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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427)화 (426/1,192)

제427화

혼잡했던 후원은 금세 안정을 되찾았다. 시녀와 하인들이 처소 안을 기웃거렸지만, 녹하의 차가운 시선에 목을 움츠리고는 뿔뿔이 흩어졌다.

앞뜰에는 관원들이 번갈아 당직을 서긴 했지만, 누구도 실마리가 될 만한 일을 알지 못했다. 그때, 소식을 접한 태자가 급히 걸어오더니 학평관에게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이야, 왕비와 세자가 사라졌다던데?”

학평관이 어찌 태자를 속일 수 있을까. 그가 사실을 털어놓자, 태자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늘 온화하던 태자가 노발대발하더니 학평관에게 욕을 퍼부었다.

“이런 쓸모없는 노비 같으니! 그리 큰 사달이 났는데 어째서 내게 고하러 오지 않았느냐? 대체 뭐 하는 놈이란 말이냐! 초왕에겐 전갈을 보냈느냐? 만일 왕비와 세자에게 변고라도 생기면 초왕이 네 목을 칠 것이다!”

학평관은 고개만 푹 수그리고 있었다. 그로서는 입이 몇 개든 할 말이 없었다. 무려 초왕과 태자가 묵는 부윤 관저에서 왕비가 납치를 당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 삼엄한 경비를 뚫고 왕비를 납치해 가다니, 강도도 참 대단한 자였다. 담이 크거나, 미친 게 틀림없었다.

“가동은 어느 쪽으로 갔느냐?”

학평관이 고개를 숙인 채 답했다.

“아무 말도 없이 병사들을 이끌고 가 버렸습니다.”

“어째서 제대로 묻지 않았단 말이냐?”

태자의 화는 쉬이 꺼질 줄 몰랐다.

“정녕 목숨이 아깝지 않은가 보구나.”

잠시 침묵하던 태자가 생각을 정리하고 말했다.

“우선 인원을 모아 네 곳의 성문으로 보낼 터이니, 너는 관저를 지키고 있거라. 소식이 전해지거든 즉각 와서 고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학평관은 허리를 굽실거리며 분주하게 멀어지는 태자를 배웅했다.

복도에 서 있는 세 시녀의 표정은 각양각색이었다. 기홍의 얼굴에는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웠고, 녹하는 돌을 깎아 만든 조각상처럼 굳은 얼굴이었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월규는 앉지도, 서지도 못한 채 초조함에 어쩔 줄 몰라 했다.

왕비의 안부를 모르니 애가 타고 마음이 아팠다. 왕비와 세자만 떠올리기만 해도 눈물이 터져 나왔다. 월규가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무슨 말이라도 좀 해 보십시오. 대체 무슨 일이랍니까?”

녹하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겠어. 왕비 마마와 세자 아기씨가 납치되신 거지.”

다리가 풀린 월규는 그만 의자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 그럼, 와, 왕비 마마께서…….”

기홍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왕비 마마께는 아무 일도 없어. 우리 마마는 똑똑하시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망치실 거야. 그러니까 우린 수선 피우지 말고 침착하게 기다리면 돼.”

단호하게 말을 마친 녹하가 정원으로 나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침보다 날씨가 더 흐려졌다. 겹겹이 드리운 구름은 손에 잡힐 듯이 내려앉았다. 그녀가 문득 중얼거렸다.

“비가 올 것 같네.”

고개를 돌리는 그녀의 시야에 누각에 서 있는 누군가가 들어왔다. 황보주아였다. 어쩐지 그녀의 표정이…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치밀한 공방 끝에 승리를 거둔 이처럼, 기세등등한 웃음이었다.

먼 거리라 확실치 않았음에도, 녹하는 손끝이 차가워지는 기분을 느꼈다. 설마 황보주아와 관련된 일이란 말인가? 그러나 황보주아는 누각에 갇혀 운신조차 어려운 몸이 아닌가. 설령 그녀가 그런 짓을 원한다 한들, 지금의 처지론 무리일 터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문을 수색하던 사람들이 소식을 전해왔다. 역시나 길가에서 사살된 전서구를 발견했다고 했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있던 한 장군이 인편으로 소식을 전해 듣고 곧장 병사들을 이끌었다. 그는 바로 가동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금릉으로 보내진 전서구는 무사히 영구를 찾아갔다. 그는 비둘기 다리에 매달린 구릿빛 고리에서 자그마한 쪽지를 꺼내 펼쳤다. 언제나 자연의 돌처럼 무기질적인 표정을 짓던 영구였으나, 쪽지를 읽은 순간 안색이 어둡게 물들었다.

