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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411)화 (410/1,192)

제411화

백천범은 신이 난 얼굴로 말했다.

“다섯째 지지 진을 넣어서 이름을 만드는 건 어때요? 날 비를 써서 비진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하늘을 나는 용, 비진. 어때요, 좋지 않아요?”

“…….”

묵용감이 침묵에 잠겼다. 만약 태자가 알게 된다면 그들의 속내를 불순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그건 안 되오. 이 아이는 세자요. 내가 황제가 아니니 그런 이름을 붙일 순 없소.”

그가 고민 끝에 글자를 불렀다.

“린은 어떻소? 기린의 린. 묵용린……. 기린은 상서로운 동물이니 이 이름을 가지면 평안하게 클 수 있을 것이오.”

“좋아요.”

백천범은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을 보였다.

“기린이, 괜찮은데요? 모반과도 비슷하고요. 그럼 아명은요?”

묵용감은 아들의 크고 까만 눈을 바라보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아름다운 옥이란 뜻에서 아들 자子, 옥 유瑜. 자유는 어떻소?”

“좋아요!”

백천범이 존경심을 한가득 담아 그를 바라보았다.

“왕야, 정말 대단하세요.”

감탄하던 그녀가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이렇게 금방 생각해 내시면서, 지난 한 달 동안은 왜 고민하신 거예요?”

“…….”

어쨌든, 이로써 세자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백천범은 세자를 바라보더니 친근하게 린아麟兒라고 불렀다. 그 모습에 살짝 질투가 난 묵용감이 볼멘소리를 냈다.

“아이에게는 린아라고 부르면서 나는 왕야라고 부르는 것이오? 부인과 거리감이 느껴진단 말이오.”

“그럼 뭐라고 불러 드릴까요, 감아?”

“…….”

듣고 보니 왕야라고 부르는 게 나을 듯했다.

“린아의 모반은 그대와 나만 알고 있는 게 좋겠소. 다른 이에게는 절대 말하지 마시오.”

“왜요?”

백천범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월규한테도 말하면 안 돼요?”

“안 되오. 다른 이가 알게 될 때마다 린아에게 위험한 일이 생길 것이오.”

백천범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모반 하나로 위험한 일이 생긴단 말인가? 이상한 일이지만, 묵용감이 진지하게 나오니 불안할 따름이었다. 그녀가 재촉하듯 다시 물었다.

“왕야, 제대로 말씀해 주세요. 린아에게 위험한 일이 어떻게 닥친다는 거예요?”

묵용감이 씁쓸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도 기우이길 바랐다. 그러나 예로부터, 천자의 주변에서 상서로운 조짐을 보인 이는 말로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는 백천범과 태자 사이에 거리가 생길까 싶어 말을 아꼈다. 그렇다고 계속 입을 다물고 있을 수도 없었다. 아들의 앞날이 달렸으니, 그녀는 절대 포기하지 않고 캐물으리라. 그는 하는 수 없이 천자의 금기라고 에둘러 말해 주었다.

백천범은 입을 쩍 벌리며 멍하니 넋을 놓았다.

“고작 용 모양의 모반이 있다는 이유로 처형을 당할 수도 있단 말이에요?”

“둘째 형님은 그런 분이 아니지만, 떠벌리고 다녀선 안 되오. 어쨌든 이런 일은 린아의 안전을 위해 비밀로 하는 게 좋소.”

백천범이 곧바로 근심에 잠겼다.

“만월이 지나면 머리를 밀 텐데… 그땐 들키지 않을까요?”

“위쪽을 조금 길게 남기면 되지 않소.”

묵용감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정수리에 한 줌 정도는 남길 수 있을 테니 잘 가릴 수 있을 것이오.”

사실 머리카락을 헤집어도 자세히 보지 않으면 발견하기 어려웠다. 백천범이 애정을 담아 꼼꼼하게 살폈을 뿐, 다른 이들이 보기엔 아주 작은 무늬일 수도 있었다. 가늘고 긴 검은색 모반은 언뜻 보면 머리카락처럼 보였다.

백천범은 아이의 머리카락을 하나하나 정돈하며 제대로 모반을 가리려 애썼다.

“황제가 되는 게 뭐가 좋은 건지 모르겠어요. 뭘 하든 구속이 따르고 부인도 많이 얻어야 하잖아요. 우리 아들은 그런 걱정 없이 시골 부자가 되어 즐겁게 살면 좋겠어요. 부족함 없이 먹고 마시면서 자유롭게 지내면 얼마나 좋을까요.”

“왜 하필 시골 부자요?”

