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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423)화 (422/1,192)

제423화

임안성, 백 승상의 저택 앞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문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은 각양각색의 표정으로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어떤 이는 더 없이 감격스러워했고, 다른 이는 코웃음을 쳤으며 또 다른 이들은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몇몇 백성들이 길 양편을 바라보며 속닥거렸다.

“승상 어르신도 참 대단하시다니까. 귀비 마마도 폐하의 총애를 독차지해서 곧 황후의 자리에 오를 텐데, 이번엔 아들이 효기대장군이 되었잖아. 백씨 가문 조상들은 얼마나 기쁠까.”

“누가 아니래. 황제 폐하께서 직접 군신으로 봉하셨다며. 두 군신이 전부 백 승상 저택을 찾는구먼.”

“그게 무슨 말인가?”

누군가 불쑥 물었다.

“예전 군신은 초왕야가 아니었나? 지금은 남쪽에서 태자 전하를 보필한다던데, 어찌 또 백 승상과 엮는 것인가?”

“기억 안 나는가? 재작년 봄에 말일세. 백 승상 댁 다섯째 아가씨와 혼사를 치른 초왕이 엄청난 병력을 이끌고 이곳을 찾지 않으셨나.”

“오, 생각났네. 그런 일이 있었지. 한데 다섯째 아가씨는 도망갔다고 하지 않았는가?”

“찾았다더군. 초왕야께서 부인을 목숨처럼 아끼니, 애처가라고 소문이 자자하네. 그 부인이 바로 백 승상 댁 다섯째 아가씨란 말일세. 듣자니 세자 아기씨까지 낳으셨다는구먼. 부부가 정이 아주 깊다고 해.”

그들이 대화에 심취해 있는 사이, 길 저편에서 오던 행렬이 눈앞을 지나갔다. 그들은 서둘러 목을 빼고 행렬을 내다보았다.

“누가 군신 대장군이라는 거야. 잘 안 보이네.”

“가운데 저분이겠지. 아주 영민하게 생기셨잖아.”

누군가 말했다.

“백 승상 댁 도련님은 본 적이 있지. 그땐 서생처럼 보였는데 몇 해 못 봤다고 이젠 못 알아볼 지경이구먼.”

백장간은 말고삐를 잡아끌고 곧장 백 승상의 저택을 향했다. 그는 내내 앞만 보고 있었지만, 여기저기서 떠드는 말들은 메아리처럼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 초왕이 부인을 목숨처럼 아낀다는 말, 그 부인이 다섯째 아가씨라는 말, 세자 아기씨까지 낳은 부부의 정이 아주 깊다는 말까지.

시간이 참 빨랐다. 벌써 어머니가 되다니……. 그의 눈앞에 자그마한 얼굴이 떠올랐다. 까맣고 큰 눈이 늘 겁에 질려 있던 그녀였다. 유일하게 그가 있을 때만, 입을 활짝 벌리고 웃곤 했다. 신이 난 얼굴로 그의 주변을 맴돌며 연신 큰오빠라고 불렀었는데.

“큰오빠, 뭐 맛있는 거 갖고 왔어요?”

“큰오빠, 이거 저 주는 거예요? 정말 예뻐요!”

“큰오빠, 이건 감람이에요. 유모가 만들어 줬어요. 맛있어서 오빠 주려고 세 알 남겼어요.”

“큰오빠, 오디 좀 먹어 봐요. 후원에 있는 나무에서 딴 거예요. 이젠 나무를 아주 잘 타거든요. 아무한테도 안 들켰어요.”

“큰오빠…….”

* * *

“오십니다, 오십니다!”

백 승상의 저택 관리인이 긴 행차를 바라보며 환호성을 질렀다.

“승상 어르신, 도련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어서, 폭죽을 터뜨리지 않고!”

백여름이 기쁨에 젖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폭죽을 준비해 둔 하인들은 손에 기다란 향을 들고 있었다. 백 승상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하인들은 곧장 허리를 숙이고 심지에 불을 붙였다.

타닥, 타닥! 폭죽은 귀가 먹먹해질 만큼 커다란 굉음을 내며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멀찍이서 바라보던 한 아이는 귀를 막고 발을 동동 구르며 신나게 소리를 질렀다.

백장간은 말에서 내리자마자 백여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들 장간, 아버지께 인사 올립니다. 다섯 해나 두 분을 모시지 못하였으니, 이 불효막심한 아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어서 일어나거라.”

