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425)화 (424/1,192)

제425화

국사를 들인 지 일 년도 되지 않았지만, 그간 그는 제법 신통한 능력을 보여 주었다. 몽달국과 교전을 벌일 때도 황제는 매우 망설였다. 병력은 있었지만 병사를 제대로 이끌 장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고민에 빠진 그에게 국사가 점을 친 결과를 보고했다. 서쪽에서 장수가 나타나 적을 제압하고 대승을 거두리라는 점괘였다. 보고된 장수의 명단을 살펴보니 과연 산서 군영에 점괘 내용이 함축된 이름이 있었다. 그자가 바로 백장간이었다. 황제는 반신반의하며 백장간을 통솔자로 내보냈고, 점괘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국사가 안으로 들어섰다. 다른 신하들은 그의 앞에서 굽실거리기 바빴지만, 그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사십 대쯤 되어 보이는 그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머리에 옥관을 쓰고 있었다. 도포를 입고 침착한 표정을 지으니 신선처럼 보이기도 했다.

황제가 거두절미하고 물었다.

“국사가 짐을 찾아오다니,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인가?”

“폐하.”

국사가 손에 들고 있던 부적을 황제에게 바쳤다.

“신이 어젯밤 별자리를 살펴보았는데 자미성紫微星(북두칠성의 동북쪽에 있는 열다섯 개의 별 중 하나로, 천자의 운명과 관련된다고 믿었음)의 움직임을 발견하였습니다…….”

황제가 크게 놀랐다.

“어째서 움직였단 말인가?”

“폐하, 너무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국사는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이미 점을 보았는데 대길인 점괘가 나왔습니다. 점괘에 따르면, 폐하께서는 진룡眞龍의 천자이시지만, 물이 얕아 곤란한 처지에 놓이셨고 그 바람에 나라도 두 갈래가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하늘을 깨어 폐하께서 천하 통일의 대업을 이으시고 백성들의 고통을 줄일 수 있다고 나왔습니다.”

황제는 침묵했지만, 백 귀비는 기쁨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국사의 말씀은 지금 출병하여 남쪽을 되찾는다면 대승을 거둔단 뜻입니까?”

국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군신이 나서면 반드시 대승을 거둘 것입니다.”

백 귀비가 살가운 목소리로 부추겼다.

“폐하, 신첩은 국사의 말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초왕이 대단하긴 하지만, 우리에겐 백 장군이 있지 않습니까? 두 사람 모두 폐하께 군신의 칭호를 받은 이들입니다. 서로의 실력을 겨뤄 볼 기회가 아닙니까?

소문에 초왕은 예전의 군신이 아니라고 합니다. 공무도 잘 돌보지 않고 부인과 아이 곁만 맴돈다더군요. 백 장군은 다릅니다. 이제 막 주조를 마친 명검이지요. 광채를 내뿜어야 할 시기가 온 것입니다.”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던 황제가 물었다.

“자미성이 움직인 것이 확실한가?”

“확실합니다.”

“만약 천하가 혼란에 빠져 혹시라도…….”

그의 우려에 국사는 다부진 목소리로 답을 내놓았다.

“폐하께서는 폐하 자신과 백 장군을 믿으셔야 합니다.”

국사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폐하께서는 진룡의 천자이십니다. 궁에 머무시는 이상, 그 지위는 쉽게 흔들리지 않지요. 백 장군이 바로 하늘을 깨는 별입니다. 폐하께 복을 가져다주는 장군이지요. 운명을 따라 그의 도움을 받으시면 분명 대업을 이루실 겁니다. 또한…….”

국사가 황제를 한번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

“금릉의 새 궁에 불이 났다고 합니다. 남쪽의 군주가 즉위하기 좋은 때를 놓쳤으니, 이 또한 하늘이 보내는 경고가 아니겠습니까. 폐하, 진실은 거짓이 될 수 없고, 거짓은 진실이 될 수 없사옵니다. 부디 기억해 주시옵소서. 폐하께서야말로 이 나라의 진정한 황제이십니다!”

