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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415)화 (414/1,192)

제415화

묵용감이 조용히 문을 두드렸다.

“문 좀 열어 보시오. 머리가 너무 아프니 들어가게 해 주시오. 부인, 듣고 있소? 문을 열어 주지 않으면 이곳에서 자겠소.”

목욕을 마치고 돌아온 백천범은 화장대 앞에 앉아 있었다. 마른 수건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말려 주던 월규가 조용히 그녀를 타일렀다.

“왕비 마마, 이만 문을 열어 주시어요. 밤이 깊어지는데 밖에서 주무셨다간 몸이 상하실 겁니다.”

백천범은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금 문을 열어주면 그가 정말로 잘못을 뉘우치긴 할까?

“문을 열지 못하는 것이오? 사람을 때렸으니 차마 볼 낯이 없어서?”

별안간 문 너머에서 묵용감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내가 빤히 문 앞에 있거늘, 다시 한번 겨뤄보는 게 어떻겠소?”

하! 뻔뻔하긴, 아직도 힘이 남아돈단 말인가! 백천범은 화장대를 팍 내리치며 일어났다. 문으로 향하는 그녀의 걸음은 거침없었다. 누가 겁먹을 줄 알고? 그까짓 거 싸우면 그만이지!

그녀의 뒤에서 월규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역시 초왕은 대단한 사람이었다. 왕비를 약 올려 문을 열게 하다니. 월규는 초왕을 따라 그녀를 부추겼다.

“왕야께 매운맛 좀 보여 드려야겠습니다. 잘못을 저지르시고도 저리 싸움을 거시다니요. 마마, 이참에 본때를 보여 주십시오!”

말을 마친 월규가 단숨에 문을 열었다.

백천범은 방 안으로 들어오려는 묵용감을 밀쳐내며 날카롭게 말했다.

“싸울 거면 밖에서 싸워요. 괜히 소란스럽게 해서 린아를 깨울 생각 말고요.”

무방비 상태였던 묵용감은 그녀의 손길에 잠시 휘청였다. 백천범은 정원으로 향해 굳은 얼굴로 자세를 잡았다.

“덤벼요. 둘 다 무술을 배웠으니 시정잡배들처럼 싸우지 말고 제대로 겨뤄요.”

묵용감은 느릿느릿 걸어가 그녀를 품에 안으려고 했다.

“부인, 나도 괴롭소. 싸우긴 뭘 싸운단 말이오. 정말 싸우고 싶거든 침대에서 싸웁시다…….”

“하!”

그녀가 다리를 들어 있는 힘껏 그를 걷어찼다.

“오늘부터 전 린아랑 잘 테니까 왕야는 자고 싶은 데 가서 주무세요!”

그녀의 발길질은 묵용감에게 간지러운 수준이었다. 그는 순순히 한 대 얻어맞았다. 차라리 한 대 맞는 것으로 그녀가 화를 푼다면 다행인 셈이다. 그런데, 아뿔싸. 그가 별안간 소리를 지르며 다리를 붙잡고 주저앉았다.

백천범이 냉랭한 시선을 보냈다.

“아픈 척하지 마세요. 그리 뛰어난 실력자께서 이 정도도 견디지 못하는 거예요?”

묵용감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등잔불 아래 드러난 그의 얼굴에는 온통 땀이 맺혀 있었다. 그가 문 앞을 지키던 월규에게 분부했다.

“어서, 위 의원을 불러오거라.”

깜짝 놀란 월규가 종종걸음을 쳤다.

백천범도 흠칫 놀랐다. 분명 힘을 잔뜩 실어 때리긴 했지만, 설마……. 그녀가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며 그의 다리를 살폈다.

“어디를 차인 거예요? 제가 한번 볼게요.”

묵용감은 다리를 움켜쥔 채 일어나지 않았다.

“뼈에 금이 간 것 같소. 위 의원이 오면 알 수 있겠지.”

백천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가 묵용감의 다리를 부러뜨렸다니……. 수련을 하지 않은 지 오래인데 어찌 실력이 늘었단 말인가…….

문득 후회가 밀려왔다. 그가 웅크린 몸을 휘청거리자 덜컥 겁이 난 그녀는 얼른 손을 내밀었다.

“방 안으로 들어가서 기다려요. 그렇게 웅크리고 있으면 힘들잖아요.”

