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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413)화 (412/1,192)

제413화

그날 밤 일이 재현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황보주아가 아직 묵용감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쯤은 백천범, 그녀도 알고 있었다. 다만 황보주아의 몸이 좋지 않았기에 금릉으로 옮길 때까지만 그녀를 견뎌 볼 생각이었다. 이 일로 묵용감을 난처하게 하고 싶진 않았다.

그녀가 한 걸음을 내디디니 은옥이 앞을 막아섰다. 초조해하는 낯빛도 그날 밤과 똑같았다.

백천범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좀 더 참신할 순 없단 말인가? 지난번에는 그녀의 임신 초기 증세 때문에 넘어갔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황보주아가 또다시 이상한 일을 꾸민다면 절대 그녀의 체면을 봐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게다가 묵용감도 그때와는 달랐다. 아버지가 된 데다 아들이 그를 지켜보고 있지 않은가. 아버지가 되어 세자의 명성에 흠집을 내선 안 될 일이었다.

은옥은 여전히 완강하게 문 앞을 막아섰다.

“왕비 마마, 저희 아가씨께서는 정말 주무십니다. 내일 다시 오시지요.”

등불을 들고 있던 련이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마마께서 아가씨를 걱정하는 마음에 찾아와 주셨는데 고마워하진 못할망정 막아서다니요. 이곳은 저희 관저입니다. 그쪽 아가씨는 손님으로 머물지 않습니까? 손님이 주인을 막는 것은 대체 어느 나라 법도랍니까.”

련이의 말솜씨에 은옥은 할 말을 잃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문을 지키는 일뿐이었다.

아무래도 계속 연극을 이어가려는 생각일까. 백천범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럼 그렇게 하라지, 그녀도 이쯤에서 물어야 할 질문을 건넸다.

“왕야께서 안에 계신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은옥이 말을 더듬었다.

“아, 안 계십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치곤 뻔한 거짓말로 눈길을 끌고 있었다. 지난번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린 백천범이 그녀를 밀쳐냈다.

“이곳에 계신지 안 계신지는 직접 확인하겠네.”

방 안으로 들어서니 이번엔 채봉이 침소 입구를 막아섰다.

“왕비 마마, 저희를 이리 업신여기실 수는 없습니다. 아가씨와 왕야는 어쨌든 예전…….”

백천범이 냉랭하게 웃어 보였다.

“업신여기다니, 누가?”

“그러게요.”

련이가 등불을 벽에 걸어 두며 거들었다.

“왕비 마마께서 아가씨를 걱정하는 마음에 친히 찾아와 주셨는데 업신여기다니요? 어서 물러나세요. 아가씨만 보고 바로 돌아가실 겁니다.”

푸른 옥구슬로 만든 주렴이 채봉의 뒤에 드리워져 있었다. 문득 백천범은 그날 밤 일이 더욱더 또렷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설마, 이번에도 그녀가 주렴을 걷으면 황보주아가 입을 여는 게 아닐까?

그녀가 한 걸음을 내디디면 채봉이 한 걸음을 물러났다. 결국 주렴이 채봉의 몸에 닿는 순간 작지만 맑은 소리가 또렷하게 어둠을 흐트렸다. 아니나 다를까, 황보주아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오늘 많이 피곤하셨지요? 그만 주무시어요…….”

백천범은 흠칫 놀라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저 과거를 떠올렸을 뿐인데 현실이 될 줄이야! 황보주아는 미친 게 틀림없었다. 또 이런 수작을 부리다니, 정말 부끄러움을 모른단 말인가?

지난번엔 황보주아의 말을 듣고 뛰어들었지만, 이번엔 그럴 수 없었다. 백천범이 여유롭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주무신다더니, 어찌 아직도 말을 하시는가?”

그녀가 채봉을 잡아끌고 성큼성큼 침대 앞으로 걸어갔다.

“언니, 또 삵이랑 말하는…….”

백천범의 걸음이 우뚝 멎었다. 장막을 내리지 않은 탓에 침대 위가 그대로 두 눈에 담겼다. 황보주아의 품 안에 누워 있는 건 삵이 아닌, 묵용감이었다.