그날 밤, 황제는 홀로 남서방에 앉아 오랜 시간 생각에 잠겼다. 이튿날 아침, 황제는 백장간을 전원정殿元正 대장군으로 임명하고 위수로 보내 철기대군을 통솔하는 임무를 맡겼다.

황제의 명에 조정 대신들은 충격에 빠졌다. 비록 남쪽을 치라는 명은 없었지만, 그를 위수로 보내는 것만으로도 황제의 뜻을 짐작할 수 있었다.

백 승상도 줄곧 내전을 바랐다. 태자와 초왕은 그에게는 우환이나 마찬가지니, 남겨 두어서 좋을 게 없었다. 남쪽의 국력이 막강해지기 전에 그들을 친다면 시기적절한 일이었다.

다만 그 일을 백장간에게 맡긴다고 생각하니 그의 마음에 망설임이 일었다. 결국엔 초왕과 맞서야 할 텐데,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의 친아들이 변고를 당할 수도 있는 일이니…….

“폐하.”

그가 앞으로 나와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위로 들어 올렸다.

“역시 현명하십니다.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지요. 지금은 아군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고 병력도 충분합니다. 남쪽을 멸하고 천하를 통일하는 일이 조만간 가능하옵니다. 다만, 백 장군은 아직 경험이 부족합니다. 큰 임무를 감당하긴 어려울 테니 다른 장군에게 맡기시는 게 더 적합할 것이라 사료됩니다.”

요즘 황제는 백씨 가문에 심하게 의존하고 있었다. 백 승상의 말에도 황제는 여전히 미소를 보였다.

“승상은 백 장군의 안위가 걱정되는 게 아닌가?”

백 승상은 황제에게 속을 들키자 민망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다시 입을 열려고 하는데 백장간이 갑작스레 끼어들어 무릎을 꿇었다.

“신, 폐하의 어명을 받잡겠나이다.”

황제와 백 승상의 희비가 갈렸다. 황제 앞에서 화를 낼 수 없었던 백 승상은 조회가 끝나자마자 백장간을 끌고 대전을 빠져나왔다. 조용한 곳에 다다라서야 그가 낮게 호통쳤다.

“정신이 나간 것이냐? 몽달국을 이겼다고 백전백승이라도 할 것 같더냐? 초왕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초왕이 군대를 이끌고 전장을 누빌 때 넌 젖비린내도 가시지 않은 애송이었단 말이다! 그리 경솔하게 명을 받다니, 정녕 헛되이 목숨을 버릴 작정이냐?”

백장간이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

“아버지, 폐하께서는 저를 임명만 하셨을 뿐, 남하하라는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시작도 하지 않은 일로 어찌 그리 근심하십니까?”

“시작도 하지 않은 일이라니! 두고 보거라. 폐하께서 네게 임무를 맡기셨다는 것은 분명 깊은 뜻이 있으신 게다. 간아, 네가 능력을 보여 주고 싶어 한다는 것 잘 안다. 하지만 폐하의 총애는 것은 양날의 검이다. 자칫하면 너 자신을 해할 수도…….”

“아버지.”

백장간이 성가시다는 듯 말을 끊었다.

“이 아들, 군대에 있으면서 생사를 염두에 두지 않은 지 오래입니다. 전쟁을 치르는데 어찌 희생이 따르지 않겠습니까? 전쟁터에서 장렬히 전사하는 일은 장수의 가장 훌륭한 최후입니다.”

“너…….”

백 승상은 할 말을 잃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를 어찌 타이를 수 있겠는가.

결국 그는 성을 내며 자리를 떴다.

“그래, 아주 대단한 장군 납셨구나. 가려면 가거라. 네 어미가 얼마나 자지러지는지 보자꾸나!”

백장간은 그의 뒤를 따르며 나긋하게 말했다.

“어머니께는 천천히 말씀드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백 승상은 제 갈 길만 분주히 걸어갔다. 조용히 그의 옆을 따르던 백장간은 끝내 오랫동안 품어 왔던 의문을 내밀었다.

“아버지, 어째서 천범이를 초왕에게 시집보내신 것입니까?”

흠칫 놀란 백 승상이 걸음을 멈추고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건 왜 묻는 것이냐?”

