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6화
“주아 탓만 할 수도 없는 일 아닙니까? 모든 일에는 전후 사정이라는 게 있습니다. 주아는 셋째와 정혼을 한 뒤로 평생 셋째를 배필로 여겨 왔습니다. 그런 아이가 매일 셋째와 제수가 은애하는 모습을 지켜봤으니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너무 주아 편을 든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주아는 정말 불쌍한 아이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제수의 아버지가 그 애의 가족들을 몰살하지 않았습니까. 주아가 제수를 좋아하기는 힘든 일입니다. 더욱이 셋째를 빼앗아 갔다고 생각했겠지요.
아직 아이 같은 구석이 있어서 그리했을 것입니다. 이번만큼은 제수가 너그러이 용서해 주세요. 이제 자식까지 생겼으니 부디 더 넓은 도량으로 바라봐 주세요.”
태자의 말은 백천범의 여린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태자의 말이 옳은 듯했다. 그녀가 행복한 만큼 황보주아는 실의에 빠졌으리라.
황보주아는 정말 사나운 팔자를 견디고 있었다. 천금 같은 대갓집 규수에서 지금의 처지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슬픈 나날을 보냈겠는가.
그래, 어쨌든 묵용감의 결정을 보았으니 되었다. 없었던 일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가면 될 일이었다. 백천범은 시원스럽게 마음을 정했다.
“예, 둘째 아주버님 말씀이 맞습니다. 황보 아가씨는 불운한 일을 많이 겪었지요. 더는 따지지 않겠습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아주버님께서 왕야께 잘 좀 말씀해 주시어요. 제 화는 풀렸으니 황보 아가씨를 내치지 말라고 말입니다.”
태자의 안색은 어둡기만 했다. 그가 자조하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 말을 들었으면 제수를 찾아오지도 않았겠지요. 지금의 셋째는 제수가 직접 가야 말을 들을 겁니다.”
묵용감에게 화가 많이 난 듯한 모습에 괜히 백천범이 민망함을 느꼈다.
“왕야께서 조금 괴팍한 면이 있지요. 화가 나면 눈에 보이는 게 없을 때가 있습니다. 혹 기분이 상하셨다면 부디 마음에 두지 마시어요.”
“물론입니다.”
태자가 웃으며 말했다.
“셋째의 성질이야 저도 잘 아니까요. 화가 나면 눈에 보이는 게 없을 정도지요. 그래도 제수에게만은 예외가 아닙니까? 셋째가 제수처럼 사리에 밝은 여인을 만나 다행입니다. 사나운 말에게 굴레를 씌워야 통제가 가능한 것과 같지요. 셋째에게는 제수가 바로 그 굴레입니다.”
* * *
백천범의 걸음이 어찌나 빠르던지, 어느새 태자는 그녀의 뒤에서 걷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 생각이라고는 없는 여인이었다. 어찌 군주를 앞질러 간단 말인가?
이상하게도 황보주아는 저 단순한 여인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어떤 방법을 써도 그녀의 품에서 묵용감을 떠나게 할 수는 없는 듯했다.
누각의 모습이 보일 무렵, 멀리서부터 황보주아의 통곡 소리가 들려왔다. 시녀들과 하인들이 멀찍이 서서 누각을 힐끔거렸다. 그녀가 그만 볼일들 보라며 손을 휘저었지만, 왕비는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았다. 그들은 히죽거리기만 할 뿐, 돌아갈 생각은 없어 보였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수많은 시선 속에서 누각의 계단을 올랐다. 막상 누각 안으로 들어선 순간, 백천범은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황보주아는 이마부터 눈, 얼굴까지 퉁퉁 부어 있었다. 눈 뜨고 봐줄 수 없을 만큼 참혹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빠르게 어제 일을 회상했다. 머리채를 틀어쥐긴 했어도 얼굴은 건드리지 않았다. 어쩌다 저 꼴이 되었단 말인가?
백천범을 발견한 황보주아는 황급히 고개를 파묻어 얼굴을 가렸다.
이미 체면이 말이 아니었지만, 이런 꼴을 보이는 건 죽고 싶을 정도로 창피한 일이었다. 그녀의 자존심은? 그녀의 격은? 어째서 기둥을 붙잡은 손을 놓지 못하고 하염없이 울고 있단 말인가. 묵용감이 죄책감을 느낄 수 있게 응당 당찬 모습으로 관저를 나서야 했다. 그러나 지금의 그가 죄책감을 느끼긴 할까…….
