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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421)화 (420/1,192)

제421화

그녀는 매달 한 번씩 오수진을 방문했다. 월향은 예쁘장한 아들을 낳았고, 양경잠梁景湛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백천범은 두 아이를 형제로 맺어 주고, 묵용린의 작아진 옷을 전부 월향에게 주었다.

월향과 아이에 대한 얘기를 나누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어떤 때는 오수진에서 하루 묵고 싶었지만, 묵용감의 거센 반대에 부딪치곤 했다. 그는 그녀가 오수진에 갈 때마다 공무를 제쳐두고 데려다주었지만, 그곳에 묵게 하진 않았다.

성으로 들어오는 마차를 붉은 석양이 감싸고 있었다. 조금 피곤했던 백천범은 아기를 안고 부드러운 의자에 기대앉았다. 묵용감이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피곤하면 내가 안고 있겠소.”

백천범은 아기를 그에게 넘겼다. 그러나 묵용린이 통통한 팔을 휙 뿌리쳤다. 그에게 안기기 싫다는 의미인 듯했다.

묵용감이 멍하니 아기를 바라보다가 눈을 부릅떴다.

“이런, 보았소? 지금 누구를 뿌리치느냐? 난 네 아비다.”

백천범도 그에게 눈을 부릅떴다.

“뭐 하러 큰소리를 내요. 그러다 놀라겠어요.”

그녀는 다시 세자를 품에 안고 조용히 달래 주었다.

“아버지한테 가기 싫어? 그래, 그럼 가지 말자.”

묵용감은 아들을 끔찍이 아꼈지만, 어떤 때는 정말… 밉기도 했다. 아들은 백천범을 독차지했기 때문이다. 곁에 시녀가 이렇게나 많은데도 이 녀석은 늘 백천범에게만 안기려 했다.

백천범은 아들이 기뻐하면 아무래도 좋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초왕비이자 그의 부인이라는 사실은 까맣게 잊은 것 같았다.

사랑스러운 아들이었지만, 묵용린은 그들의 부부 생활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묵용감은 가슴속에 불길이 치솟아도 해소할 방법이 없었다. 그저 백천범이 눈치채지 못하게 아들을 향해 눈을 부라리는 수밖에. 이렇게나 작은 아이를 어찌할 수도 없으니 그게 최선이었다.

그는 침대 옆에 앉아 백천범을 바라보았다. 품에 안긴 묵용린은 젖을 먹으며 경계심이 담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꼭 나쁜 마음을 품은 사람을 대하는 눈빛이었다. 물론 그가 그리 좋은 마음을 품고 있진 않았다. 꼭 줄을 서서 사탕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그의 눈망울엔 열망이 담겨 있었다.

백천범도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어찌 보면 절로 웃음이 나는 모습이었다. 다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나름의 곤란함이 있으리라. 아이가 태어난 후로 그녀의 마음은 온통 아이에게 쏠려 있었고, 그는 홀대해 왔다.

그녀가 그를 놀리듯이 바라보았다.

“먹고 싶어요?”

묵용감은 얼굴을 붉히며 투덜댔다.

“내가 아이도 아니고, 어찌 먹고 싶겠소.”

젖을 다 먹인 백천범은 아기를 재운 뒤, 월규를 불렀다.

“이 방은 너무 더우니까 네 방에서 재우는 게 좋겠어. 배고파서 깨거든 젖을 먹일 테니 다시 데려와 줘.”

월규는 대답을 올린 후, 요람을 들고 밖으로 향했다. 밖으로 나가기 직전, 슬쩍 초왕의 얼굴을 바라보니 두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어찌나 좋은지 활짝 웃는 그의 모습에 월규는 서둘러 밖으로 나간 뒤, 슬쩍 웃어 보였다.

백천범의 뜻은 아주 명확했다. 오늘 밤은 아이가 아니라 초왕과 함께 보내겠다는 뜻이었다. 묵용감은 과분한 총애에 감지덕지하며 그녀의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피곤하진 않소? 아이가 이만큼 컸으니 손에 무리가 갈 것이오. 늘 그대가 안아주려 하지 마시오. 그러다 팔이 시큰거릴지도 모르오.”

그가 어깨를 주물러 주자 더할 나위 없이 편안했다. 백천범은 눈을 가늘게 뜨고 힘을 쭉 뺐다.