황보주아는 여느 때보다 침착하고 태연한 얼굴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래, 지난번과는 달랐다. 황보주아의 체면이 아니라, 백천범의 체면이 나동그라지는 순간이었다. 그것도 아주 제대로…….

그녀는 그 자리에 석상처럼 굳어 버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옆에 서 있던 련이도 황당무계하다는 표정이었다. 자신이 본 광경을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다.

황보주아가 먼저 적막을 깼다. 그녀는 묵용감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애처롭다는 듯 내뱉었다.

“정말 가여워서 보기 힘듭니다. 아버지가 되시더니 이렇게나 수척해지셨군요. 많이 힘드시지요.”

련이는 당장 왕비를 모시고 자리를 떠야겠다고 생각했다. 백천범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얼굴은 창백해져 있었고, 작은 어깨는 분노로 들썩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기세는 불만 붙이면 터져 버릴 폭죽처럼 보이기도, 공격할 준비를 마친 성난 짐승처럼 보이기도 했다.

“왕비 마마, 이만 가시지요.”

련이가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했다.

“왕야께서 술에 취하시어 곯아떨어지신 듯합니다. 내일 다시 얘기하시어요.”

그러나 백천범의 머릿속은 텅 비어 버렸다.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장면이었다. 묵용감이 황보주아의 침대에 누워 있다니. 그것도 그녀의 품에 안긴 채…….

한참을 심호흡을 한 끝에, 그녀는 평정을 되찾았다. 그녀가 황보주아를 바라보았다.

“왕야를 놓으세요.”

황보주아의 모습은 조금 기이했다. 평소라면 고상하고 단정한 모습을 보이며 규율을 논했겠지만, 지금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미동도 하지 않고 그저 그 자리에 있을 뿐이었다.

“놓으라니까!”

백천범이 언성을 높였다.

황보주아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백천범이 소매를 걷어붙였다.

“좋은 말로 할 때 듣지 않았으니, 내 탓은 하지 마세요.”

백천범의 사나운 모습에 채봉이 급히 달려왔지만 련이가 곧장 막아섰다. 련이에게서도 흉흉한 기세가 흘러나왔다.

“왜요, 감히 왕비 마마께 손이라도 대려고요?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겁니다. 제가 증인이 되어 똑똑히 지켜볼 테니까요.”

물론 채봉은 감히 초왕비에게 손을 댈 수 없었다. 은옥도 나서지 못하니, 채봉도 더는 방법이 없었다.

소매를 걷어 올린 백천범이 가늘고 긴 팔을 드러내었다. 더는 말로 할 것도 없이 흰 손이 단번에 황보주아의 머리채를 붙잡고 끌어 내렸다. 황보주아가 나이는 더 많았어도, 싸움에서는 그녀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황보주아는 머리를 감싸 쥐며 마구 소리를 질렀다. 백천범이 묵용감을 끌어내릴 줄 알았건만, 설마 자신의 머리채를 낚아챌 줄이야. 천한 계집의 힘이 어찌나 센지, 머리 가죽이 다 벗겨지는 듯했다. 그녀는 백천범의 손을 떼어 내려고 허우적거리는 한편 목청을 높였다.

“셋째 오라버니, 일어나 보십시오. 초왕비가 절 때립니다! 오라버니께서 해결해 주시어요! 오라버니, 보십시오! 왕비가 이렇게나 포악합니다……!”

묵용감은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상태였다. 그의 정신은 아직도 취선루에 머물러 있는지, 의미 없는 손사래만 쳐 댔다. 그러나 어렴풋하게 들리는 왕비라는 말에 그는 반사적으로 눈을 뜨려 했다.

시야가 조금 흐릿하긴 했지만, 백천범의 형상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꼭… 소매를 걷어붙이고 싸움을 하는 것 같았다. 싸움이라니, 큰일이다. 감히 자신의 아내를! 그는 그녀와 싸우는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도 않고 곧장 걷어찼다.

“감히 내 아내에게 손을 대다니!”

그러나 잔뜩 취한 묵용감은 헛발질을 할 뿐이었다. 결국 황보주아가 아니라 그가 바닥에 고꾸라졌다. 바닥에 고꾸라진 충격에 정신이 조금 더 맑아졌다. 묵용감은 가까스로 기둥을 붙들고 몸을 지탱해 일어섰다. 눈을 힘껏 비비고 다시 앞을 바라보니 백천범이 황보주아를 깔아뭉개고 있었다. 화들짝 놀란 그가 서둘러 다가갔다.

