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6화
월규가 손을 뻗어 죽 그릇을 받아들려 했지만, 기홍은 넘겨 주지 않았다. 집안에 아이가 한 명인지라 다들 아기와 가까워지고 싶어 안달이었다. 지금까지 기홍에겐 기회가 없었지만, 이제는 이유식을 먹기 시작했으니 그녀에게도 세자를 모실 기회가 생겼다. 이 기회를 어찌 놓치겠는가.
매번 기홍이 맛있는 음식을 가져오니 세자도 그녀를 보면 방긋방긋 웃어 주었다. 그 웃음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그녀의 마음을 전부 꺼내 주고 싶을 정도였다.
세자에게 이유식을 먹이던 기홍이 불쑥 월규를 돌아보았다.
“위 의원이랑은 어떻게 된 거야, 위 의원이 중매를 서 달라고 부탁했다던데?”
그 말에 월규의 안색이 급변했다.
“누가 그래요?”
“녹하한테 못 들었어? 가동 무사님한테 부탁했대.”
백천범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위 의원이 마음에 드는 여인이라도 있대요?”
“그것까진 모르겠습니다.”
기홍이 고개를 저었다.
“녹하한테 한번 물어봐. 녹하는 알 거야.”
월규가 어색한 웃음을 보였다.
“아닙니다. 애당초 위 의원과 아무 사이도 아니었는걸요. 누구에게 장가를 가든 저는 상관없습니다.”
백천범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녹하 언니가 요즘 시무룩해 보이던데. 아이 때문이지? 사부님이 위 의원한테 약재를 자주 물어보던데……. 그래서 둘이 가까워졌나 봐. 나중에 한번 물어볼게.”
때마침 녹하가 울적해 보이는 얼굴로 들어왔다. 그러나 그녀의 우울함은 세자를 보자마자 훌쩍 날아간 모양이었다. 요람 옆에 앉은 녹하는 세자의 이유식을 빼앗을 것처럼 장난을 쳤다.
“안 줄 겁니다. 제가 먹을 거지요! 이리 주세요. 아이고, 어찌 빼앗아 가십니까!”
녹하는 요상한 말투로 세자를 놀렸다. 세자는 이유식을 먹으면서 그녀를 밀어내기 바빴다. 세자의 손에 맞기라도 하면 녹하는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기홍이 넌지시 말했다.
“놀리지 마. 그러다 사레라도 들리시면 어째.”
백천범은 녹하가 온 김에 위중청의 일을 물어보았다. 녹하가 월규를 힐끔 바라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일부러 속인 건 아냐. 네가 속상해할 것 같아서 말 못 한 거지.”
월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제가 속상할 게 뭐가 있겠어요. 아무 사이도 아니었는걸요.”
결국 녹하가 그간의 일을 털어놓았다. 가동이 위중청에게 연극을 보여 주었는데, 공연이 끝나고 별안간 위층에서 손수건 한 장이 떨어졌다고 했다. 하필 그 손수건이 위중청의 어깨에 내려앉은 게 아닌가.
알고 보니 위층에 한 여인이 서 있었다. 얌전하고 온순해 보이는 아가씨였는데 떨어뜨린 손수건이 사내의 몸에 내려앉자 얼굴을 붉히고 애교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모습에 위중청의 눈이 휘둥그레졌단다.
그 후, 여인은 시녀를 내려보내 손수건을 가져갔고, 이 때문에 마음이 쓰인 위중청은 발 넓은 가동에게 어느 집 규수인지 알아봐 달라고 물은 게 전말이었다.
월규가 피식 헛웃음을 지었다.
“꼭 연극 같습니다. 하늘이 내려 준 인연인데 놓치면 정말 아깝겠네요.”
백천범이 얼른 말했다.
“난 네 편이야. 네가 말만 하면 왕야께 혼인을 정해 달라고 말씀드릴게. 왕야께서 내리는 혼사인데 위 의원이 거절할 수 있겠어? 혼인부터 한 뒤에 천천히 감정을 키워 가면 되지. 위 의원도 네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될 거야.”
월규가 씁쓸한 미소로 답했다.
“무리하게 몰아세우면 오히려 역효과만 나는 법이지요. 억지로 엮으면 원한만 살 것입니다. 무엇보다 저도 그렇게까지 좋아하진 않습니다. 아직 열여덟인데, 벌써부터 걱정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월규의 말도 옳았다. 사람의 감정을 몰아세웠다가 일이 꼬이면 더 곤란해질 터였다. 월규는 담담히 넘어갈 수 있는 아이니 이 문제로 위중청을 괴롭힐 이유는 없었다.
