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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424)화 (423/1,192)

제424화

북쪽 경계에서 대승을 거두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황제의 용안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경사가 있으면 자연히 어깨가 으쓱해지는 법이었다. 그는 벽복전에 연회를 열어 장수들을 초대했다. 단연 오늘의 주인공은 새로운 군신 백장간이었다.

백씨 집안의 아들딸들은 다들 외모가 훌륭했다. 황제와 나란히 앉아 있는 백 귀비는 절세미인이었고, 왼쪽 상석에 앉은 효기대장군 백장간은 짙은 눈매를 가진 뛰어난 미남이었다.

황제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백 장군은 올해 나이가 어찌 되는가?”

백장간이 자리에서 일어나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위로 올리며 공손히 답했다.

“신, 올해 스물다섯이옵니다.”

황제가 재차 물었다.

“혼인은 하였는가?”

백장간은 흠칫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옆에 있던 백 승상이 서둘러 고했다.

“폐하께서 우식에게 관심을 가져 주시니 황송함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제 우식은 몇 년간 먼 군영에 있느라 신도 신경을 쓰지 못하였습니다. 하여 다소 늦어진 감이 있습니다. 이제 돌아왔으니 곧 큰일을 정해 보고자 신도 며칠 동안 고민하고…….”

황제가 점점 길어지는 말을 끊었다.

“그리 하다면 짐이 생각해 둔 사람이 있는데, 백 승상은 어찌 생각하는가?”

황제는 늘 중매를 서곤 했다. 초왕에게도 여러 차례나 혼삿길을 열어 주려던 그였다.

“공왕부恭王府의 군주일세. 짐의 종매從妹(사촌 여동생)지. 사리에 밝고 문무에 능하니, 장군과도 아주 잘 어울릴 걸세.”

백 승상은 곧장 몸을 굽히고 절을 올렸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그러면서 멀뚱히 서 있는 백장간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감사 인사를 올리라는 의미였다.

정신을 차린 백장간이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하지만 군주께오선 워낙 귀하신 분이라 신이 감히 올려다보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바로 거절을 할 줄이야. 황제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불쾌함이 밀려왔으나, 황제는 다시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마음에 둔 여인이 있는데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하면 짐도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도록 힘을 실어 주겠네.”

백장간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평생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리라. 설령 그녀가 시집을 가지 않았다 한들, 그는 그녀와 혼인할 수 없는 신분이 아닌가. 그저 그녀의 큰 오라버니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화들짝 놀란 백 승상이 서둘러 상황을 수습했다.

“폐하, 부디 노여워 마시옵소서. 제 우식이 경솔하였습니다. 폐하의 은혜에 신과 우식은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신이 확인해 본 뒤에 폐하께 말씀을 올릴 테니, 부디 그때 결정해 주시옵소서.”

황제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군의 성격이 진실하구나. 직언을 하는 모습이 아주 마음에 든다네. 이 일은 나중에 논의하도록 하지.”

백장간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앉자 백 승상이 조용히 물었다.

“정말 마음에 둔 여인이라도 있는 것이냐?”

백장간이 희미하게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한데 어째서 그리 대답한 것이야?”

백 승상이 날카롭게 물었다.

“공친왕가의 군주가 성에 차지 않는 것이냐?”

백장간이 담담히 말했다.

“제가 올려다볼 수 없는 분입니다.”

그의 말투는 묘한 거리감을 두고 있었다. 그는 백 승상을 아버지가 아니라 동료처럼 대하는 듯했다. 순간 생각에 잠긴 백 승상은 제 아들이 더는 예전의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예전의 백장간은 늘 고분고분했다. 성격도 내향적이고 나약한 편이었다. 이씨 부인이 둘째 부인을 괴롭혀도 말 한마디 못하곤 했다. 어릴 적부터 시를 읊거나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서 조금 더 크면 관직 하나를 구해 주리라 마음을 먹고 있었다.