“천범, 이러지 마시오. 무슨 일인지 얘기하면 되지 않소. 내가 해결해 줄 테니 이러지 말고 말해 보시오.”

백천범은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이렇게 뻔뻔한 여인은 처음이었다. 어찌 남의 지아비를 품에 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도 사내가 그리우면 밖에서 찾아보면 되지 않는가! 그런데 남의 지아비를 빼앗으려 했으니, 이번 기회에 정신이 바짝 들고 눈물이 쏙 빠질 때까지 때려 줄 작정이었다.

그녀가 작정하면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백천범이 들은 척도 하지 않자 결국 묵용감이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그녀는 여전히 발길질을 멈추지 않았다. 두 손으로 낚아챈 황보주아의 머리채도 놓을 생각이 없었다. 그녀가 짐승처럼 사납게 소리쳤다.

“한 번만 더 내 사내를 넘보면 죽여 버릴 거야!”

그녀의 말에 묵용감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자신이 연관된 일이었다니……! 그러나 지금 그 사실을 깊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일단은 그녀를 진정시키는 게 먼저였다.

황보주아가 발버둥을 치며 하소연했다.

“셋째 오라버니, 왕비가 절 죽이려 합니다! 어서 말려 주십시오. 오라버니께서 절 잊으셨어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왕비의 손에서 죽기 직전인데도 지켜만 보실 겁니까?”

백천범이 어찌나 힘껏 잡아당기는지, 황보주아를 보는 것만으로도 아플 지경이었다. 그러나 백천범은 누구의 말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말리다 못한 그가 하는 수 없이 힘을 주어 그녀의 손을 떼 냈다.

다만 그녀가 황보주아의 머리채를 놓는 순간, 주먹이 그의 얼굴로 날아올 줄 누가 알았을까. 그는 예상치 못한 공격에 얼굴을 정통으로 맞고 말았다.

백천범은 그 틈에 묵용감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녀는 원수를 마주한 듯 묵용감을 노려보며 욕을 퍼부었다.

“망할 연놈들!”

그리곤 손을 털며 자리를 떴다.

백천범에게 힘껏 얻어맞은 묵용감은 한참이나 넋을 놓고 있었다. 그가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렸다.

“왕비가 누구더러 망할 연놈이라는 것이냐?”

황보주아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오라버니, 이 꼴 좀 보십시오. 얼마나 흉포합니까? 저뿐만 아니라 오라버니까지 때리다니요. 흑흑, 절 때린 건 그렇다 쳐도 오라버니는 친왕이십니다. 존귀한 분에게 손을 대다니, 어찌 이리 방자하단 말입니까……!

오라버니, 제 억울함을 풀어 주십시오. 이런 모욕은 처음입니다. 이대로 죽어 버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이리 살 바에야 머리를 자르고 비구니가 되는 게 낫겠습니다……. 흑흑, 부모님이 저승에서 이 모습을 보셨다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실까요. 아버지, 어머니, 제발 저 좀 데려가시어요…….”

통곡하는 그녀의 모습이 묵용감의 마음을 뒤숭숭하게 만들었다. 그가 손을 내저었다.

“알겠다. 그만하거라.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그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힘껏 눌렀다. 어쩌다 누각에 오게 된 걸까.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백천범이 왜 욕을 하고 갔는지였다. 그 말을 듣기엔 그는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자신까지 싸잡아 욕하다니.

그가 여전히 울고 있는 황보주아에게 물었다.

“내가 어쩌다 이곳에 오게 되었느냐?”

황보주아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경악했다.

“오라버니, 어찌 그리 물으십니까? 제가 납치라도 했을까 봐서요? 오라버니께서 찾아오지 않으셨습니까? 오랫동안 찾아오지 않아 제가 보고 싶으셨다고 하셨습니다.”

묵용감은 기가 찼다. 자신이 황보주아에게 ‘몹시 보고 싶다’ 따위의 말을 했을 리가. 누군가 그를 때려죽인다 해도 절대 그딴 말을 입밖으로 낼 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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