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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414)화 (413/1,192)

제414화

“내가 그런 말을 했다고?”

황보주아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며 답했다.

“제가 오랫동안 병을 앓고 있었지만 와 보지 못하셨다면서 오늘 보러 오셨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말이라면 그나마 납득할 수 있었다. 그래도 굳이 이 시간에 찾아왔을 리가……. 결국 그가 이곳에 있어서 백천범이 오해했고, 망할 연놈이라며 욕을 퍼부었으리라.

묵용감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대체 그가 무슨 짓을 했길래 남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손찌검을 한단 말인가……. 몸을 살펴보니 옷이 잔뜩 구겨지긴 했어도 나름대로 단정한 차림새였다. 선을 넘는 짓은 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백천범은 단숨에 누각을 내려와 복도로 달려갔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묵용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있는 힘껏 입술을 짓씹었다. 하! 해명도 하지 않으시겠다? 황보주아를 위로하느라 내려오지도 않는단 말인가? 대체 누가 그의 부인이기에……. 누각으로 돌아가 한바탕 싸우지 못하는 게 한스러울 뿐이었다.

그때 련이가 숨을 헐떡이며 그녀를 뒤따라왔다. 손에 들린 등불이 심하게 흔들리며 불꽃이 작아졌다 커지길 반복했다. 기이한 그림자를 이끌고 온 련이가 숨을 허덕였다.

“왕비 마마, 조금만 천천히 가십시오. 넘어지십니다. 소, 소인이 길을 밝혀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백천범의 걸음은 더욱더 빨라졌다. 조금이나마 화가 가라앉으니 가슴 깊은 곳에서 허무한 씁쓸함이 솟구쳐 올랐다. 그녀의 눈망울에 눈물이 어렸다. 그간 너무 행복한 날들에 잠겨 있던 탓일까? 슬픔을 이겨내는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의 이성은 이미 괴로움에 잠식되기 직전이었다.

마침내 왕비를 따라잡은 련이는 고개를 숙인 그녀를 마주했다. 볼을 따라 흘러내리는 눈물을 알아차린 련이가 황급히 달래기 시작했다.

“왕비 마마, 소인의 생각에는 마마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일이 아닌 듯합니다. 왕야께서 어떤 분이신데요. 이렇게 슬퍼하시면 황보주아의 계획대로 되는 거예요!”

치솟는 분노와 실망감은 백천범의 귀를 꽉 틀어막았다. 그녀는 눈물을 소매로 닦으며 천천히 처소로 돌아갔다.

방으로 들어왔을 때,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을 보였다. 월규에게 말을 걸 때도 태연한 안색이었다.

“린아는 아직 자는 중이지?”

“네, 아주 곤히 주무십니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본 월규가 의아함을 느꼈다.

“왕야는 못 찾으셨습니까? 어찌, 우신 듯한 얼굴이십니다.”

이제야 문 앞에 도착한 련이가 월규에게 눈짓을 보냈다.

월규는 백천범이 침대로 향하는 모습을 지켜보다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련이의 앞에 선 그녀가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

“대체 무슨 일이야?”

련이는 자신이 본 일을 전부 말해 주었고, 월규는 입을 떡 벌렸다. 련이가 직접 본 게 아니었다면 절대 믿지 않았으리라. 왕야가 어찌 황보주아의 품에 누워 있겠는가, 무려 왕비가 보는 앞에서! 초왕은 사리 분별도 할 수 없을 만큼 술에 취한 상태였던 게 분명했다. 다만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착각하다니…….

월규가 이를 악물었다. 황보주아의 음험한 수작이 아니라면,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나겠는가. 황보주아가 수작을 부린 게 틀림없었다.

“망할 년, 이런 뻔뻔한 일을 저지르면서 천금 같은 큰아가씨는 개뿔! 다른 이의 사내를 빼앗으려 들어? 내일 그 뻔뻔한 낯짝을 갈기갈기 찢고 말겠어!”

그녀가 목에 핏대를 세우고 있는데 문 너머에서 백천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서 문 좀 잠가. 왕야께서 문을 두드리거든 황보 아가씨의 누각에서 주무시라고 하고.”

월규가 화들짝 놀라 돌아보았다.

“왕비 마마, 그러면 오히려 왕야를 밀어내시는 일입니다. 이런 순간일수록 왕야를 도와주셔야지요.”