백장간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저 궁금해서요. 원한이 깊은 초왕에게 천범이를 보내면, 그 아이가 힘겹게 살 거라고는 예상 못 하신 겁니까?”

백 승상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힘겹게 산다 한들, 목숨을 잃는 것보단 낫지 않겠느냐.”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씨 부인이 백천범에게 한 짓들은 저택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는 궁 안팎에서 공무에 몰두해야 하니 그녀를 지켜 줄 수 없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초왕의 저택으로 가는 게 나았다. 초왕이 상대하기 쉬운 자는 아니어도 이유도 없이 어린 계집에게 손을 쓸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추후에 생긴 일들은 그의 예상을 벗어난 일이었다.

백장간은 묵묵히 길을 걸었다. 위수로 가고 싶었다. 위수로 가면 그녀와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가능하다면 강을 건너 그녀를 만나 보고 싶었다.

사실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초왕이 그녀를 끔찍이 아낀다고는 하지만, 두 눈으로 직접 봐야만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꼭 봐야만 했다. 그녀가 정말 잘 지내고 있다면 그도 이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으리라.

* * *

남쪽에도 곧 소식이 전해졌다. 태자는 곧장 초왕을 찾았다.

“큰형님이 움직일 조짐을 보이는구나. 우리도 대응해야 한다.”

초왕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큰형님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시는 분입니다. 병력을 이동했더라도 출병 명령은 내리지 못하실 겁니다. 좀 더 지켜보시지요.”

그러나 태자의 불안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저쪽에서 병력을 옮겼으니 우리 쪽도 시늉은 해야 할 것 아니냐?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겁에 질린 줄 알 것이다.”

“이천행의 무리를 서북으로 보냈지만, 정말 전쟁을 치르게 되어도 병력은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초왕이 태연하게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들이 전쟁을 일으켜도 우리를 쉽게 이기진 못합니다.”

태자는 며칠 간격으로 그에게 잔소리를 퍼부었지만, 며칠이 지나도 북쪽에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평온해 보일 지경이었다. 초왕의 예측대로였다.

황제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원래도 전쟁을 싫어했던 데다 어진 군주라는 평에 목을 매고 있었다. 그가 전쟁을 선포한다면 민심은 자연 흔들릴 터였다. 거듭 고민하던 황제는 여전히 출전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

다만 국사의 말이 그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혔다. 백 귀비도 자꾸만 전쟁을 권하니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그가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가운데 어느덧 시월에 접어들었다.

세자는 사월 생이었다. 시월이 되었으니 태어난 지 꼭 반년이 되었다. 초왕비의 소원대로 세자는 정말 바람만 맞아도 크는 풀처럼 쑥쑥 자라났다. 이젠 직접 요람을 붙잡고 몸을 일으키기까지 했다.

그뿐만 아니라 월규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요람 밖으로 나오려 버둥대다가 몸이 밖으로 반쯤 나왔을 때 발견되기도 했다. 그 광경을 목격한 월규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줄 알았다. 그녀는 재빨리 세자를 안고 요람에 눕혔다.

나중에 백천범에게 알려 주었더니 그녀는 놀라기는커녕 오히려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아드님은 대단하기도 하지. 다른 집 애들은 한 살이 되어야 일어선다던데, 우리 아들은 반년 만에 걷고 싶어 하잖아. 월규 너도 그리 막지 마. 이젠 많이 커서 안고 있기도 힘드니깐 일찌감치 걷는 게 나아.”

월규는 그저 혀를 내둘렀다. 욕심이 커도 너무 컸다. 육 개월밖에 되지 않은 아이더러 걸으라니, 아직 뼈도 온전치 않을 텐데 말이다.

때마침 기홍이 타락죽을 가지고 들어왔다. 기홍을 발견한 세자가 요람 안에서 손발을 버둥거리며 즐거워했다. 그 모습에 백천범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누가 내 아들 아니랄까 봐. 맛있는 것만 보면 눈이 반짝거리는 게 나랑 똑 닮았네.”

월규가 그녀를 놀리며 말했다.

“정말 마마를 닮은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왕야께서는 어릴 적에도 이러시지 않으셨을 겁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