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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412)화 (411/1,192)

제412화

연회는 술시가 되어서야 마무리되었다. 꽃 모양의 붉은 등롱이 거리를 길게 수놓았다. 어두운 밤하늘 아래 빛나는 꽃송이가 핀 듯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손님들이 하나둘 돌아간 후, 학평관은 계산을 하기 위해 사성성을 찾아갔다. 사성성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인사치레를 했다.

“어르신, 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 앉아서 차 좀 드십시오. 계산이야 급한 게 아니니 나중에 관저에 갈 일이 있을 때 주시지요.”

학평관은 늘 오수진 주민들에게 예를 갖췄다. 다들 왕비의 친정 식구들이 아니던가. 그가 맞잡은 두 손을 들어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사 주인장, 어찌 예를 차리십니까. 연회를 치른 김에 계산을 끝내야지요. 무엇 하러 번거롭게 성까지 오시게 한단 말입니까? 게다가 왕비 마마께서는 빚지는 걸 아주 싫어하십니다.”

사성성은 몇 마디 인사치레를 더 주고받은 후, 관리인을 불러 계산서를 가져왔다. 그가 계산서에 적힌 숫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오늘은 세자 아기씨의 만월이니, 앞날이 늘 순조로우시라는 의미에서 길한 숫자 육으로 맞춰 드리겠습니다. 나머지는 세자 아기씨께 옷을 지어 드리시지요.”

학평관은 눈이 보이지 않을 만큼 활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찌 그리할 수 있단 말입니까? 왕야께서 오늘 연회에 아주 흡족하셨습니다. 그러니 계산서대로 지불해야 마땅하지요. 게다가 왕야께서 상까지 내리실 겁니다.”

역시 사성성의 짐작대로였다. 일부러 저자세로 나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한 푼도 깎지 않은 건 물론이고 상까지 내릴 듯했다. 그는 차마 그럴 수는 없다며 학평관과 몇 차례 실랑이를 벌이고 난 뒤, 마지못해 돈을 받아들었다. 이렇게 모두의 체면이 세워졌다.

바로 그때, 그들 앞에 백천범이 나타났다.

그녀를 본 순간, 사성성은 자신도 모르게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이상할 정도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술을 마셨는지 백천범의 얼굴이 불그스름했다. 그러나 커다란 눈에는 여전히 영채가 어려 있었다. 사성성은 그녀의 모습에 적잖이 놀랐다. 어찌 볼 때마다 아리따워지는 걸까? 역시 앵앵이가 보는 눈이 있었다. 왕비는 그야말로 절세 미인이니, 초왕과 사장풍이 괜히 왕비를 두고 사투를 벌인 게 아니었다.

그녀가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계산은 다 했어요?”

학평관이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사 주인장이 예를 차리느라 길한 숫자 육으로 맞춰 주겠다지 뭡니까? 남은 돈으론 세자 아기씨께 옷을 지어 드리라고 말입니다. 소인이 차마 그리할 수 없어서…….”

“네, 그리할 순 없죠.”

백천범이 계산서를 자세히 살피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사 주인장, 우리가 알고 지낸 시간이 있지! 어찌 값을 다 받는단 말이에요? 오늘 잔치 규모를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큰 돈을 벌었겠어요!”

“…….”

학평관과 사성성은 순간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잠시 후, 학평관이 백천범의 소매를 슬쩍 잡아당기며 나직이 말했다.

“왕비 마마, 백성들처럼 그리 값을 흥정하시면 체면이…….”

백천범이 활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참, 어르신은 모르셨죠. 사실 저도 장사를 했던 사람이라, 사 주인장과도 몇 차례 거래한 적 있어요. 주인장, 육보다 사가 낫겠네요. 사계절 내내 큰돈을 벌라는 의미잖아요.”

옆에 서 있던 관리인이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주인어른의 장사 수완이 최고인 줄만 알았더니, 초왕비가 훨씬 매서웠다. 물론 그리 맞춘다고 해도 사성성에게 손해는 아니었다. 다만 적당히 버는 정도라, 이윤을 크게 바랄 순 없었다.

하지만 초왕비가 저렇게까지 얘기하는데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사성성은 울며 겨자 먹기로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백천범이 넉살 좋게 웃어 보였다.