백천범도 오늘의 일은 묵용감의 의지와 크게 상관없는 일임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화를 참을 수 없었다. 묵용감처럼 영민한 사람이 어찌 그런 허술한 계략에 빠진단 말인가? 역시 황보주아에게 마음이 남아 있으니 술기운에 찾아간 거겠지.

백천범의 머릿속에서 그림이 척척 그려지기 시작했다. 기회를 놓치지 않은 황보주아가 묵용감을 품에 안는 모습까지 떠오르기까지 했다.

묵용감은 마음이 여린 사내였다. 그 점을 잘 아는 황보주아는 셋째 오라버니 운운하며 예전 일을 들먹였을 테고, 그의 앞에서 눈물도 보였으리라. 그 애처로운 모습이 그의 약한 마음을 움직였을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그를 원망하지 않을 방법도 없었다. 치솟는 분을 삭일 방법을 모르니, 결국 그에게 화살을 돌릴 수밖에.

“그렇게 좋으면 마음대로 하라지!”

백천범은 굳은 얼굴로 월규를 잡아끌었다.

“만에 하나라도 왕야를 들여보냈다간, 앞으로 나랑 말할 생각하지 마.”

월규는 혀를 내두를 뿐이었다. 평소엔 무던한 왕비였지만, 한번 모질게 마음을 먹으면 두려울 만큼 매서운 모습을 보였다. 월규가 련이에게 눈짓을 보냈다. 밖에서 초왕을 기다리라는 의미였다. 련이가 밖으로 나가자 월규는 꾸물대며 문을 잠갔다.

* * *

황보주아에게서는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별수 없이 발길을 돌린 묵용감은 백천범을 떠올렸다. 그녀가 버럭 화를 내는 모습을 떠올린 순간 걷잡을 수 없는 초조함이 밀려왔다. 누각 계단을 내려갈 땐 갑자기 현기증이 나서 하마터면 계단에서 굴러떨어질 뻔했다. 그는 서둘러 난간을 붙잡고 몸을 지탱했다.

술을 과하게 마신 건 분명 그의 잘못이었다. 늘 조심하고 신중하게 행동했건만, 하필 오늘 오점을 남기고 말았다. 그는 깊이 자책하며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황보주아는 발 뒤에 숨어 멀어져가는 그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의 뒷모습이 어둠 속에 흐릿하게 번져가더니, 마침내 완전히 녹아들었다.

오늘 밤, 묵용감은 자신의 왕비가 어떤 사람인지 똑똑히 깨달았으리라. 자신을 때린 건 별일 아니라 해도 그에게까지 손찌검을 하다니. 뜻밖의 행운이 찾아온 듯했다. 친왕이 다른 이들 앞에서 뺨을 맞았으니 이 얼마나 체면을 구기는 일이란 말인가? 만약 소문이라도 퍼지면 묵용감이 어찌 얼굴을 들고 다니겠는가.

내일 아침이 되면, 그는 내일 돼먹지 못한 저 여인을 내쫓고 세자를 자신에게 맡길 터였다. 그녀는 몽롱하고 달콤한 기대에 휩싸였다. 그녀라면 세자를 모든 학문에 능한 인재로 키워 낼 자신이 있었다.

성질이 다른 것들이 한데 섞일 수 없듯, 다른 성향을 가진 이와는 함께할수록 괴로운 법이었다. 하지만 그녀와 초왕은 같은 성향의 사람이었다. 그들이 과거를 함께했듯, 미래도 함께할 수 있지 않겠는가.

복도를 따라 빠르게 걸어가던 묵용감은 또다시 현기증을 느꼈다. 그의 발걸음이 서서히 느려지더니 마침내 어둠 속에 우뚝 서서 생각에 잠겼다. 그의 고개가 천천히 누각으로 향했다. 어둠에 감싸인 누각은 흐릿하게 번져 보였다. 공연히 마음이 수선스러워지는 광경이었다.

문 앞에 다다른 묵용감은 손으로 문을 밀었다.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돌아오지도 않았는데 어찌 문을 잠갔단 말인가?

한 시녀가 튀어나와 쭈뼛쭈뼛 말을 내뱉었다.

“왕야, 왕비 마마께서 문을 잠그라고 하셨습니다. 왕야께선, 다, 다른 곳에서 주무시라고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황보주아의 누각에서 자라고 한 말은 차마 전할 수 없었다.

