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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418)화 (417/1,192)

제418화

사장풍은 손에 나뭇가지를 쥔 채 모래 위에 뭔가를 끄적거렸다. 그가 입을 떼려는 순간, 사앵앵이 큰소리로 호통쳤다.

“잘 생각해 보고 얘기해요!”

“잘 생각해 보고 하는 말입니다.”

시선을 올려 그녀를 마주한 사장풍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없습니다.”

예상했던 대답이라 사앵앵은 놀라지도 않았다. 두 다리를 감싸 안은 사앵앵은 무릎에 얼굴을 괴었다. 저절로 슬픔에 젖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렇게 괜찮은 여인이 왜 싫은 거예요? 언젠가 당신은 후회할 것 같아요.”

말을 내뱉고 나니 그녀는 까닭 없는 믿음이 생겼고 힘이 났다. 그녀가 반짝이는 눈망울로 사장풍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오늘 제가 한 말 잘 기억하세요. 분명 후회할 날이 올 거예요!”

사장풍이 무심하게 답했다.

“잘 기억하겠습니다. 결국엔 실망하겠지만 말입니다.”

“아뇨. 확실해요.”

사앵앵이 헤헤 웃으며 해가 기울어가는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아직 안 알려 줬어요. 불은 왜 피우는 거예요?”

“이곳은 날이 금방 저물어서 승냥이가 나타나기 때문이지요.”

“스, 승냥이요?”

사앵앵이 화들짝 놀라 물었다.

“늑대랑 비슷하게 생긴?”

“네. 사막이나 초원을 떠도는 놈들이지요.”

“늑대는 한데 뭉쳐 있는 걸 좋아해서 무리 지어 다닌다던데, 그런 걸 목격할 만큼 운이 좋진 않겠죠?”

그녀는 일부러 침착한 척하며 멋쩍게 웃었다.

늘 자신만만하던 그녀가 웬일로 여린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사장풍은 어쩐지 우스운 기분이 들어 그녀를 놀려 주었다.

“모를 일입니다. 승냥이 같은 놈들은 워낙 영리해서 소리 소문 없이 바로 옆까지 오기도 하니까요. 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 말이죠.”

아무리 담력이 좋다 한들, 사앵앵도 곱게 자란 사람이었다. 인적이 드문 곳에서 밤을 지새우는 것 자체가 두렵고 험난한 일이었다. 애써 내색하지 않고 있건만, 그것도 모자라 늑대인지 승냥이인지 모를 들짐승까지 나타난다니…….

기울어가는 석양을 마주하며 대지를 바라보니 저 먼 곳은 들쑥날쑥한 모래 언덕이, 가까이에는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하늘은 까마득히 높았고 땅은 끝도 없이 뻗어 나갔다. 낮게 드리워진 어둠이 모래 언덕을 흐릿하게 지우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그녀가 이따금 미간을 찌푸렸다. 어둠 속에서 자꾸만 무엇인가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사장풍이 보자기를 펼치더니 찐빵을 건넸다.

“먹으십시오. 승냥이를 만나더라도 우선 먹어 둬야 도망칠 힘이 나지 않겠습니까.”

사앵앵은 아무 말 없이 찐빵을 받아들고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말라비틀어진 찐빵이었지만 그녀는 단숨에 꿀떡 삼키고는 손을 뻗어 한 개를 더 집어 들었다.

사장풍이 말했다.

“천천히 먹으십시오. 그러다 사레들립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앵앵이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한번 시작한 딸꾹질은 멈출 줄 몰랐다. 그녀는 입을 가리고 황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꼭 겁에 질린 토끼처럼 보였다.

“마음 놓고 하십시오. 승냥이는 청각보다 후각에 의지해 움직입니다. 지금 근처에 있다면 진작에 체취를 맡고도 남았겠지요.”

그가 주전자를 건네며 사앵앵을 달랬다.

“물 좀 드십시오.”

딸꾹질을 참느라 힘들었던 사앵앵은 겨우 마음을 놓고 딸꾹질을 했다. 사장풍의 시선을 느낀 그녀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좀 편해졌습니다.”

이내 그녀가 물을 들이켠 후 물었다.