묵용감은 그녀에게 기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괜찮소. 그저 금이 간 것뿐이오. 한 달 정도 누워 있으면 나을 것이오.”

그가 몸에 힘을 반쯤 빼고 기대자 백천범은 허리가 다 휠 지경이었다. 그녀는 묵용감의 부상이 생각보다 심각하다고 믿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그가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까.

“왕야, 이,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걱정과 함께 짙은 죄책감이 그녀를 내리눌렀다. 백천범이 우물거리며 말했다.

“너무 화가 나서, 순간 힘 조절을 못 했나 봐요. 욕하셔도 좋고 때리셔도 좋아요. 계단 조심하세요. 다리 들고 천천히… 문은 잠글 필요 없어요. 우선 침대까지 데려다드릴게요……. 어? 어어? 이런 거짓말쟁이! 사기꾼! 뭐 하는 거예요! 어서 나가요! 빨리요… 윽… 아… 음…….”

* * *

이튿날 아침, 간밤의 일을 전해 들은 녹하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당장이라도 황보주아를 찾아가 본때를 보여 주려는 듯했다. 백천범이 황급히 그녀를 막아 세웠다.

“이미 지나간 일이에요. 제가 호되게 때려 주기도 했고요. 본색을 드러냈으니 앞으로 신경 끄고 살면 그만이에요.”

“마마, 그리 무르게 대처하시면 어찌합니까? 그런 수모를 겪고도 넘어가시다니요.”

녹하는 말을 듣지 않고 고집을 부렸다. 안 그래도 황보주아와 사이가 나빴던 그녀인 만큼, 파렴치한 짓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감히 왕야를 품에 안다니, 상상만으로도 부아가 치밀었다.

“왕야께서 알아서 처리하시겠대요.”

하지만 초왕이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했으니… 두고 보면 될 일이었다. 정말 공정하게 처리한다면 백천범과 황보주아에게 각각 곤장 오십 대씩은 내려야 한다. 황보주아가 먼저 잘못을 저지르긴 했지만, 백천범이 무력을 사용한 것도 따져야 했으니까.

만약 황보주아가 두 번 다시 이런 간교한 계략을 쓰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그녀도 손찌검을 한 일은 사과할 수 있었다.

녹하는 곧장 왕비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초왕이 어떻게 나오는지 보려고 한다면, 지금은 그저 지켜보면 그만이었다. 녹하는 황보주아를 혼쭐 내 주려던 계획을 잠시 보류했다. 물론 때가 되면 찾아가서 혼쭐을 낼 작정이었다.

마음을 추스른 녹하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우선은 왕야께서 어찌 말씀하시나 지켜보지요.”

월규가 녹하를 보고 잔소리를 했다.

“아기 어머니가 될 분이 어찌 그리 사납게 구십니까? 나중에 아기를 어떻게 가르치시려고요?”

녹하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누가 그래, 어머니가 된다고? 네가 내 배 속에 아기라도 집어넣은 거야?”

“아뇨.”

월규가 의아한 표정으로 받아쳤다.

“제가 집어넣을 리가 있나요. 가동 무사님이 하셨겠지요!”

녹하가 월규를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정말 얼른 시집을 보내야겠습니다. 저런 말을 부끄럼 하나 없이 내뱉다니요. 어떤 사내가 저 애를 감당할지 모르겠습니다.”

백천범은 어제 월규가 해 줬던 말을 떠올렸다.

“어제 연회에서 구토를 했다면서요. 소식이 온 건 아니에요?”

“누가 그런 소릴 하였습니까?”

녹하가 고개를 돌려 월규를 흘겼다.

“너지? 산초를 잘못 먹어 과민 반응이 온 것뿐이야. 알지도 못하면서!”

다들 웃음을 터트렸다. 월규는 녹하와 이처럼 옥신각신하는 걸 즐겼다.

“가동 무사님도 왕야만큼이나 성실한 분이 아닙니까? 어찌 소식이 없는지요? 왕비 마마처럼 모르는 사이에 가지신 건 아니겠지요? 위 의원을 불러 한번 진맥을 받아 보십시오.”

“그것도 괜찮겠다.”

백천범이 얼른 거들었다.

“가서 위 의원을 모셔와. 꼭 아이를 가졌을까 봐 그런 게 아니라 구토를 할 정도로 속이 메스꺼웠으면 위 의원한테 봐달라고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곧장 대답을 올린 월규는 눈썹이 휘날릴 정도로 달려 나갔다.

