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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428)화 (427/1,192)

제428화

마침내 먹구름이 울컥 비를 토해 냈다. 요란한 비바람과 함께 천둥 번개가 마구 내리쳤다. 천지도 슬픔을 이기지 못한 듯했다.

묵용감은 폭풍우를 견디며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침잠한 그의 눈망울에서 생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병사들은 송유에 적신 횃불을 들고 초왕비와 세자를 찾아다녔다. 멀리서 보면 꼭 화룡이 물속에서 허우적대는 듯 보였다.

얼굴과 몸을 가리지 않고 쏟아지는 빗물에 자연히 병사들의 몸이 무거워졌다. 그만큼 힘이 달렸으나, 누구도 게으름을 피울 수 없었다. 고개를 들어 절벽 위를 바라보면, 그 끝에 거대한 그림자가 서서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천지를 가르듯 우뚝 솟아난 위용을 보였지만, 이상하게도 보면 볼수록 코끝이 시큰해지는 모습이었다.

그의 뒤로 병사들이 질서 정연하게 대열을 이루고 섰다. 누구도 얼굴을 적시는 빗물을 닦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거센 폭풍우에 떨어진 낙엽이 춤을 추며 허공을 날아다녔다. 험악한 날씨를 산조차 두려움에 떠는 것 같았지만, 병사들만큼은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한통이 한참 동안 고민하다 결국 그를 타일렀다.

“왕야, 그만 돌아가시지요. 소식이 생기거든 말장이 곧장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폭우 속에 서 계시면 병이 나실지도 모릅니다. 왕야, 이럴 때 무너지면 아니 되십니다.”

묵용감은 대꾸도 하지 않고 바위처럼 자리를 지켰다.

아무리 기다려도 묵용감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한통은 아직도 무릎을 꿇고 있는 가동을 바라보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결국 한통은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흐르며 바람이 조금씩 약해졌다. 차가운 비가 처량하게 쏟아지는 광경이 퍽 쓸쓸하게 다가왔다. 어느새 병사들의 횃불이 하나둘 꺼지기 시작했다. 다시 새로운 홰를 밝혔지만, 절벽 아래에서는 어떤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

보다못해 직접 상황을 확인하고 돌아온 한통은 절벽 아래에 흐르는 하천을 발견했다. 이렇게 오랜 시간 수색해도 아무 소식이 없는 걸 보면, 왕비와 세자는 하천에 휩쓸린 게 틀림없었다. 많은 비가 내렸으니 하천이 불어나 급류가 흘렀을 테고, 그 말인즉슨… 달리 희망이 없다는 뜻이다.

그는 차마 묵용감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었다. 그의 표정에서는 전혀 생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비바람에 모든 감정이 깎여나간 듯 무표정했지만, 오히려 그 너머에서는 비통하게 절규하고 있는 듯했다.

만에 하나 나쁜 소식이라도 전해진다면, 언제든 절벽 아래로 뛰어내릴까 조마조마했다. 한통은 초왕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수색 상황을 지켜보았다.

어느덧 빗줄기가 조금씩 약해지다 완전히 잦아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바람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빗물을 흠뻑 머금은 묵용감의 도포가 세차게 펄럭였다.

하루 중 가장 추운 시간인 새벽녘에 찬바람까지 몰아치니, 몸은 빠르게 얼어가고 있었다. 입술이 파랗게 질린 병사들은 사령관만 빤히 바라보며 추위를 견뎠다.

꺼져 버린 횃불은 향처럼 흰 연기만 내뿜었다. 하룻밤을 꼬박 새워 찾았는데도 아무런 흔적을 찾지 못했으니, 이 이상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는 일이리라.

무릎을 꿇고 있던 가동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아무리 강철 체력이라 한들, 가동은 그 자세로 하룻밤을 꼬박 지새웠다. 더는 견딜 수 없을 터였다.

한통은 자신이 나서야 할 때임을 깨달았다. 설령 묵용감이 듣지 않는다 해도 타일러야만 했다. 그가 큰소리로 외쳤다.

“왕야, 부디 관저로 돌아가시옵소서!”