다만 백천범은 다소 아쉽고 속이 상했다. 누가 보기에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는데 인연이 닿지 않다니. 더군다나 녹하도 내심 걱정을 품고 있었다. 혼인을 한 지 일 년이 다 되어 가는데,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위중청은 서두를 것 없다며 그녀에게 약을 지어 주었다. 마음을 편히 가지라고 했지만 녹하는 자꾸만 조바심을 냈다. 가동은 혹시라도 녹하의 감정이 격해질까 봐 늘 그녀 곁을 지켰다. 초왕이 금릉을 갔을 때도 그는 관저에 남아 그녀를 돌봤다.
유일하게 좋은 소식이 있는 사람은 기홍이었다. 영구가 마침내 초왕에게 혼사 이야기를 꺼냈고, 초왕은 흔쾌히 허락했다. 날짜만 정하면 혼사를 치러 주겠다고 했다. 그 뒤로 기홍은 혼수 등을 준비하느라 바빴고, 자연스레 세자는 월규가 돌보게 되었다.
지금은 월규의 마음이 편치 않을 테니 그녀에게 몰두할 일을 만들어 주는 편이 더 나았다.
“날이 추워진 데다 세자가 워낙 빨리 크니 겹옷을 두 벌 정도 지어야겠어. 왕야께서 이번에 돌아오시면 금릉으로 거처를 옮길 준비를 하실 거라니까 미리 만들어 두는 게 낫지. 금릉은 난강을 끼고 있으니까 날씨가 더 추울 거야.”
월규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시간을 좀 더 들이면 금방 만들 수 있습니다.”
녹하도 팔을 걷어붙였다.
“저도 돕겠습니다. 그럼 더 빨리 만들 수 있을 거예요.”
백천범이 녹하에게 슬쩍 눈짓을 보냈다.
“언니는 기홍 언니 혼수 준비를 돕는 게 좋겠어요.”
녹하는 그녀의 뜻을 바로 이해하고 미소로 답했다.
각자 맡은 일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월규마저 바빠지니 세자는 백천범이 직접 돌보게 되었다. 그렇게 기홍의 혼수도 모두 준비되었고, 이제 혼례복 준비만이 남아 있었다. 이틀 뒤면 묵용감이 돌아올 테니 그때 영구와 기홍의 혼사를 치러주고, 금릉으로 거처만 옮기면 모든 일이 평안할 터였다.
그러나 평안한 날은 손으로 잡을 수 없는 햇빛인 양, 이따금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 * *
번잡한 마음에 쉽게 잠들지 못한 월규의 아침은 조금 늦게 시작되었다. 자시까지 세자의 옷을 만들다 늦게 잠이 든 터였다.
때마침 초왕이 관저를 비웠으니 그리 걱정할 건 없었다. 느긋하게 왕비의 침소에 들어간 월규는 이상하리만치 고요한 공기를 느꼈다. 자신을 제외하면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조심스레 장막을 걷어 보니,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왕비는 물론 세자도 보이지 않았다. 일찌감치 잠에서 깬 왕비가 세자를 데리고 산책이라도 간 걸까?
아무래도 이상했다. 왕비는 직접 이불을 정리해 놓는 습관이 있었다. 이렇게 어지럽혀두고 나갈 사람이 아니었다. 더욱이 관저에 있는 거라면 세자에게 두봉까지 입힐 리도 없었다. 늘 침대 끝에 걸려 있던 두봉이 어째서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그녀는 문득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까닭 없는 당혹스러움이 그녀의 등을 떠미는 듯했다. 서둘러 부엌으로 뛰어드니 기홍이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허겁지겁 달려오는 그녀를 보고 기홍이 평소처럼 물었다.
“왕비 마마는 일어나셨어? 아침 식사는 조금만 더 기다리면…….”
잔뜩 긴장한 월규가 말을 잘랐다.
“언니, 오늘 왕비 마마를 못 보셨습니까?”
기홍이 태연히 고개를 저었다.
“난 일어나자마자 부엌으로 오잖아. 왕비 마마는 아직 못 뵈었지.”
월규의 안색이 점점 더 창백해지고 있었다.
“마마께서 침소에 안 계십니다. 침대의 이불도 엉망이고요. 세자 아기씨의 두봉도 안 보입니다. 뭔가 이상합니다. 아침 일찍부터 밖으로 나가신 건 아니겠죠?”
“마마께서 아침 일찍 밖에 나가실 일이 뭐가 있겠어?”
그녀의 반응에 기홍도 조급해지긴 마찬가지였다.