“방향은 아는 것이지요? 여기서 길을 헤매면 안 됩니다. 사막에서 길을 잃으면 빠져나가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일 없습니다. 내일은 길을 서둘러야 합니다. 점심 때쯤이면 천엽성千葉城에 도착할 테니, 말을 바꾸고 조금만 서두르면 금방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사장풍은 입에 있던 음식을 삼키고 땅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그는 검푸른 빛으로 물든 하늘을 바라보며 넋을 놓았다.

사앵앵도 천천히 딸꾹질을 멈추었고 사장풍처럼 바닥에 누워 힘껏 기지개를 켰다.

“정말 편합니다.”

까마득하게 떠오른 하늘에는 밝은 별이 촘촘히 수 놓여 있었다. 한 알 한 알 반짝이는 게 검은 융단에 가득히 박아 둔 구슬처럼 보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누워 있었다. 높은 하늘과 광활한 대지, 이 장엄하고 엄숙한 대자연에 안겨 있으니 시간이 멈춘 듯했다. 생각해 보면 사람은 먼지만큼이나 작은 존재였다. 시간이라는 기다란 강에 떠서 종착점도 모른 채로 그저 흐름에 이끌려 가는 존재.

어느덧 떠오른 창백한 달과 메마른 모래, 끝없는 황량함에도 사앵앵은 땅바닥을 침대 삼아, 하늘을 이불 삼아 잠을 청했다. 긴긴 한숨을 내쉰 그녀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때 사장풍의 또렷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앵앵, 내일 천엽성에 도착하거든 그곳에 남으십시오.”

사앵앵이 퍼뜩 눈을 떴다.

“왜요?”

“천엽성은 서북 지역에서 규모가 큰 성입니다. 번화한 곳이니 그곳에 남아 계십시오. 분명 성공할 기회가 올 것입니다.”

사앵앵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제게 기회는 당신이에요. 당신이 없는데 무엇 하러 다른 이들과 지지고 볶으며 살겠어요?”

“원래는 저를 지지고 볶을 생각이었군요?”

사앵앵이 즐거워하며 웃었다.

“여기서 그렇게 해 드릴까요? 밖은 야성의 맛이 있다던데!”

얼굴이 파랗게 질린 사장풍은 그녀를 등지고 누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사앵앵이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오늘 길 내내 그는 그녀가 다가오지 못하게 선을 분명히 그었다. 별다른 수확은 없었지만, 말로 그를 들볶는 것도 충분히 재미있었다.

누워 있다 보니 어느새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까무룩 잠이 들려고 하는데 사장풍이 그녀의 다리를 툭 치며 말했다.

“밤에는 공기가 찹니다. 마차에서 쉬십시오.”

사앵앵이 몸을 일으켜 앉았다.

“같이 갈 거예요?”

사장풍이 어두운 안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전 불을 지켜야 합니다.”

“그럼 저도 안 갈래요.”

사앵앵은 그의 몸 가까이에 붙어 누웠다.

“닭한테 시집을 갔으면 닭을 따라야 한다는 말도 있잖아요. 당신이 어디 있든 당신 곁에 있을 거예요.”

사장풍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우리가 거짓 혼사를 치렀다는 거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누가 거짓이래요. 저는 중매를 통해 정식으로 혼인을 올린 당신 부인이에요. 절까지 올리고 온 동네 사람들이랑 일가친척 어른들까지 전부 와서 혼인을 축하했잖아요.”

그녀가 낯설도록 차갑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사 장군, 다른 일은 다 넘어가지만, 우리의 혼사를 거짓이라고 하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어요!”

평소 웃기만 하던 그녀가 처음으로 보이는 모습이었다. 아리따운 얼굴에 어른거리는 모닥불 불빛이 단호한 선을 그렸다. 두 눈썹을 치켜세운 채 얼굴을 찌푸린 그녀에게 사장풍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갑작스레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 * *

사장풍은 한밤중에 무언가 자신의 허리를 감싸는 느낌에 몸을 뒤척였다. 허리 쪽에 손을 뻗으니 다리가 만져졌다. 흠칫 놀란 그는 곧장 잠에서 깼다. 어느새 그의 품에 안긴 사앵앵이 손과 발을 모두 뻗어 그의 허리를 꽉 감싸 안고 있었다.