대답 대신 묵용감의 옷자락만이 바람에 흩날렸다. 그는 나비가 날아가고 남겨진 빈 고치처럼, 묵묵부답이었다.

한통이 무릎을 꿇으며 재차 소리쳤다.

“왕야, 그만 관저로 돌아가시옵소서!”

뒤에 있던 병사들도 서둘러 무릎을 꿇고 한통을 따라 외쳤다.

“왕야, 관저로 돌아가시옵소서! 왕야, 관저로 돌아가시옵소서!”

병사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연거푸 산을 울렸다. 옅은 금빛 햇살이 구름 사이로 스며들며, 하늘이 밝게 개이고 있었다. 묵용감은 그 희미한 새벽빛 속에서, 천지를 울리는 쩌렁쩌렁한 외침 속에서, 간절히 애원하는 수많은 시선 속에서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비록 마음은 그 자리에 없어도 지금껏 태산같이 서 있던 묵용감이다. 그가 허물어지듯 무너지니 한통의 간담이 절로 서늘했다. 다행히 묵용감은 앞으로 고꾸라진 게 아니라 뒤로 쓰러졌고, 한통이 서둘러 그를 부축할 수 있었다.

무릎을 꿇고 있던 가동도 깜짝 놀라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오랜 시간 무릎을 꿇고 있던 탓에 그는 비틀거리다 고꾸라지고 말았다.

초왕이 쓰러졌으니 가동에게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어쨌든 지금은 책임을 피할 수 있었다. 긴 한숨을 내쉰 한통은 초왕을 등에 업고 어슴푸레한 빛을 뒤로한 채 산길을 내려왔다.

영구는 병사들을 대동해 산 밑에서 왕비를 찾고 있었다. 밤을 꼬박 지새운 터라 그의 얼굴에도 피로감이 가득했다. 그러다 초왕이 한통에게 업혀 내려오는 모습을 보고 그는 곧장 마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가 묵용감을 직접 마차에 싣고 성으로 향했다.

이날 성문은 밤새 활짝 열려 있었다. 이른 새벽 무렵, 지친 병사들이 마차 한 대를 에워싸며 성으로 돌아왔다. 하나같이 꾀죄죄했고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꺾이지 않는 긴장감이 그들을 감싸고 있었다. 말과 병사들은 질서정연하게 성을 가로질러 부윤 관저로 향했다.

한통이 미리 관저에 소식을 전한 덕에 학평관과 위중청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학평관은 창백하게 질린 묵용감의 얼굴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영구는 말없이 묵용감을 방으로 옮겼다. 위중청이 다가와 조용히 맥을 짚었다.

“왕야께서는 상심이 크시어 정기를 모두 잃고 혼절하셨습니다.”

학평관이 조급하게 물었다.

“하면 언제쯤 깨어나시는가?”

위중청이 고개를 저었다.

“…양기가 돌지 않으면, 단기간에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왕비 마마에 대한 정이 그리 깊으셨으니, 충격이 크셨겠지요…….”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우선 옷부터 갈아입히고, 따뜻한 인삼차를 입안에 흘려 잡수시도록 해야 합니다. 한 시진 후에도 깨어나지 않으시면 침을 놓겠습니다.”

학평관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며 얼굴을 훔쳤다.

“어찌 갑자기 이런 일이…….”

초왕비와 세자를 생각하면 슬픔이 울컥 솟구쳤다. 학평관은 당장 목 놓아 울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방 안에 있던 이들을 물리고, 학평관과 영구만 남아 초왕의 옷을 갈아입혔다. 도중에 두 사람은 초왕의 오른손에 있던 장난감 북을 발견했다. 어찌나 꽉 쥐고 있는지, 아무리 빼려고 해도 뺄 수 없었다. 실낱같은 희망을 악착같이 붙든 듯한 모습에, 지금까지 침묵을 고수했던 영구마저도 눈물이 울컥 솟아올랐다. 그는 고개를 돌려 간신히 눈물을 억눌렀다.

초왕의 옷을 갈아입힌 뒤, 인삼차를 입 안으로 흘려 넣었지만 정작 마시는 양은 얼마 되지 않았다. 초조해진 학평관이 손을 문지르며 위중청을 찾았다.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위 의원, 당장 침이라도 놔야 하는 게 아닌가? 왕비 마마께서 떠나시면서 왕야까지 데려가실까 봐 정말 무섭네.”

