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422)화 (421/1,192)

제422화

기홍이 서둘러 부엌으로 향했다.

“아이고, 그게 무슨 말이야. 빼앗아 먹었다니. 저택에 다른 아기가 있는 것도 아닌데……. 설령 있다고 해도 세자 아기씨 걸 누가 빼앗아 먹을 수 있겠어.”

기홍을 뒤따르던 월규는 얼굴이 새빨개질 만큼 웃고 있었다.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그리하셨겠습니까?”

기홍은 그제야 상황을 이해하고 얼굴을 붉혔다.

“어휴, 왕야도 참.”

기홍은 서둘러 미음을 만들면서 신신당부했다.

“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선 안 돼. 왕야의 명예에 누를 끼치는 거라고.”

“제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월규가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녹하 언니한테도 말 안 할 생각입니다. 언니한테만 얘기하고 입 꽉 닫겠습니다. 왕야께서 방 안에 누가 있냐고 물으셨는데 대꾸를 할 수 있어야지요. 방을 기어가다시피 해서 도망쳐 나왔다니까요. 무서워 죽을 뻔했습니다.”

기홍이 키득이며 말했다.

“왕비 마마 곁에서 다른 건 안 배우고, 잔꾀 하나는 잘 배웠네. 그보다 가을이 되면 함께 금릉에 가야 하는데, 위 의원이랑은 어떻게 되고 있는 거야?”

월규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어느새 그녀의 얼굴에 서글픈 기색이 어렸다. 다들 그녀의 마음을 훤히 꿰뚫고 있었지만, 위중청 그자만 모르는 듯했다.

직설적으로 말할 수도 없었던 월규는 짬이 날 때마다 그를 찾아가 약초 말리는 일을 도와주었다. 이따금 어린 세자를 핑계로 이것저것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위중청은 늘 웃는 얼굴로 그녀를 대했다. 그녀가 도와줄 땐 흡족해하며 허물없이 대하기도 했다. 조언을 구할 때면 성심성의껏 알려 주었고, 종종 다른 이야기도 나누었다.

다른 이들 눈에는 화기애애한 두 사람이었지만, 정작 월규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얇디얇지만 뚫리지 않는 창호지가 그와 그녀 사이에 한 겹 놓인 것만 같았다.

다음 달이면 금릉에 가야 했다. 새로 지은 초왕의 저택은 규모가 어마어마하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왕비는 혼인한 뒤에도 저택에서 살 수 있게끔 처소 하나를 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 얼마나 좋은 조건인가! 처소 문만 닫으면 온전한 가정이 꾸려지니, 얼마나 안락한 삶일까. 한데 정작 위중청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월규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어, 월규는 답답할 따름이었다.

* * *

등을 지고 누운 묵용감은 귀를 쫑긋 세우고 세자가 칭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듣고 있다 보니 조금 성가셨다. 그가 모르는 사이에 연극이라도 배웠는지, 칭얼거림이 끝날 줄을 몰랐다. 백천범은 허둥거리고만 있었기에, 결국 그가 몸을 일으켜 앉았다.

“내가 안겠소.”

평소엔 얌전히 안기던 세자는 끊임없이 손을 버둥거리며 불만을 표했다. 기운차게 팔딱대는 물고기를 안은 것처럼 진땀을 빼던 백천범은 묵용감의 말에 반색하며 세자를 넘겨주었다.

묵용감의 품에 안긴 순간, 세자는 더더욱 목청을 높여 울었다. 통통한 팔을 위로 뻗으며 세차게 휘두르기까지 했다.

그때, ‘짝!’하고 맑고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

백천범이 웃으며 수습에 나섰다.

“친근한 걸 표현한 거예요.”

“내가 볼 땐 보복을 한 것이오.”

묵용감이 코웃음을 치더니 팔을 뻗어 세자와 거리를 두었다. 세자는 짧은 팔을 휘두르며 그를 때리려고 했지만, 손이 닿을 리가 없었다. 새하얀 얼굴을 찡그리는 세자를 보며 묵용감이 기세등등하게 웃었다.