그녀는 묵용감의 생각을 도무지 헤아릴 수가 없었다. 백천범이 그녀를 때린 것도 모자라 그에게 손찌검을 했는데, 어찌 자신을 내쫓는단 말인가? 정말 사랑이 그의 눈을 어둡게 만들었단 말인가. 저 여우 같은 백씨가 무슨 수작을 부렸길래 묵용감이 이리도 변했을까. 황보주아는 백천범이 가증스러워서 미칠 지경이었다.
묵용감이 그녀에게 죄를 물으러 왔을 때, 그녀는 두려울 게 없었다. 태자가 곁에 있는데 묵용감이라도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할 수는 없을 터였다. 그러나 그녀의 예상을 벗어난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태자가 말려도 그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았다. 묵용감은 군주의 체면도 봐주지 않고 굳은 얼굴로 그녀에게 썩 꺼지라고 소리칠 뿐이었다.
그 순간, 그녀는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에 짓눌리고 말았다. 고귀한 그녀의 머리는 아래로 떨어졌고 꼿꼿했던 허리도 무너져 내렸다. 날카로운 공포가 그녀의 머릿속을 마구 헤집었다. 이곳을 나가면 어찌한단 말인가? 설마 시정잡배 같은 사내에게 강제로 보내지는 것은 아닐까. 그런 삶을 사느니 죽는 게 더 나았다!
묵용감은 태자가 지원군을 요청하러 갈 것이란 걸 예측하고 있었다. 그는 황보주아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느긋하게 백천범을 기다렸다. 정작 그녀가 도착했을 때, 그는 일부러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대가 여긴 어쩐 일이오?”
백천범은 황보주아를 바라보다 조용히 물었다.
“왕야께서 때리신 거예요?”
묵용감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그녀가 망설이다 재차 물었다.
“그럼 어째서… 저렇게 된 거예요?”
“기둥에 박았소.”
“죽으려고 한 거예요?”
“…….”
“됐어요. 죽으려고까지 하는데 그렇게 몰아세우지 마세요.”
백천범이 쐐기를 박았다.
“그래도 왕야의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이잖아요.”
부부는 조용히 대화를 나누었지만 황보주아는 한 글자도 빠짐없이 들을 수 있었다. 그랬다. 그녀는 묵용감을 살려준 은인이었다. 그 은혜를 이렇게 갚는단 말인가……. 양심도 없지.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고, 슬픔이 북받쳤다. 그녀는 다시금 목놓아 울고 말았다.
그때, 누각에 올라온 태자가 그녀를 달래 주었다.
“주아야, 울지 말거라. 왕비가 왔지 않느냐? 전부 터놓고 이야기해 보자꾸나. 어쨌든 문제를 해결해야지. 울기만 하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니 네가 먼저 말해 보거라. 어찌했으면 좋겠느냐?”
황보주아가 기댈 수 있는 존재는 태자뿐이었다. 그녀가 흐느끼며 말했다.
“저는 나가지 않을 겁니다.”
이곳에서 나가면 그녀는 정말로 살길이 없었다.
묵용감이 단호한 눈빛을 보냈다.
“안 된다. 나가야 한다. 살 집을 구해 주마.”
태자가 백천범을 바라보며 말했다.
“왕비도 의견을 말해 보세요.”
백천범은 착잡한 심경이었다. 황보주아의 비참한 모습을 보니, 나쁜 감정은 진즉 희석되어 버렸다. 무엇보다 그녀는 곤란한 처지에 놓인 사람에게 발길질할 성격도 아니었다. 그저 이쯤에서 용서해 주고 싶었다.
“왕야, 되었습니다. 저는 화가 다 풀렸습니다. 그렇게 하실 필요…….”
“그대는 화가 풀렸다 해도 나는 아니란 말이오!”
묵용감의 화는 과장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 화가 났다. 한 사람만을 향한 그의 감정은 순결하고도 맹목적이었다. 백천범이 아닌 여인은 누구라도 그를 건드릴 수 없었다. 황보주아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데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틈을 타 그를 품에 안을 생각을 하다니! 절로 구역질이 치밀어올랐다.