“괜찮아요. 익숙해졌으니까요. 저는 린아가 얼른 더 컸으면 좋겠어요. 아기 땐 바람만 맞아도 쑥쑥 큰다잖아요.”

“바람만 맞아도 쑥쑥 크면 그게 풀이지, 사람이오?”

묵용감이 웃으며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문질렀다. 아이를 낳은 뒤로 그녀에게서 나는 향도 조금 바뀌었다. 예전엔 옅고 그윽한 향기가 났다면, 지금은 우유 향이 진하게 풍겼다. 향이 바뀌든 어떠랴. 그녀에게서 나는 향이라면 그에게는 뭐든지 감미로웠다.

그의 두 손은 어깨에서 미끄러져 내려와 그녀의 치마에 달린 매듭을 풀었다. 어느새 그의 호흡이 조금씩 불안정해졌다.

“천범, 또 어디가 아프오. 내가 주물러 주겠소…….”

백천범은 가슴을 헤집는 그의 손을 바라보며 말했다.

“거긴 안 아픈데 왜 주무르시는 거예요?”

그가 시시덕거리며 웃었다. 그간 수많은 밤을 지새우면서도 그녀에게 입을 맞추지 못했다. 어렵게 맞이한 오늘, 체면 따위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백천범은 그런 그의 모습에 헛웃음만 났다.

“아픈 데를 주물러 주겠다면서, 어찌 이리 아이처럼 구시는 거예요…….”

그는 입을 꾹 다물고 온 정신을 그녀에게 집중했다. 백천범은 그를 조금 더 골려 주고 싶었지만 몸이 점점 녹아내리고 있었다.

얼마 뒤, 그녀는 그의 품에 안겨 숨을 헐떡였다. 땀에 젖은 그녀의 등을 어루만진 그가 귓가에 다정한 입맞춤을 남겼다. 그가 고혹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천범, 기쁘오?”

백천범은 수줍음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가 넌지시 물었다.

“매일 밤 이렇게 보내는 게 어떻겠소?”

퍼뜩 정신이 든 백천범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건 안 되죠. 린아가…….”

그가 곧장 투정을 부렸다.

“온통 린아 생각뿐이질 않소. 내 생각은 하고 있긴 한 것이오? 내가 그대의 지아비란 사실을 잊은 게 아니오?”

“아기는 왕야보다 어리잖아요.”

“동월국에서 왜 자식을 다른 사람 손에서 키우는지 아시오?”

그가 차근차근 이야기하며 그녀를 설득했다.

“자애로운 어머니가 자식을 망칠까 봐 그러오. 늘 아이를 감싸기만 하면 아이에게 좋지 않을 것이오.”

“아직 어린데 아이가 뭘 알겠어요.”

“어리긴 해도 아무것도 모르는 게 아닌 듯하오.”

묵용감이 코웃음을 쳤다.

“꼭 그대에게만 안기려고 하질 않소? 이러다간 응석받이가 될 텐데, 그대가 더 힘들어질까 걱정이오. 차라리 보모를 두는 게 좋겠소.”

보모라는 말에 백천범이 펄쩍 뛰었다.

“아니에요. 아이도 돌보지 않고 종일 한가하게 무얼 하겠어요. 게다가 기홍과 녹하, 월규도 절 도와주잖아요. 전 하나도 안 힘들어요.”

그녀가 쉽게 넘어오지 않으니 그의 기분은 점점 저조해졌다. 그는 침대를 덮은 장막을 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는 그를 달래 주기 위해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의 입술은 얇은 편이었지만, 입에 머금으면 꽉 차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눈을 감고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모처럼 얻은 기회를 충분히 즐기지 못한다면 두고두고 후회할 터였다.

서로를 껴안은 두 사람의 정신이 서서히 녹아내릴 즈음, 아이가 칭얼대는 소리가 들렸다. 백천범이 황급히 그를 밀치며 목청을 높였다.

“무슨 일이야? 배고파서 칭얼대는 거야?”

월규의 목소리가 답했다.

“기저귀를 갈았는데도 계속 칭얼대시는 걸 보니 배가 고픈 듯합니다.”

묵용감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대체 아들이란 말인가, 원수란 말인가?

묵용감은 뽀로통한 얼굴로 등을 보이고 누웠다.

그러거나 말거나, 백천범의 신경은 아이에게만 쏠려 있었다. 토라진 묵용감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듯했다. 그녀가 아이를 어르며 말했다.