“사 주인장, 실망하지 마셔요. 그래도 이윤은 남겼잖아요? 눈앞의 작은 이윤보다 다가올 더 큰 이윤을 보는 게 낫죠. 사실 다른 부인들이 제게 이곳에 대해서 묻더라고요. 풍경도 좋고 음식도 맛있으니 연회를 치를 일이 생기면 이곳에서 하겠대요. 오늘 연회만 놓고 보면 큰 소득은 아니지만, 손님이 많아지면 돈이 제 발로 굴러들어 오지 않겠어요?”

이렇게 영특하고 똑 부러지는 모습을 보니 그가 알던 전범이 분명했다. 오수진을 떠났으니 망정이지, 남아 있었다면 언젠가 취선루의 가장 큰 경쟁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사성성이 맞잡은 두 손을 들어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왕비 마마 말씀이 옳습니다. 마마께서 말씀해 주신 덕담대로 따르겠습니다.”

계산을 마친 뒤, 백천범은 학평관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학평관은 왕비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백천범이 먼저 그의 말문을 막아 버렸다.

“어르신, 앞으로는 허리띠를 졸라매야 해요. 세자가 어리긴 해도 돈 들어갈 데가 얼마나 많은데요. 아이들은 금방 자라니까 몇 개월만 지나도 맞는 옷이 없을 거예요. 더구나 아들이잖아요.

신분도 있는데 매번 왕야의 옷을 수선해서 입힐 수도 없는 노릇이에요. 게다가 스승을 모셔서 글과 무술도 가르쳐야 하고, 나중에 부인도 맞이해야 하니 봉채비며, 약혼이며, 전부 다 돈이라고요…….”

학평관은 그녀를 멀뚱멀뚱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어머니가 되면 사람이 이렇게나 변한단 말인가?’

* * *

수많은 인파가 다시 성으로 향했다. 등롱을 매단 마차의 행렬이 꼭 기다란 용이 꿈틀거리는 듯했다. 오늘은 세자의 만월이니, 동성문을 활짝 열어 두었다. 다만 수문 병력을 평소보다 두세 배가량 늘려 두었다.

병사들이 양쪽에서 대열을 이루어 마차 위에 달린 등롱을 확인했다. 등롱 위에는 가문의 성씨가 적혀 있었다. 성을 나올 때 신고를 마쳤기 때문에 돌아올 때는 자세히 검문하지 않았다.

세자를 안고 마차에 탄 백천범은 비로소 피곤함을 느꼈다. 아이는 이미 잠든 뒤였다. 그녀가 살짝 눈을 감은 채 물었다.

“왕야는?”

월규가 속삭이듯 답했다.

“왕야께서는 태자 전하와 함께 타셨습니다. 저희 뒤쪽에서 오십니다.”

그녀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참, 녹하 언니는 아프다며, 지금은 좀 나아졌으려나?”

월규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를 내었다.

“식사 중에 갑자기 구토를 했습니다. 혹시 회임 증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동 무사님이 보살피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기홍 언니는?”

월규가 엉큼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처럼 기쁜 날은 다들 진탕 먹고 마셨지요. 기홍 언니도 조금 취해서 영구 무사님과 함께 있습니다.”

월규가 발을 걷어 올리고 밖을 내다보았다.

“영구 무사님이 마차에 탄 건 처음 봅니다.”

어느새 다들 짝을 이루었으니, 얼마나 보기 좋은가. 월규의 말에 기분이 좋아진 백천범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월규 너는, 위 의원이랑 어때? 네가 보기에 괜찮으면 왕야께 혼인을 올려 달라고 말씀드릴게.”

월규의 볼이 살짝 붉어졌다. 다른 사람들 얘기는 잘만 하면서 자신의 이야기가 나오면 이리도 수줍어하곤 했다.

“그런 거 아닙니다. 녹하 언니가 허튼소리를 하는 것뿐이에요.”

“왜, 위 의원은 별로래?”

아무래도 그런 듯했다. 그녀는 나름대로 마음을 표현했지만, 위중청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녀에게 별로 관심이 없는 거겠지. 그녀도 그런 식으로 거만한 사람은 별로였다. 궁상맞고 고리타분하기만 하지 않은가.