관직을 맡아 천천히 실력을 키우고, 그가 뒤를 봐주면 높은 관직에 오를뿐더러 부귀영화를 누리며 부족함 없이 살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백장간은 별안간 입대를 선언했다. 이 일로 부자지간에 적잖은 언쟁이 오갔다. 그렇게 말을 잘 듣던 아들이, 그 문제만큼은 강경하게 나왔다. 결국 아들의 고집을 꺾지 못한 그는 백장간을 군대에 보내고 말았다.

그렇게 집을 떠나 오 년 만에 집에 돌아온 아들은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다. 가냘팠던 몸은 우람해졌고, 얼굴에는 당당한 기상이 넘쳐흘렀다. 행동 하나하나에 위엄이 가득했다.

이제 아들은 자신의 손아귀를 완전히 빠져나가고 말았다. 백 승상은 아들이 마음을 먹으면 언제든 자신과 맞설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위안이 되는 한편, 알 수 없는 불안함이 엄습했다.

연회가 끝난 뒤, 부자는 집으로 돌아왔다. 둘째 부인은 황제가 백장간과 공왕의 군주를 맺어 주었다는 소리에 크게 기뻐했지만, 이후의 일을 듣고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녀가 이런저런 일들을 캐물었지만, 백장간은 묵묵히 자리를 떴다. 이씨 부인이 차가운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대장군이 되더니 어미는 신경도 안 쓰는구나.”

둘째 부인이 아들을 감쌌다.

“형님, 그리 책망하지 마시어요. 피곤해서 저럴 겁니다. 어제 고향에 돌아왔는데 궁에도 다녀오고 동무들이 끊임없이 찾아오니 쉴 틈이…….”

“하,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는가?”

이씨 부인이 눈을 희번덕거렸다. 백 귀비가 총애를 받을수록 그녀도 거만해졌다. 더욱이 그녀가 불당에 갇혀 지낼 때, 둘째 부인이 그녀의 권력을 빼앗아 간 일로 화가 단단히 나 있었다. 그녀는 틈만 나면 둘째 부인을 밟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아들이 대장군까지 되었으니 이씨 부인도 더는 자신을 업신여기지 않으리라 생각했건만. 아직도 저를 하녀 보듯 대하니 둘째 부인은 속으로 발끈했다. 그러나 백 승상이 옆에 있으니 함부로 소란을 피울 수도 없었다.

백장간의 걸음은 자신의 방이 아닌 후원으로 향했다. 좁고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걷던 그는 조용한 모퉁이에 멈춰 섰다. 그곳에는 따로 떨어진 방 하나가 있었다. 백천범이 묵던 곳이었다. 지금은 잡동사니를 쌓아 두는 창고로 변해 있었다. 평소 오는 사람이 없는지 창틀에는 먼지가 희뿌옇게 쌓여 있었다.

그는 미동도 하지 않고 방을 바라보았다. 지금이라도 문이 벌컥 열리고 마른 계집아이가 뛰어나올 것만 같았다. 활짝 웃으며 무어라 말할지도 귓가에 훤했다.

“큰오빠, 돌아오셨군요!”

그리곤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며 자랑하겠지.

“제가 직접 빗은 거예요. 예뻐요?”

삐뚤삐뚤 빗어 묶은 머리는 그녀가 움직이는 대로 요동을 칠 테고, 그 모습에 그도 웃음을 터뜨릴 것이다.

“그래, 예쁘구나. 이제 머리도 혼자 빗을 줄 알고, 우리 천범이 정말 대단한걸.”

“그래도 큰오빠가 빗겨 주는 게 더 좋아요.”

그녀는 큰 눈을 깜빡이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사실 그가 어찌 머리를 빗을 줄 알았겠는가. 자신의 머리도 시녀들이 빗겨 주는 판국에. 다만 매일같이 그녀의 머리를 빗겨 주다 보니 점점 능숙해졌다. 백천범의 머리를 양 갈래로 높이 말아 올리면 그도 흡족한 마음이 들었다.

활짝 웃던 아이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졌다. 어느새 아이는 그의 다리를 붙들고 울기 시작했다.