영구가 쪽지를 읽고 있을 때, 초왕은 백천범을 위해 만든 연못을 찬찬히 둘러보고 있었다. 그녀가 물고기를 기를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해 꾸며 놓았다. 문득 곁눈질을 하자 영구가 황급히 말을 끌고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상황을 물으려 하니 영구가 말없이 쪽지를 내밀었다.

쪽지를 읽은 묵용감은 등골에 차디찬 칼날이 파고드는 듯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곧장 말을 타고 질주했다.

자욱한 먼지를 일으키며 내달리는 초왕의 머릿속은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쉴 틈 없이 달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거리의 사람들은 질주하는 말에 놀라 황급히 길가로 몸을 피했다. 그들은 말을 모는 사람이 초왕인 줄도 모르고, 우두커니 서서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영구도 서둘러 그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아무리 빠르게 뒤쫓아도 초왕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결국 초왕은 까만 점처럼 줄어들다 그의 시야를 완전히 벗어나고 말았다.

쉼 없이 달린 끝에 마침내 저 멀리 수성 성문이 시야에 들어왔다. 성문에 가까워지자, 쓰러져 있는 초왕의 말이 보였다. 성문을 지키던 보초병이 다급히 소리쳤다.

“영 대인, 왕야께서는 북문으로 가셨습니다. 어서 가 보십시오.”

초왕의 말을 본 영구는 적잖이 놀랐다. 초왕이 저 말을 탄 지 이제 대여섯 해 정도 되었을 텐데, 어렵사리 구한 말의 목숨이 끊어질 기세로 질주한 것이다.

영구의 말도 더는 힘을 내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영구는 서둘러 말을 바꿔 타고 북문으로 향했다.

* * *

가동의 추측은 틀리지 않았다. 그는 병사들을 이끌고 북쪽으로 가던 도중 실마리를 찾아냈다. 가동은 흔적을 따라 구불구불한 산속으로 향했다. 높다란 산봉우리가 길게 이어져 있으니 사람을 숨기고 몸을 피하기엔 최적의 장소였다.

그러나 흔적을 뒤쫓는 이는 초왕의 호위무사, 가동이었다. 초왕의 호위무사로 선발되었다는 것은 가동의 실력 역시 결코 무시할 수준이 아님을 뜻했다. 늘 어수룩해 보여도, 가동의 예리한 관찰력과 판단력은 영구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병력을 이끌고 온 한통이 합류했다. 인원이 많으면 일을 처리하기 훨씬 수월한 법이었다.

그들은 빽빽한 산림을 이 잡듯 뒤지기 시작했다. 사람이 남긴 흔적을 따라 개울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산봉우리에 올라가고, 봉우리 주변을 빙빙 돌았다. 아무래도 범인은 이 근처를 맴돌고 있는 것 같았다.

가동은 서서히 초조해졌다. 분명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것 같은데 아무리 뒤쫓아도 범인의 그림자조차 잡을 수가 없었다.

그때, 갑작스레 천둥이 치더니 뒤이어 번개까지 내리쳤다. 곧이어 거센 바람이 불어오며 나뭇가지를 흔들며 솨솨 하는 소리를 냈다. 하늘은 무너져 내릴 것처럼 어두워졌고, 바람에 흙먼지가 섞여 들었다. 사방은 낮인지 밤인지도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다.

한통이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비가 오다니 일이 더 어렵게 되었군.”

범인이 누군진 몰라도, 제대로 된 날을 골랐다. 빗물에 흔적이 쓸려 가리라는 건 가동도 알았다. 그러나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곳에서 단서가 끊어진다면 아무런 희망도 남지 않으니.

“어쩔 수 없지요. 조금 더 서두르는 수밖에요.”

그때 가동이 나뭇가지에 걸린 실오라기를 집어 올렸다. 누군가 이곳에서 옷이 걸린 듯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먼 곳을 바라보더니 이내 턱을 들어 올렸다.

“저쪽입니다.”

한통이 팔을 휘두르며 큰소리로 외쳤다.

“좌측으로 전진하라!”

한통이 가리킨 방향으로 병사들이 우르르 달려 나가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이곳은 산을 오르는 산비탈이었다. 산길이 구불구불하게 나 있었고 경사도 조금 가팔랐다. 가동은 땅에서 선명한 발자국을 찾아냈다. 자국을 살펴보니 지나간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했다. 흠칫 놀란 그가 소리쳤다.

“이쪽이다!”