서둘러 아들을 부축한 백여름이 활짝 웃는 얼굴로 말했다.

“사내는 본디 넓은 세상에 뜻을 두는 법이지. 네가 여러 차례 공을 세우고 폐하께 군신이라는 칭호를 받았으니 그것으로 효를 다하였다. 자, 어머니에게도 인사하거라.”

감격스러워하는 백 승상에 비해 백장간은 제법 무덤덤해 보였다. 그가 이씨 부인에게 똑같이 무릎을 꿇으며 인사했다.

“아들, 어머니를 뵈옵니다.”

이씨 부인도 담담한 얼굴로 대꾸했다.

“돌아왔으니 되었다.”

백씨 집안이 처음으로 배출한 대장군이다. 게다가 황제가 직접 군신이라는 칭호를 내려 주었으니 이보다 더한 영광이 어디 있을까. 백여름은 잔뜩 흥분한 기색으로 백장간을 방으로 데려갔다.

“가자. 오랫만에 집에 돌아왔으니 천천히 담소를 나누자꾸나.”

두 사람이 먼저 들어가자 뒤따르던 이들도 그들을 따랐다. 가장 뒤에 서 있던 이씨 부인이 시녀 홍련에게 물었다.

“둘째 도련님은?”

홍련이 조용히 아뢰었다.

“둘째 도련님은 어젯밤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아직 이홍원怡紅院에 계신 듯합니다.”

“이런 못난 놈!”

이씨 부인이 낮게 이를 갈았다.

“또 아버지께 한바탕 욕을 들으려고! 사람을 보내 어서 데려오거라. 식사 때도 나타나지 않으면 정말 경을 칠 것이다.”

홍련은 서둘러 대답을 올린 뒤, 하인을 이홍원으로 보냈다.

이씨 부인은 앞에서 걷고 있는 둘째 부인을 향해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아들이 돌아왔다고 면이 조금 섰는지, 존비마저 잊어버린 모양이다. 감히 그녀보다 앞서 걷다니. 대장군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어차피 귀비 앞에선 무릎을 꿇어야 하지 않는가?

제 아들이 아무리 능력이 있다 해도 귀비를 이길 수 있을 줄 알고? 눈에 거슬리면 귀비에게 말하면 그만이다. 대장군이라 해도 목숨을 해하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다.

무심코 고개를 돌린 그녀는 무리 속에 섞인 백강릉白江綾을 발견하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제 오라비가 대장군이 되었단 소식에 구경하러 왔단 말인가? 시집갈 때 해 간 혼수로 체면을 구겼으니, 이제 오라비에게 고자질이라도 하려고?

그녀는 속으로 둘째 부인과 그녀의 아들딸에게 욕을 퍼부었다. 백 승상에게 시집을 왔을 때, 일 년이 지나도록 이씨 부인은 아기를 갖지 못했다. 결국 백여름은 이 구실로 첩을 들이려 했고, 두 사람은 크게 다투었다. 그러나 끝내 그녀도 첩을 들이는 데 동의했다.

당시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원인이 백여름에게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웬걸, 둘째 부인이 들어오자마자 곧장 아이를 가지는 게 아닌가. 둘째 부인은 맏아들 백장간을 낳고 이듬해에 맏딸 백강릉을 낳았다. 아들딸을 두루 갖춘 둘째 부인을 볼 때마다 그녀는 피를 토하는 심정이었다.

그녀도 고군분투한 끝에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낳았다. 둘째 딸이 바로 황제 폐하의 귀비가 된 백강벽이었다. 황후가 죽은 지 이 년이 다 되어가니 조만간 귀비가 황후의 자리에 오를 터였다. 백씨 집안에서 황후가 나온다면 대장군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가문의 영광이었다.

한참 둘째 부인과 그녀의 자식들에게 욕을 퍼붓던 그녀는 어느새 백천범에게까지 욕을 퍼부었다.

‘그 망할 년. 죽지도 않고 초왕에게 아들을 낳아 줬겠다!’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손에 들고 있던 염주를 떨어뜨릴 뻔했다. 그 망할 계집 때문에 그녀는 불당에서 반년이나 갇혀 지냈고, 안채의 권한은 전부 둘째 부인에게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아니, 이런 건 큰일도 아니었다.

그 천한 계집 때문에 동생 이강이 죽고, 늙은 아버지가 파면되어 처가 식구들이 고향 땅으로 내려가 버린 사실이 가장 원망스러웠다. 그녀의 마음에는 피맺힌 원한이 서렸고, 그 대상은 자연히 백천범이 되었다.