녹하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마마께서 그 말씀만 하시길 기다렸을 테지요. 그러니 그리 많은 말을 늘어놓았을 겁니다. 마마께서 위 의원을 데려오라고 하지 않으셨다면, 저 애는 답답해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백천범도 웃고 말았다.

“내가 봐도 월규가 위 의원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위 의원은 아직 마음이 없는 것 같지만 말이에요. 인연은 하늘이 정해 주는 거라 내 사람이면 놓으려 해도 놓칠 수 없고, 내 사람이 아니면 가지려 해도 가질 수 없죠. 저랑 왕야처럼…….”

그녀는 문득 말을 멈추었다. 많은 난관이 있었지만, 그녀와 묵용감의 인연은 정말 하늘이 맺어 준 것만 같았다. 어젯밤에도 그가 능글맞게 들러붙으니 더는 성질을 부릴 수가 없었다. 아기가 깰까 봐 걱정이 된 것도 있었지만, 어쨌든 그녀가 눈감아 준 것이 아닌가.

간밤에 그는 그녀의 귓가에 아주 많은 말을 속삭였다. 한마디 한마디가 따뜻했고, 그녀의 마음을 부드럽게 녹여 냈다. 그녀에게 할 말을 미리 준비한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듣기 좋은 말을 그렇게 술술 내뱉는단 말인가?

그가 내뱉는 사랑의 속삭임이 그녀를 겹겹이 둘러싸니, 그녀는 고치에 들어간 듯 혼미해졌다. 이대로 나비가 되어 날아오를 봄날을 기다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의 옷은 거의 다 벗겨진 상태였다.

물론 그도 때가 이르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경솔한 행동은 하지 않았고, 그녀를 품에 안고 깊은 잠을 청하기만 했다.

날이 밝자, 그가 조용히 그녀를 깨웠다. 그녀는 자는 척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온전히 귓가에 닿았다.

“부인, 화내지 마시오. 내가 잘 처리하겠소.”

그가 잘 처리하겠다니… 그녀는 한번 마음을 놓고 기다리기로 했다. 곧 황보주아가 그녀를 찾아와 사과하겠지. 이번 일은 양 끝이 뾰족한 가시를 사이에 둔 듯했다. 가시는 그녀의 마음을 찌르기도 했지만, 황보주아의 마음도 성할 수는 없었다.

빨리 해결하지 않으면 두 사람의 골은 점점 더 깊어질 터였다. 그녀는 계략이며 싸움 따위를 싫어했고, 마음을 쓰고 싶지도 않았다. 물론 싸우기 시작하면 그녀도 절대 봐줄 생각은 없었다.

* * *

황보주아가 찾아오기도 전에 태자가 먼저 찾아왔다. 늘 태평하고 점잖던 태자는 이상하리만치 화가 난 모습이었다. 그는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입을 열었다.

“제수, 부디 이치를 따져 주세요. 주아가 무슨 짓을 했길래 셋째가 그 애를 내쫓겠다고 합니까? 내 체면도 봐주지 않았습니다. 주아가 조금 제멋대로인 구석이 있긴 해도 의지할 곳이 없는 아이입니다. 그 혈혈단신을 대체 어디로 보낸단 말입니까?”

태자의 말은 뜻밖이었다. 묵용감이 황보주아의 사과를 받아 낼 줄만 알았던 백천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이렇게 쫓아내려 할 줄이야.

물론 관저 밖으로 내보내면 그녀의 마음은 더 편해질 터였다. 모든 일이 속 시원히 해결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그러나 태자의 말처럼, 황보주아는 태자와 초왕을 제외하면 의지할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렇게 쫓아내는 것은 너무 몰인정한 처사였다.

그때 녹하가 슬쩍 끼어들었다.

“태자 전하, 어젯밤 황보 아가씨가 무슨 일을 벌였는지 모르십니까? 왕야와 왕비께서 서로 정이 깊은 걸 아시면서도 어찌 그런 짓을 한단 말입니까? 오죽했으면 저희 왕야께서 내쫓으려 하실까요.”

사실 태자도 정황을 알고 있었다. 황보주아와 묵용감이 전하지 않아도 황보주아의 두 시녀가 그의 사람이거늘, 어찌 그가 모를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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