왕비가 초왕에게 목숨과도 같은 존재라는 건, 위중청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왕비가 세상을 떠났다면 초왕도……. 그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삼켜야만 했다.

아무리 침을 놓아도 묵용감에게는 변화가 없었다. 의술에 자신이 넘쳤던 위중청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육체의 병이라면 치료할 자신이 있었지만, 마음의 병 앞에서는 한없이 무력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모든 이들의 희망이 그에게 달린 상황이었다. 그가 쩔쩔매니 묘한 긴장감이 내려앉았다. 급기야 영구가 검을 들어 그의 목 가까이에 가져다 대었다.

“위 의원. 침을 놓았는데도 깨어나지 못하시니, 어찌 된 일이오?”

학평관이 조심스레 그의 검을 밀어냈다.

“이러지 말게. 위 의원이 무슨 수를 쓸 것이네.”

그가 희망이 담긴 눈빛으로 위중청을 바라보았다.

“위 의원, 무슨 수가 있는 것이지?”

의자에 앉아 있던 한통도 잔뜩 날이 선 목소리로 말했다.

“위 의원. 왕야께서 깨어나지 못하신다면 내가 자네를 영원히 잠들게 해 주지. 의술이 뛰어나다더니, 그저 떠돌이 사기꾼이었군!”

지척에 놓인 검을 바라보자 위중청은 심장이 미친 듯 빠르게 뛰었다.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손에 들고 있던 침을 만지작거렸다.

“절망보다 더한 슬픔은 없습니다. 아무런 희망도 품지 않으면 신선이라 한들 고칠 수 없는…….”

그의 말에 영구가 다시금 칼을 들이밀었다.

“신선이든 뭐든 난 모르오. 왕야를 깨어나게 할 수 있는지 없는지만 대답하시오.”

검이 살갗을 베고 있는 듯, 위중청은 목에서 따끔한 통증을 느꼈다.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없다는 말이 어찌 나오겠는가?

그가 이를 꽉 깨문 채 토하듯 말을 내뱉었다.

“할 수 있습니다.”

초왕이 늦게 깨어날수록 제 죽음이 빠르게 앞당겨지리라. 서둘러 방법을 찾지 않으면 살아남더라도 불구자가 될 게 뻔했다. 뭐든 시도해 봐야 한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사흘만 말미를 주십시오. 사흘 뒤에도 깨어나지 않으시면 그땐 제 목을 내놓겠습니다.”

영구는 한통과 눈빛을 주고받더니 검을 거두었다.

“좋소. 사흘이오.”

위중청은 언제든 묵용감의 상태를 살필 수 있게 그의 침소에서 잠을 청했고, 매 시진 침을 놓았다. 그는 비로소 중요한 사람의 수행 의관을 맡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깨달았다. 부귀영화를 누리기는커녕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는 돈만 충분히 모으면 관저를 나가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가동도 몸져누워 있긴 마찬가지였다. 돌아왔을 때 그의 꼴도 처참했다. 온몸이 진흙투성이였고, 얼굴과 팔에는 크고 작은 상처가 한가득이었다. 무릎은 뼈까지 상한 듯 퉁퉁 부어 있었다. 병사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오는 그의 처참한 모습에 녹하는 그 자리에서 눈물을 쏟을 뻔했다.

관저에 돌아왔을 때만 해도 가동의 정신은 제법 온전했다. 그는 녹하에게 왕비와 세자를 구하지 못했다고 털어놓으며 스스로를 쓸모없는 존재라고 책망했다. 녹하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가동을 위로했다. 아직 시신을 찾은 것은 아니니 왕비와 세자는 무탈할 거라고, 운이 워낙 좋은 분들이니 몸이 나으면 다시 찾아보자며 연신 타일렀다.

가동은 열이 오르기 시작하자 헛소리를 해 댔다. 위중청은 짬을 내어 가동의 상태를 봐 주었고 풍한에 걸렸다며 약을 처방해 주었다. 약을 달여 먹으면 사흘 안에 나을 거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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