“어서 어르신께 말씀드려. 하인들을 보내 찾으라고 해야지.”
마침 학평관은 복도에서 새와 장난을 치고 있었다. 월규가 허둥지둥 찾아가 고하자, 그는 곧장 하인들에게 왕비를 찾으라고 분부했다. 소식을 전해 들은 녹하도 가동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늘 어수룩하기만 하던 가동이지만 이런 일에는 방심하지 않았다.
이렇게 훤한 아침에 사람이 사라질 리가. 곧장 백천범의 침소를 찾아간 가동이 주변을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낯빛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가동의 이런 모습은 녹하마저도 처음 보았다. 괜스레 초조해진 녹하가 그를 채근했다.
“왜, 뭐라도 알아낸 거야?”
가동은 잿빛이 된 얼굴로 방을 나왔다.
“학평관 어르신께 마마를 찾지 말라고 말씀드려.”
“왜?”
“어서!”
가동이 별안간 언성을 높였다.
“다들 각자의 위치를 지키라고 해. 누구도 함부로 움직여선 안 돼.”
다른 이도 아니고, 자신에게 난폭하게 굴 정도라면 보통 상황이 아니었다. 녹하는 목 끝까지 차오르는 질문들을 삼키며 서둘러 학평관을 찾아갔다. 도중에 마주친 하인들에게는 그만 돌아가 자신의 자리를 지키라고 일렀다.
가동의 성격을 잘 알고 있던 학평관도 녹하의 말에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가 옷자락을 움켜쥐더니 허둥지둥 후원으로 내달렸다.
“무슨 사달이라도 난 겐가?”
창 앞에 서 있던 가동은 무언가를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학평관의 물음에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급히 세 가지 일을 처리해야 합니다. 첫째, 한 장군님께 병사들을 동원해 성 밖을 차단해 달라는 전서구傳書鳩(편지를 보내는 데 쓸 수 있도록 훈련된 비둘기)를 보내 주십시오. 둘째, 왕야께도 급히 돌아오시라는 전서구를 보내야 합니다. 셋째, 똑같은 내용의 서신을 인편으로도 보내십시오. 최대한 빠르게요.”
오랜 시간 초왕 곁에 있던 사람들은 위급한 상황일수록 말을 아꼈다. 학평관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곧장 그의 분부에 따랐다.
기홍과 녹하는 묵묵히 그의 곁을 지켰다. 다만 두 사람만큼 침착할 수 없었던 월규는 절로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뭐라도 알아내신 겁니까? 왕비 마마와 세자 아기씨는 어디에 계신 겁니까?”
가동은 대꾸도 없이 지붕 위로 훌쩍 뛰어 올랐다. 흐릿한 아침볕을 맞으며 허리를 굽혀 옥척屋脊을 샅샅이 살피던 그가 뭔가를 집어 들고 냄새를 맡았다. 이내 그것을 손에 꽉 쥐는 게 아닌가.
우중충한 날이었지만, 그보다 가동의 안색이 더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가 두 팔을 펼치며 지붕 위에서 뛰어내렸다. 곧장 복도로 향한 가동은 서두르기도 하고, 천천히 걷기도 하면서 복도를 세심히 살폈다. 그러다 별안간 몸을 날려 수풀을 헤집던 그는 아예 바닥에 쪼그려 앉아 무언가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의 안색은 점점 더 어두워져, 흐린 먹구름 낀 것만 같았다.
학평관은 가동의 말대로 일을 처리한 뒤 그를 찾아왔다. 가동은 이 순간 누구보다 엄격하고 진지한 책임자였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분부했다.
“동문에 하인들을 보내 사살된 전서구가 있는지 수색하라고 분부하십시오.”
학평관이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 말은, 계획된 일이었단 말인가? 해서 전서구만으로는 믿지 못하는 것이고?”
가동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장군님께 계속 상황을 보고해야 합니다. 제가 먼저 북문으로 출발할 테니 뒤따라오라고 전해 주십시오.”
가동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지금 관저에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보초까지 합치면 대략 백 명이 조금 안 되네.”
학평관이 조심스레 물었다.
“태자 전하께도 도움을 요청하는 게 어떻겠나?”
가동이 손을 내저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열다섯 명은 어르신께서 배치하시고, 나머지는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말을 마친 가동은 눈 깜짝할 사이에 반월문을 지나 사라져 버렸다. 평소와 달리 매섭게 치켜뜬 눈매가 이질적인 느낌마저 안겨 주었다. 저절로 이마에 땀이 맺힌 학평관도 서둘러 앞뜰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