”

가동이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왕야는 어떠셔? 깨어나셨어?”

“응. 깨어나셔서 기홍이 아침 식사도 가져다드렸어. 상태도 괜찮으시고. 영구와 얘기를 나누시는 걸 보니 괜찮으신 것 같아.”

그녀의 말에 가동은 곧장 이불을 젖히고 몸을 일으켰다.

“왕야를 뵈어야겠어.”

녹하가 가동을 말렸다.

“몸이 다 낫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간다는 거야.”

가동이 잠시 침묵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왕야께서 날 찾진 않으셨어?”

녹하는 아무 말 없이 그의 어깨를 누를 뿐이었다.

“왕야께서 날 부르셨지?”

그가 목소리를 높이며 다시 물었다.

“놔 줘. 가 봐야 해.”

가동은 온몸에 힘이 다 빠진 상태였지만, 녹하를 상대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그가 묵묵히 문으로 다가서자, 녹하는 심장을 틀어쥐는 불안함을 느꼈다. 그녀가 한달음에 달려가 그의 등을 껴안았다.

“지금 갔다가 만에 하나…….”

가동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녹하의 손을 토닥였다.

“나도 알아.”

가동이 나직하게 말했다.

“왕비 마마와 세자 아기씨를 지키지 못했으니 죽어 마땅하지.”

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몸을 돌려 그윽한 눈으로 녹하를 바라보았다.

“녹하야, 내가 미안해…….”

“말하지 마.”

결국 울음을 터트린 녹하가 그를 힘껏 안았다.

“널 따라갈 거야. 왕야께서 벌로 네 목숨을 앗아가시겠다면, 함께 죗값을 치르면 돼. 우린 부부잖아. 너 혼자 가는 일은 없을 거야.”

가동 또한 마음이 무너지는 듯했다.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묻은 깊게 숨을 들이켠 가동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녹하야. 이번 생에 진 빚은 다음 생에 꼭 갚을게. 다음 생에도 난 널 내 처로 맞이할 거야.”

녹하가 그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목 놓아 울었다.

“약속 꼭 지켜.”

“물론이지.”

가동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놓아준 뒤, 옷소매로 눈물을 닦아 주었다.

“다음 생에 나 꼭 기다려야 된다.”

녹하가 울음을 그칠 줄 모르자 가동이 그녀를 달랬다.

“걱정하지 마. 지금 가더라도 다시 돌아올 거야. 왕야께서 바로 목숨을 거두지 않으실 테니까. 내 목숨을 앗아 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잖아.”

가동의 말은 사실이었다. 학평관을 보내 가동을 불렀으니, 확인할 게 있으리라. 초왕의 성격이라면 사건을 정확히 파악하기 전엔 가동을 죽일 리 없었다.

“어서 가 봐.”

녹하는 훌쩍이며 그의 옷매무시를 가다듬어 주었다. 신신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왕야께서 기분이 좋지 않으시니 항상 조심해야 해.”

“나도 알아.”

가동은 갑자기 그녀의 턱을 들고 힘껏 입을 맞췄다. 평소의 녹하였다면 밀쳐 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녀는 그의 목을 두 팔로 감싸며 어느 때보다 뜨겁게, 또 어느 때보다 슬픈 입맞춤을 나누었다.

입맞춤을 나눈 뒤, 가동은 재빨리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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