묵용감이 코웃음을 쳤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더니! 차마 얼굴을 못 보겠단 말이더냐? 그 사나운 성질은 어디 가고? 그리 대단한 성질이면 얼굴을 맞대고 따지면 될 일을!”

그가 어찌나 목청을 높이는지, 백천범에게도 그의 목소리가 똑똑히 들려왔다. 그녀가 헛웃음을 흘렸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니, 어찌 저리 당당하게 나오는지, 술이 덜 깬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녀에게 문을 열어 달라고 빌어도 모자랄 판국에…….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지만, 묵용감은 조급해하지 않았다. 천천히 서성이던 그가 련이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보냈다. 두 사람은 문에서 멀찍이 떨어진 채 목소리를 낮췄다.

“네가 왕비와 함께 왔었느냐? 누각에서 본 것을 말하거라.”

련이는 초왕의 눈빛에 몸을 덜덜 떨 뿐, 감히 입을 떼지 못했다.

“어서 말하거라, 감추지 말고!”

초왕의 앞에서 어찌 거짓말을 할 수 있을까. 우물쭈물하던 련이가 입을 열었다.

“왕야께서 돌아오시지 않아 마마께서 직접 찾으러 가셨습니다. 그리고 누각에서 왕야를 찾으셨지요. 그리곤, 그리곤…….”

련이가 뜸을 들이자 묵용감이 언성을 높였다.

“어서 말하래도!”

“왕야와 황보 아가씨가 함께 침대에 누워 계신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녀의 말이 묵용감의 머리를 둔중하게 내리쳤다. 묵용감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본왕이 황보주아와 함께 침대에 누워 있었다는 말이냐?”

“정확히 말하면, 왕야께서 황보 아가씨의 품에 누워 계셨습니다.”

련이가 그의 눈치를 살피며 재빨리 덧붙였다.

“그 때문에 마마께서 그리 화를 내신 것입니다.”

묵용감은 입술을 짓씹었다. 당장이라도 욕을 퍼붓고 싶었다. 황보주아의 십팔 대 조상들에게까지 욕을 퍼부을 자신이 있었다. 이따위 뻔뻔한 짓을 저지른 주제에 왕비가 자신을 때렸다며 고자질까지 했다. 황보주아에게 가졌던 일말의 동정심마저도 그의 마음속에서 흩어져 갔다. 그의 명예를 이런 식으로 더럽혔으니 맞아 죽어도 아쉽지 않을 터였다.

그가 련이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오늘 일은 죽을 때까지 입 밖에 내어선 안 된다. 알아들었느냐?”

련이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녀가 어물거리다 겨우 내뱉었다.

“소인, 이, 이미 월규 언니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

묵용감은 성가시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되었으니 그만 가 보거라.”

련이는 벌을 면했다는 생각에 토끼처럼 빠르게 사라졌다.

묵용감은 코를 만지작거리며 다시 문 앞으로 향했다. 어쩐지, 주먹까지 휘두른다 싶더니……. 그 꼴을 봤으니 현장에서 그를 즉각 처단할 법했다. 사실 그의 책임도 컸다. 뒤로 넘어져 코가 깨진 꼴이지만, 그가 좀 더 신중하게 행동했다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문득 그는 먼 곳을 바라보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간 황보주아에게 어느 정도 책임감을 느껴 오긴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에 대한 실망감만 커지지 않았던가. 어린 시절의 정은 퇴색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그동안 황보주아를 보러 가지 않았던 이유는 백천범의 질투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 가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황보주아는 무서우리만큼 낯선 사람이 되어 있었으므로.

그는 폐쇄적인 환경에서 자라났다. 가까운 여인들이라고는 공주와 군주들이 전부였다. 다들 단정하고 고상했고, 흠잡을 데 없는 말만 또박또박 늘어놓는 이들이었다. 생김새는 다를지언정 성격이나 천성은 대부분 비슷했다. 그의 마음에 들어오는 이가 단 한 명도 없을 정도로.

과거의 황보주아는 그들과 달랐다. 묵용감 무리와 어울리던 그녀는 늘 천진난만하게 웃고 장난치는 소녀였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어떤가. 공주, 군주들과 무엇이 다른가? 계략을 쓰며 말썽을 피우는 것도 모자라 분수도 알지 못했다. 기어이 이 사달까지 만들어 내지 않았는가.

그래… 본색을 드러내시겠다? 묵용감은 마음을 굳혔다. 이젠 그도 결정할 때였다. 더는 거리낄 것 없이, 처리할 때가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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