“때릴 수 있으면 어디 때려 보거라!”

백천범이 따끔하게 경고했다.

“아들을 그렇게 놀리면 재미있으세요? 전생에 린아랑 원수지간이셨어요?”

“전생에 원수였는지는 잘 모르겠소.”

묵용감이 뾰로통한 아들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이번 생에는 원수가 틀림없을 것이오. 내 부인을 빼앗지 않았소.”

백천범은 애교스럽게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우리는 평생을 함께 지낼 텐데 그런 걸로 아들을 질투하시는 거예요? 지금이야 린아가 제 곁에 붙어 있지만, 금방 커서 훌쩍 떠나 버릴 텐데요. 그러니 이 시간들을 소중히 여겨야 해요. 왕야도 지금을 소중히 여기셔요.”

그랬다. 그 또한 지금이 소중한 나날들이었다. 지금은 아이가 이렇게 작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훌쩍 커 버릴 테고, 홀연히 곁을 떠나겠지. 누구든 그렇지 않겠는가. 게다가 린아는 생김새마저 그와 판박이였다.

몸 안에 그의 피가 흐르고 있는데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가 살아온 길을 아이에게 대물려 주지 않으려면 서로를 끔찍이 아끼고 사랑해야 했다.

돌이켜보면 스무 해 넘는 시간을 헛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권력과 부, 명예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지금의 행복과 견주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좇은 셈이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백천범의 입술에 입을 맞춘 뒤, 세자에게도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세자는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고개를 틀며 거부했다. 묵용감은 꿋꿋하게 세자의 입에 입을 맞추고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트렸다.

* * *

팔월 초팔일은 예부터 정해진 길일이었다. 태자는 그날 즉위식을 올리고 정식으로 남쪽의 군주가 될 예정이었다. 그만큼 금릉의 궁 건설도 박차를 가해야 했다. 늦어도 칠월 말까지는 완공해야 길일에 맞출 수 있었다. 즉위식과 중추가 가까우니, 새 궁에서 문무대신들과 즐거운 연회를 열 수 있을 터였다.

안타깝게도 무더운 날씨 탓에 궁에 불이 나 버렸다. 그 바람에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편전이 타 버리고 말았다. 복구를 하려면 시일이 걸릴 테니 시간을 맞추기가 빠듯해 보였다.

태자는 어진 군주였다. 부상자가 있는지만 확인했을 뿐, 별다른 책망 없이 넘어갔다. 그러나 징조가 좋지 않은 건 사실이니, 그도 조금은 시무룩한 기색이었다.

묵용감은 그를 위로하는 수밖에 없었다.

“호사다마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들도 앞으로는 조심할 겁니다. 부디 마음 놓으십시오. 요즘 제가 바쁘지 않으니 금릉에 자주 찾아가 감독하겠습니다. 그리하면 올해 안에 처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태자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네가 처리하겠다면 마음이 놓이지. 괜스레 셋째 네게 짐을 지웠구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는 형제입니다. 무엇보다 형님의 즉위를 서두르는 건 백성들을 위한 일입니다. 이 아우는 기쁠 따름이지요.”

태자가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네게 군주를 맡길 걸 그랬구나. 군주를 내게 떠넘기고 너는 편히 지내고 있지 않느냐? 처와 아들까지 얻었으니 부족할 게 없지.”

백천범과 세자 이야기에 묵용감은 곧바로 웃음꽃을 피웠다.

“전 큰 뜻이 없습니다. 부인과 아이를 지켜줄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 형님께서는 큰일을 하실 분입니다. 형님이 아니라면 누가 그 자리에 앉을 수 있겠습니까?”

태자가 웃으며 그를 놀렸다.

“내가 보기엔 초왕비야말로 큰일을 할 사람이다. 살기가 넘치는 군신을 이리도 온순한 초왕으로 만들어 놓지 않았느냐? 아주 혁혁한 공을 세웠어.”