“이런 먹보 같으니, 벌써 배가 고픈 거야? 많이 먹고 쑥쑥 크려는 거구나.”

어찌나 떼를 써 대는지, 세자의 자그마한 얼굴은 새빨갛게 익어 있었다. 세자는 한참을 칭얼거리며 버둥거리다 애처로운 눈으로 백천범을 바라보았다.

백천범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조용히 달랠 뿐이었다.

“왜 안 먹는 거야? 배고프잖아, 어서 먹자. 착하지? 먹고 푹 자자.”

한참을 달래도 세자의 칭얼거림이 멎지 않았다. 도통 영문을 알 수 없었던 백천범은 아이를 이리저리 살피며 중얼거렸다.

“어디 불편한가? 덥나…….”

그 와중에 등지고 누워 있는 묵용감이 보여, 백천범의 미간이 바짝 좁혀졌다. 화가 난 그녀가 발로 그를 밀었다.

“좀 와서 왜 이렇게 보채는 건지 봐 줘요.”

그는 귀찮다는 듯 대충 대꾸했다.

“배가 고파 그렇겠지. 그쪽은 없을 테니 다른 쪽을 물려 주시오.”

백천범은 흠칫 놀랐다. 조금 전 일을 떠올린 그녀는 그제야 정황을 깨달았다. 그녀가 다시 한번 그를 걷어찼다.

“세상에 이런 아버지가 있어요? 아들 걸 빼앗아 먹다니! 아들이 배를 곯아도 상관없다는 말이에요?”

반대편을 물리자, 세자는 자그마한 입으로 젖을 힘껏 빨았다. 이윽고 애처로운 눈길이 다시금 백천범을 올려다보았다. 크게 우는 법이 없던 세자였지만 이번만큼은 참을 수 없는지 눈에 불만이 가득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백천범은 제 젖을 직접 짜 보았다. 역시나 어떤 것도 묻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이불을 걷어 묵용감을 힘껏 때렸다.

“왕야가 이러고도 아버지예요? 이리 남김없이 빼앗아 먹다니요. 어떻게 이럴 수 있어요!”

백천범은 찰싹 소리가 날 정도로 그를 힘껏 내리쳤지만, 그는 나체 상태로 웃기 바빴다. 그때, 방 안에 다른 이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순식간에 묵용감이 미소를 지웠다.

“방에 누가 있느냐?”

장막 밖에 서 있던 월규는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때마침 들려온 차디찬 목소리에 그녀는 조용히 문밖으로 나갔다. 방에 있었단 사실을 들키면 목이 날아갈지도 몰랐다…….

백천범이 묵용감을 흘겨보았다.

“그런 것까지 걱정하시는 거예요? 전 왕야께서 엄청 뻔뻔하신 줄 알았는데요!”

이윽고 그녀는 아이를 안고 다정하게 달랬다. 세자는 까만 눈을 굴리다 옆에 누워 있는 사내를 빤히 쳐다보았다. 누가 자신의 식량을 빼앗았는지 다 아는 것 같았다.

백천범은 목청을 높여 월규를 불렀다.

“기홍 언니한테 미음 좀 만들어 달라고 해 줘. 안 그럼 세자가 밤새 소란을 피울 테니까.”

월규는 일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런 반응도 없으니 백천범이 다시 목청을 높였다. 월규는 그제야 소리 높여 대답했다.

“왕비 마마, 소인을 부르셨습니까? 밖에 있느라 듣지 못했습니다. 아, 미음을 만들어 오라고요? 예, 소인이 곧장 가져오겠습니다.”

그녀는 서둘러 처소 밖으로 나왔고 정원에 나와서야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기홍을 찾아간 뒤에도 그녀는 탁자에 엎드려서 웃기 바빴다.

잘 준비를 하고 있던 기홍은 야밤에 찾아온 그녀를 어리둥절한 얼굴로 맞았다.

“무슨 일이야?”

월규는 웃느라 손만 내젓고 있었다. 조금 지나서야 월규가 설명했다.

“왕비 마마께서 미음을 가져다 달라십니다. 세자 아기씨께서 배가 고프시다고요.”

기홍은 여전히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젖을 먹이시면 되잖아. 갑자기 웬 미음?”

월규는 참지 못하고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누가 빼앗아 먹었나 봐요. 우리 세자 아기씨가 드실 게 없어서 소란을 피우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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