* * *

그렇게 관저에 돌아왔을 땐 다들 녹초가 된 터라, 서둘러 각자의 처소로 향했다. 백천범은 아이를 데리고 침대에 누웠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묵용감이 돌아오지 않아, 그녀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왕야께서는 왜 아직도 오지 않으시는 거지? 설마 태자 전하의 처소에서 주무시는 거야? 그럼 소식이 와야 하는데.”

월규가 입을 가리며 답했다.

“주무시진 않을 겁니다. 왕야께서는 취하셔도 처소는 꼭 찾아오시니까요. 그저 너무 기쁜 마음에 한 잔 더 하시려는 게 아닐까요?”

백천범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였다.

“그리 술을 많이 드시면 몸이 상하실 텐데. 하인을 보내 모셔오는 게 좋겠어. 세자가 아버지를 보고 싶어 한다고 해 줘.”

“소인이 모셔올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월규는 밖으로 나가 초왕을 모셔 올 시녀를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온 시녀는 혼자였다. 초왕이 태자의 처소에 없었다는 소식을 듣고, 월규와 백천범은 서로를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태자의 처소에 없다니… 그럼 어디에 있단 말인가? 설마 초왕이 관저 안에서 길이라도 잃은 것일까?

월규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술에 취하셔서 다른 곳에서 주무시고 계신 게 아닐까요? 어서 하인들을 모아 왕야를 찾으라고 하겠습니다.”

백천범은 침착하게 그녀를 말렸다.

“어쨌든 관저에 계실 테니 그러지 마. 다들 피곤할 텐데 쉬라고 하고, 월규 넌 세자 좀 보고 있어. 내가 나가서 찾아볼게.”

월규는 그녀의 말대로 할 수 없었다.

“날이 이렇게 어두운데 어딜 가신다는 말씀입니까? 차라리 학 어르신께 말씀드리는 게 낫겠습니다.”

“안 돼. 하인들이 왕야를 찾으면, 내일 얼마나 체면을 구기시겠어.”

백천범이 말했다.

“괜찮아. 련이한테 등불을 비춰 달라고 할 테니까.”

결국 월규가 련이를 불러 왕비 마마를 조심히 모시라고 신신당부했다.

초여름의 밤은 덥지도, 춥지도 않은 상쾌한 날씨였다. 볼을 가볍게 스치는 밤바람은 아기의 손만큼이나 보드라웠다. 백천범은 긴 복도를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경사가 있는 날인 만큼 관저 곳곳에 등롱을 걸어 두었다. 불빛이 정자와 누각 사이를 균일하게 수놓은 광경이 더없이 멋스러웠다. 내일 아침이면 볼 수 없는 광경이기에, 백천범은 이따금 등롱에 눈길을 주었다.

한동안 걷던 그녀가 걸음을 멈추더니 자그마한 누각을 바라보았다. 황보주아는 몸이 불편해 오수진에도 가지 못했건만, 학평관이 그녀를 잘 챙겨 주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녀는 방향을 돌려 누각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그녀를 막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누각의 계단을 반쯤 올라가자 누군가 그녀를 맞이했다.

“이렇게 늦은 시각에 어인 일이십니까? 왕비 마마. 소인, 왕비 마마를 뵈옵니다.”

그녀가 시선을 올려보니 황보주아의 시녀 은옥이 서 있었다.

“아가씨는 주무시는가?”

은옥이 얼른 답했다.

“예, 침소에 드셨습니다. 볼일이 있으시거든, 내일 와 주시지요.”

때마침 머리 위에 달려 있던 등잔불이 은옥의 얼굴을 비스듬하게 비췄다. 그 순간, 당황스러워하는 눈빛이 불빛 아래 똑똑히 드러났다. 그 모습이 의심스러웠던 백천범은 계속 계단을 올랐다.

“아가씨의 몸이 별로 좋지 않다고 들었으니, 내가 좀 봐야겠네.”

은옥이 황급히 그녀를 막아섰다.

“왕비 마마, 아가씨께서는 주무십니다. 게다가 몸도 편찮으시지요. 이 시간에 대뜸 찾아오셔서 처소에 들어가려 하시다뇨. 아니 될 일이옵니다.”

백천범은 순간 멍해졌다. 은옥의 말이 어딘지 익숙했다.

기억을 되짚어 보니 그랬다. 회임 초기, 이곳에서 소란을 피웠을 때 들었던 말과 똑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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