“큰오빠, 가지 말아요. 절 두고 가지 말아요…….”

그녀는 눈물을 펑펑 쏟으며 흐느꼈다.

“큰오빠, 저도 데려가 줘요.”

물론 그도 함께 가고 싶었다. 하지만 저택 밖의 생활에 확신이 없었다. 더욱이 그는 독립이 아니라, 입대하는 것이 아닌가. 비록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고 해도, 그녀에겐 저택이 더 나으리라 믿었다.

어렸을 때부터 이곳에서 자랐으니 어찌 됐건 이곳에서 사는 게 그녀에게도 좋지 않겠는가. 스스로 음식을 찾아 먹거나 위험을 피하는 방법도 알고 있으니 그가 돌아오는 그 날까지 그녀는 버틸 수 있으리라.

“천범아, 착하지. 이 오라버니 말 잘 들어.”

그 말을 하는 그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얌전히 잘 지내고 있어야 해. 조심하고. 오라버니가 금방 데리러 올게.”

그녀는 그를 잡고 연신 고개를 저었다.

“저도 데리고 가요. 성가시지 않게 말 잘 들을게요. 제가 빨래도 하고 밥도 할게요. 그러니 두고 가지 말아요…….”

그는 그녀를 안고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그는 백씨 가문의 장자였다. 아버지와 어머니, 여동생도 있었지만, 그가 따뜻하게 대하는 사람은 오직 그녀뿐이었다. 쓸쓸하고 답답한 그의 마음을 달래 주는 사람은 그녀가 유일했다.

그가 흐느끼자 백천범이 울음을 그쳤다. 그녀가 자그마한 손으로 그의 눈물을 닦아 주며 다정한 위로를 건넸다.

“큰오빠, 울지 말아요. 천범이가 말 잘 들을게요. 얌전히 지내면서 큰오빠가 올 때까지 기다릴게요.”

“이 오라버니도 약속 지킬게. 꼭 돌아올게, 꼭.”

품에 안겨드는 몸이 어찌나 자그맣던지, 그는 목이 메는 듯했다. 그러나 그녀를 생각한다면, 반드시 떠나야 했다. 그는 용감해져야 했고, 강해져야 했다. 그녀를 진정으로 보호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만 했다.

그가 강해져야만 그녀를 고통 속에서 구해 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과정이 오 년이나 걸릴 줄 누가 알았을까. 그리고 그녀는 그가 돌아오는 걸 기다리지 못했다…….

* * *

술을 제법 마신 황제는 나무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삵을 품에 안은 백 귀비가 조용히 황제의 안색을 살폈다.

“폐하, 정말 공친왕의 군주를 제 오라버니와 맺어 주실 생각이십니까?”

황제는 찻잔에 담긴 차를 빤히 바라보며 가볍게 흔들었다.

“귀비에게 달리 좋은 생각이라도 있소?”

백 귀비가 아리따운 미소를 머금었다.

“신첩이 어찌 다른 생각이 있겠습니까? 다만 큰 오라버니가 워낙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보는 눈도 많은데 폐하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습니까? 신첩의 생각에는 폐하께서 괜히 마음 쓰지 않으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황제가 아랑곳하지 않고 대꾸했다.

“귀비는 찬성하지 않는가 보구려. 설마 백 장군의 관직 생활이 순탄치 않길 바라는 것이오?”

백 귀비는 옆에 있던 궁녀에게 삵을 넘기고 황제의 옆에 앉아 다정히 말했다.

“신첩은 이미 혼인한 딸인데 무엇 하러 그런 일에 마음을 쓰겠습니까? 신첩은 폐하의 사람이니 오직 폐하께만 신경을 쓴답니다. 누군가 폐하를 불쾌하게 한다면 신첩도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황제가 박장대소를 터뜨리더니 그녀의 손을 토닥였다.

“귀비가 그렇게까지 짐을 생각해 주다니, 참 고맙구려.”

두 사람이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는데, 궁녀가 안으로 들어와 고했다.

“폐하, 국사國師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황제가 곧바로 답했다.

“어서 들라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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