지금은 나라가 나뉘었으니 이번 생에 그 천한 계집을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몰랐다.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건만, 출산 소식을 듣고 나니 그녀는 온몸을 두들겨 맞은 듯했다. 백천범이 편히 지낸다는 사실이 그녀의 몸과 마음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녀는 전쟁이 다시 일어나지 않는 게 한스러울 뿐이었다. 백장간이 군신이 되었으니 군대를 이끌고 강을 건너 초왕과 맞붙으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가장 좋은 상황은 반역 무리를 전멸시키는 일이 아니겠는가. 초왕과 백천범이 난도질을 당하며 죽는다면 그녀는 더 바랄 게 없을 터였다.

정방으로 들어가니 백장간이 백여름에게 차를 따라 주고 있었다. 부모에게 공경의 의미를 담아 올리는 차였다. 첫 잔은 백여름에게, 두 번째 잔은 이씨 부인에게 올리면 된다. 여기까지만 해도 되련만, 백장간은 몸을 돌려 자신의 차를 첩이자 그녀의 친모인 둘째 부인에게 건넸다. 이제 다 컸으니 친모에게도 효를 다할 수 있었다.

이씨 부인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지만, 그녀는 꾹 참고 인내했다. 둘째 부인은 깜짝 놀란 기색이었다. 설마 아들이 이씨 부인 앞에서 첩인 자신의 체면을 살려 줄 줄은 예상치 못한 듯했다. 그녀는 눈물을 머금었지만 차마 찻잔을 받아들지 못하고 망설였다. 참다못한 백여름이 입을 열었다.

“어찌 그리 멍하니 있소. 아들이 공경을 담아 차를 권하는데, 어서 받으시오.”

둘째 부인은 그제야 차를 받아들었다. 두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두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백여름이 웃으며 말했다.

“좋은 날에 어찌 눈물을 보이는 것이오. 아들이 이리 잘되었는데 응당 기뻐해야지.”

그가 말끝마다 첩에게 아들이라고 칭하니, 이씨 부인의 속이 편할 리가 없었다. 이씨 부인은 불쾌한 마음을 담아 묵직한 헛기침을 내뱉었다. 규율대로라면 백장간이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그녀뿐이었다. 둘째 부인은 첩이니 아무리 친모라 하더라도 서모나 작은어머니라고 불러야 마땅했다.

이씨 부인의 기침 소리에 백여름이 그녀를 흘겨보았다.

“장전長典이는?”

이씨 부인이 마지못해 운을 떼었다.

“관청에 있을 겁니다. 벌써 하인을 보내두었습니다.”

백여름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관청? 관청이 아니라 기방에 있겠지. 큰형이 오는 걸 알면서 돌아올 생각도 않다니, 이런 쓸모없는 놈 같으니라고! 가서 똑똑히 전하시오. 식사 전에 들어오지 않으면 영원히 이 집안 문턱에 발 디딜 생각하지 말라고!”

이씨 부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딸이 그녀의 체면을 살려 주면, 아들이 그 체면을 내동댕이치곤 했다. 그녀조차도 못 봐줄 꼴이니 차마 반박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저 조용히 울분을 삼켰다.

묵묵히 지켜보던 백장간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오 년 전과 전혀 달라진 게 없었다. 그 시간 동안 이들은 조금도 변하지 않고 한자리에 멈춘 듯했다.

그는 원래 공을 세운 뒤, 따로 저택을 지을 생각이었다. 새로운 저택에서 어머니와 그녀를 데리고 있을 수 있다면, 얼마나 평온할까.

오늘날에 이르러서야 황제가 친히 저택을 상으로 내렸다. 마침내 그의 꿈이 이뤄진 순간이었다. 이제 그의 어머니는 이씨 부인에게 업신여김을 받지 않아도 될 터였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그녀가… 이미 떠난 뒤였다.

그녀가 혼인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홀로 산에 올라 밤새 술을 마셨다. 그녀를 찾아갈 수 없으니 속상할 따름이었다. 얼마 후 그녀가 도망쳤다는 소식에 그는 애를 태워야만 했다. 군의 업무가 그의 발목에 족쇄처럼 채워져 있으니, 직접 찾으러 가지도 못했다.

그래도 그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었다. 살아 있다면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이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막상 돌아오니, 너무나 늦어 있었다. 나라는 두 개로 갈라졌고 그들은 서로 반대편에 있으니…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긴 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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