백천범은 어쩔 수 없이 그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다정하고 부드러운 말투로 태자가 했던 말을 똑같이 들려주었다.
그녀가 나서니 묵용감도 더는 매정하게 굴 수 없었다. 황보주아를 관저에서 내보내고 싶긴 했지만, 그 후로 펼쳐질 힘든 나날을 어찌 모르겠는가. 조금 전 태자도 똑같은 말을 했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를 기다린 것도, 그녀의 말을 듣는 것도 모두 그녀 덕분에 황보주아가 곤경을 벗어나게 되었다는 걸 알려 주고 싶어서였다.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린 뒤로도 그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가 한참을 망설이다 운을 떼었다.
“왕비가 마음이 여리다는 건 나도 잘 알오. 하지만 저 애가 또다시 허튼짓을…….”
태자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주아는 믿지 못한다 해도 나는 믿을 수 있지 않느냐? 주아 너는 몸이 편치 않으니 앞으로 누각에서 내려올 생각 말고, 모든 일을 하인들에게 맡기거라. 예전처럼 누각 앞에 보초병을 배치해 두는 게 좋겠구나.”
그가 황보주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병을 치료하려면 안정이 필요하니, 이리 하면 누가 널 성가시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오늘부터 그녀를 누각에 연금한다는 뜻이었다. 이제 누각을 벗어나려면 먼저 시녀를 보내 태자에게 허락을 구해야 했다. 그녀의 자유마저 억압하다니, 죄인의 처지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황보주아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태자를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태자 오라버니…….”
태자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 말 듣거라, 주아야. 다 널 위해서다.”
그의 눈빛은 여느 때처럼 맑고 고결했지만, 황보주아는 그 눈빛이 너무나 낯설었다. 그에 대한 신뢰까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제 곁에 남은 사람은 태자뿐이었다.
묵용감은 이제 기댈 수 있는 언덕이 아니었고, 태자가 약속했던 황후의 자리도 빈말일 가능성이 컸다. 그래도 태자의 말을 잘 따르면 훗날 태자의 후궁이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어쨌든 그녀는 대학사 집안의 적녀이자 장녀이니, 언젠간 조상들의 명예를 빛내야 했다.
결국 그녀는 그의 말에 따르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숙였다.
묵용감 역시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각에도 그게 좋겠습니다. 형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백천범을 데리고 밖으로 향했다. 나가는 동안, 황보주아에게는 단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황보주아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비참한 웃음을 흘렸다.
“이 모습을 보신 아버지께서 무덤을 박차고 나오시는 건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태자가 미소를 지었다.
“훌륭하구나. 이런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다니, 역시 널 제대로 봤다.”
“태자 오라버니, 이렇게 바닥까지 떨어진 모습을 보셨으면서 제가 필요하십니까?”
“물론이지.”
태자가 빠르게 대꾸했다.
“말하지 않았느냐? 나에게 넌 다른 이들과는 다른 존재다.”
“그렇군요.”
황보주아는 자신의 머리를 정리하고 기둥을 붙잡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상 모든 이들이 저를 업신여긴다 해도, 태자 오라버니께서 계시니 참 다행입니다.”
태자도 자리에서 일어나 시녀들에게 분부했다.
“뭣들 하는 것이냐, 어서 아가씨를 도와주지 않고. 앞으로 잘 모셔야 한다. 무슨 일이 있거든 내게 곧장 고하고.”
그가 다시 황보주아를 돌아보았다.
“피곤할 테니 그만 쉬거라. 짬이 나면 다시 들르마.”
황보주아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태자가 문을 나서자마자 그녀의 목소리가 발목을 붙들었다.
“태자 오라버니.”
계단에 선 태자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냐?”
황보주아는 문가에 기대어 있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에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가 떠올랐다. 그녀가 가느다란 목소리를 흘렸다.
“…사실 저는 죽는 게 두렵습니다.”
태자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곧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내가 있는 한 네가 죽을 일은 없다.”
황보주아는 점점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그래, 태자 한 사람만큼은 그녀를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희망은 덧없는 것이었다. 태자는 오래전부터 그녀를 희생시킬 목적으로 곁에 두었을 뿐이었으니.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그가 쥔 바둑알에 불과했다. 그 사실은 예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