사병들이 황급히 산기슭을 뛰어올라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소리쳤다.

“저기 있습니다!”

몸을 날린 가동이 나무 위로 올라가 나무와 나무 사이를 뛰어 다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희미한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어깨에 무언가를 짊어진 듯한 그림자 쪽에서 작은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갓난아기의 울음소리였다.

그는 세자의 울음소리라 확신하고 그림자를 바짝 쫓았다. 거의 다 따라잡았지만 안도하기는 일렀다. 그 그림자는 갑자기 작아지는가 싶더니 금세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가동은 발끝을 나무에 대고 힘껏 힘을 준 뒤, 몸을 비스듬히 세워 빠르게 밑으로 내려왔다. 잔가지들이 얼굴과 팔에 상처를 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숲을 빠져나와 그림자가 사라졌던 곳에 다다른 그는 별안간 목석처럼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그는 까마득한 아래를 내려다보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병사들을 이끌고 그의 뒤를 쫓던 한통은 저 멀리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채 서 있는 가동을 발견했다. 끔찍한 몰골의 그는 무언가에 홀린 듯 멍한 표정이었다. 불길한 예감에 휩싸인 한통이 서둘러 다가왔다.

“납치범은?”

가동은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통은 그제야 가동이 서 있는 곳이 까마득한 절벽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흠칫 놀란 한통이 절벽 아래를 살펴보았다. 순간 오금이 저렸다.

절벽 아래는 형체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높아, 온통 검게 물들어 있었다. 돌을 던져 보았지만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때, 풀 사이에서 무언가가 반짝였다. 한통이 몸을 숙여 반짝이는 물건을 살펴보니, 구슬이 달린 작은 북이었다.

그가 가동에게 북을 건네며 물었다.

“자세히 보게. 세자 아기씨가 쓰던 것 아닌가?”

그제야 가동이 시선을 올려 북을 받아들었다.

“…맞습니다. 세자 아기씨 것입니다. 왕야께서 직접 고르시는 걸 보았습니다.”

무거운 목소리로 답한 가동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두 뺨을 타고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렇게 높은 곳에서 떨어졌다면 가망이 없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 있겠는가. 가동은 고개를 틀고 서둘러 눈물을 닦았다.

“장군, 절벽 아래쪽을 수색할 병력을 보내 주십시오. 살아 계신다면 마마와 아기씨를 찾아야 하고, 그렇지 않더라도 시신은 찾아야 합니다.”

“내 생각도 같다네.”

한통은 부장군 몇 명을 불러 산 아래쪽을 수색하라고 지시했다. 잠시 후 그가 머뭇거리다 운을 떼었다.

“왕야께서도 지금쯤 소식을 듣고 돌아오는 중이실 텐데, 우리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우람한 그림자가 두 사람 곁으로 다가왔다. 묵용감이 확신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왕비는, 왕비는 찾았느냐?”

가동은 곧바로 무릎을 꿇고 작은 북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소인, 죽어 마땅하옵니다. 왕비 마마와 세자 아기씨께서는 저 아래로…….”

차마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울음이 먼저 터져 나와, 가동은 엎드린 채 흐느끼기 시작했다.

묵용감의 얼굴에서 생기가 사라졌다. 북을 받아 든 순간부터, 그는 그 자리에 조각된 석상처럼 변해 버렸다.

“…왕야.”

한통이 애써 위로의 말을 건네려 했다.

“말장이 절벽 아래로 수색 인원을 보냈습니다. 마마께서는 운이 대길이신 분이 아닙니까. 아무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 아무 일 없을지도 몰랐다. 어릴 때 그 깊은 우물에 빠지고도 살아남았는데 이게 뭐 대수라고. 분명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웃으며 그의 앞에 나타나리라. 그래야만 했다. 그래야만 하는데…….

깊이를 알 수 없는 저 절벽 아래에서부터, 슬픔과 절망이 차올라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팠다. 감정은 뾰족한 날을 세워 그의 가슴을 관통했다. 그 자리를 시리디시린 바람이 오가며 뼛속까지 시큰거리는 아픔을 안겨 주었다.

묵용감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이렇게 높은 곳에서 떨어졌는데 얼마나 무서웠을까. 그리고 우리 아들은……. 두려움이 그의 심장을 반으로 갈라놓는 듯했다. 묵용감이 휘청거리며 허리를 굽혔다. 그는 검게 물든 절벽 아래를 들여다보며 단 한 가지만을 바라고, 또 바랐다. 그저 살아만 있길, 제발 살아만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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