묵용감이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형님, 저를 비웃으시는 것이지요? 사실은 무척 즐겁습니다. 부인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아이를 놀리다 보면 시간이 금세 흘러가 버립니다.”

“만족을 알면 즐겁다는 말은 너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구나.”

웃음 짓던 태자가 화제를 돌렸다.

“북쪽에 새로운 군신이 생겼다더구나. 들어보았느냐?”

“듣긴 했습니다.”

묵용감이 태연히 대꾸했다.

“큰형님은 늘 모범이 될 만한 인물을 두고 싶어 하시니까요. 군신이라는 제 칭호도 큰 형님이 지어주지 않았습니까.”

태자가 묵용감을 빤히 응시하다 물었다.

“누구인지도 아느냐?”

“누구입니까?”

“백장간.”

묵용감이 곧장 미간을 찌푸렸다.

“백 승상의 장자를 말씀하십니까?”

태자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산서 군영에서 참령을 맡았었지. 그간 조금씩 두각을 드러내더니 군의 새로운 권력자가 된 모양이더구나. 또 제 아비의 추천도 있었겠지. 지금은 효기대장군이 되었다.”

태자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드리웠다.

“백여름도 참 대단하구나. 본인은 승상, 딸 하나는 북쪽의 귀비, 다른 딸은 남쪽의 초왕비, 이제는 아들이 효기대장군에 오르지 않았느냐. 이 정도 권세라면 당시 황보 대학사와도 견줄 만하겠구나.”

잠시 침묵하던 묵용감이 입을 열었다.

“군주가 바뀌면 신하도 바뀌는 법입니다. 누군가는 영광을 누리지만, 누군가는 가문이 몰락할 만큼 고통을 맞이해야 하지 않습니까. 늘 있었던 일이니 그리 놀랄 것도 없지요.”

태자가 망설이다 입을 뗐다.

“주아를 누각에만 머물게 한 지도 꽤 시일이 흘렀으니 느낀 바가 많을 것이다. 혹…….”

묵용감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주아에 대한 일을 어찌 제게 물으십니까? 형님께서 도맡으시던 일이 아닙니까?”

태자가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어쩔 수 없이 그리 한 것이다. 어쨌든 함께 자란 정이 있는데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느냐? 지난번에 말했듯 금릉에 가면 그 애에게 혼사를 정해 주려 한다. 네가 그리 불편해하니.”

묵용감이 고개를 저었다.

“불편한 게 아닙니다. 저도 잘 대해 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제게 실망만 안겨 주지 않았습니까. 감히 그런 수작을 부리다니요! 왕비가 성격이 좋아 망정이지요. 다른 이였다면 그 자리에서 얼굴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을 겁니다.”

태자가 속으로 생각했다.

‘왕비가 성격이 좋다니, 그 지경이 되도록 사람을 때려놓고. 부인을 지키느라 초왕도 눈뜬장님이 다 되었구나.’

그는 애써 웃음을 보였다.

“어쨌든 주아가 움직일 수 있는 범위를 좀 더 넓혀 주었다.”

묵용감의 안색에 그늘이 드리웠지만, 태자의 설득이 이어졌다.

“잘못을 저질렀다 한들 바람 정도는 쐴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누각 아래를 정원 삼아 산책을 하라고 일러두었다. 누각에만 틀어박혀 있으면 건강한 사람도 답답함에 병이 날 것이다.”

“그렇게 하시지요.”

결국 묵용감이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태자가 웃으며 그를 배웅했다.

“그래. 아이가 있으니 더 마음이 쓰이겠지. 어서 돌아가 보거라.”

묵용감은 다시금 미소를 지으며 발걸음을 돌렸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태자의 얼굴에서 조금씩 웃음기가 사라져 갔다. 만족을 알고 즐거움을 얻는다 해도,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큰일을 해야 할 황실의 친왕이 평범한 백성처럼 변하지 않았는가. 그의 눈부신 능력이 자질구레한 일들에 가려 점점 빛을 잃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