그녀의 숨결이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달콤한 향이 풍겼다. 그는 머리에서 한 차례 폭발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그간 사앵앵과 말로 설명하기 힘든 민망한 날들을 함께하긴 했지만, 이렇게나 가까이 붙어 있는 건 처음이었다.

소녀의 체형이 고스란히 느껴졌고 옅은 향기가 코를 찔렀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떼어 냈다. 쥐도 새도 모르게 벗어나는 편이 가장 좋았다. 혹시라도 그녀가 이 모습을 알아차리면 적반하장으로 그를 위협하려 할 게 뻔했다.

그가 꿈틀거리자 그녀는 웅얼거리며 더 세게 그를 껴안았다. 다리에도 힘을 주는 바람에 그의 어떤 부위도 함께 짓눌렸다. 그가 헉 소리를 내며 반사적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 상태로 어찌 잠을 청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에게 짓눌린 그는 몸을 살짝 틀어 그녀를 떼어 내려 애썼다. 야속하게도 그녀는 그를 골탕 먹이려는 것처럼 무릎을 내리는 즉시 다시 올리기를 반복하며 그의 하체를 문질렀다.

사장풍의 몸에서 점점 힘이 빠져나갔다. 며칠 동안 힘겹게 쌓아 올린 벽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기 직전이었다. 어쨌든 그녀에게 못 볼 꼴까지 다 보여 준 지 오래니, 포기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가 가볍게 그녀를 밀치며 말했다.

“일어나 보세요. 절 누르고 있지 않습니까.”

사앵앵은 몽롱한 상태로 눈을 반쯤 떴다.

“시끄럽게 뭐예요. 안 자요?”

그는 최대한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손과 다리 좀 제 몸에서 치워 주십시오.”

사앵앵이 그를 슬쩍 훑으며 말했다.

“당신이 올린 거 아니에요?”

사장풍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적잖이 시달리다 보니 그녀의 태도는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그는 곧장 그녀의 손을 치웠다. 하지만 그녀는 또다시 손을 얹더니 그의 허리를 가볍게 어루만졌다.

“손은 무엇 하러 올려놓고 그래요?”

사장풍은 어안이 벙벙해져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맙소사, 이 여인은 날이 갈수록 더 뻔뻔해지고 있었다.

“손발 내리십시오.”

그가 꾸물대며 말했다.

“승냥이가 있습니다.”

“아이고, 무서워라.”

그녀는 오히려 그의 품으로 더 파고들며 키득거렸다.

“서방님, 절 지켜 주시어요.”

사장풍은 정말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정말입니다. 무엇 하러 당신을 속이겠습니까.”

“그럼 한번 불러 보시든가요.”

아우우!

사앵앵은 사장풍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녀가 눈을 깜빡이며 헛웃음을 흘렸다.

“당신이 낸 소리예요? 왜 입을 벌리는 걸 못 본 거 같죠?”

사장풍이 눈짓으로 그녀의 뒤쪽을 가리켰다. 사앵앵이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창백하게 빛나는 달빛 아래… 승냥이 한 마리가 서 있었다!

그녀가 소리를 지르려는 순간, 사장풍이 황급히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소리 지르면 안 됩니다. 도발하는 행위라고 여길 거예요. 일어나서 제 뒤로 오십시오.”

사앵앵도 그의 등 뒤에 숨고 싶었지만, 팔다리가 후들거리는 탓에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가 입술을 바들바들 떨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떡해요?”

“어서 일어나십시오. 가만히 있다간 여기서 죽을 겁니다.”

사앵앵은 두려움에 떨었지만, 그녀는 내면에 강한 용기를 품은 여인이었다. 그녀는 바들바들 떨면서도 서둘러 사장풍을 짚고 그의 등 뒤로 넘어갔다.

사장풍이 모닥불에서 두꺼운 나뭇가지 두 개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마차 뒤쪽을 지키세요. 말이 놀라 도망가기라도 하면 정말 이곳에서 죽을 겁니다.”

나뭇가지를 건네받은 사앵앵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물었다.

“저 혼자 마차 옆에 있으라고요? 거기에도 승냥이가 있으면 어떡하라고요?”

“손에 불을 들고 있으니 가까이 오진 못 합니다.”

사장풍이 턱짓으로 승냥이를 가리켰다.

“아님, 여기서 저놈과 맞설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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