“사 주인장처럼 말이에요. 왕야도 앵앵이가 얼마나 자유롭게 사는지 보셨죠?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늘 하고 싶은 대로 즐겁게 지내잖아요!”

그 말을 하는 순간, 백천범은 사앵앵이 잘 지내는지 궁금해졌다.

“그러고 보니 서북 지역에는 잘 갔는지 모르겠네요. 서신 한 통 없고.”

묵용감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찌 한 사람만 언급하는 것이오. 다른 하나는?”

백천점은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정말, 꽁하시다니까.”

* * *

초왕과 초왕비 둘 다 겉치레를 싫어했지만, 이번만큼은 사랑스러운 아이를 위해서 큰맘 먹고 태자와 학평관의 뜻을 따랐다. 그들의 말대로 세자에게 성대한 만월 잔치를 열어 주기로 결정되었다.

잔칫상은 오수진의 취선루에 차리기로 했다. 백천범에게 있어 취선루는 집안 경사를 치를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올리는 곳이었다. 물론 성안의 주루가 더 고풍스러운 시설을 갖추고 있었지만, 넓은 공간과 탁 트인 경치를 생각하면 취선루만 한 곳이 없었다.

초여름에 접어든 교외의 경치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나들이를 하든, 낚시를 하든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이었다. 싱그럽게 피어난 초목과 반짝이는 햇살은 어느 곳이든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 주었다.

남쪽에선 아이가 만월이 되면 집 밖을 나가는 풍습이 있었다. 보통은 할머니 댁이나 외숙부댁을 찾곤 했다. 백천범은 오수진을 친정으로 여기는 만큼, 세자를 데리고 예전에 살던 집으로 향했다.

마침 이장이 신경을 써 두었다. 집을 깨끗이 정리하고, 부인을 보내 세자를 위한 오색실을 장식한 뒤 장명쇄까지 걸어 놓은 참이었다. 아이를 축복하는 의미로 외할머니가 해 주는 일이었지만, 백천범은 친정이 없으니 이장 부인이 대신 해 주었다.

월향도 만삭의 몸을 이끌고 양보전과 함께 찾아왔다. 동글동글 윤기가 흐르는 얼굴에 혈색도 좋은 걸 보니 잘 지내는 듯했다.

오랜만에 모인 사람들은 아이를 둘러싸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희고 통통한 아기는 난생처음 수많은 사람의 시선을 받자 신이 나서 팔을 버둥거렸다. 그 모습이 어찌나 힘차고 귀여운지, 다들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백천범이 월향의 배를 바라보며 어르듯이 말했다.

“아가야, 어서 나와서 린아랑 같이 놀아 주렴. 남자아이면 형제를 맺고, 여자아이면…….”

옆에 있던 월규가 헛기침으로 눈치를 주었다. 지난번에 분명히 말했는데, 설마 벌써 잊어버렸단 말인가?

반면 그들과 함께했던 월향이 신호를 놓칠 리가 없었다. 의형제야 괜찮지만 신분 차이를 생각하면 부부는 절대 안 될 일이었다. 왕비는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해도, 왕야는 절대 인정하지 않을 터였다. 월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여자아이면 남매처럼 지내면 되지요. 세자 아기씨 같은 오라버니가 있다면 저희 딸은 복을 쥐고 태어난 셈입니다.”

백천범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형제든 남매든 둘이 짝만 되면 되지, 뭐.”

다시 생각해 보니 어릴 때 배필을 정해 주는 건 옳지 않은 듯했다. 서로 간에 인연이 있고 없고는 때가 되면 알 일이었다. 만약 배필을 정해 두었다가 두 아이가 서로를 좋아하지 않으면 부모를 원망하게 될지도 몰랐다.

마을이 생긴 이래로 오수진이 이처럼 떠들썩한 적이 없었다. 수성에서 내로라하는 거물들은 물론이고 금릉과 운성에서 오는 이들까지 꼬리에 꼬리를 무니, 마차 행렬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수많은 사람이 한데 모여 서로 인사를 나누느라 분주했다.

이날만큼은 초왕도 겉치장에 조금 신경을 썼다. 머리에 큼직한 흑요석이 박힌 금관을 쓰니, 햇빛이 비칠 때마다 눈이 부실 정도로 번쩍였다. 거기에 자줏빛 친왕복을 입었는데, 가슴 한가운데에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 생동감이 넘치는 사조금룡이 새겨져 있었다. 허리에는 청백색 옥대를 맨 뒤, 오색 술이 달린 끈을 늘어뜨렸다.

오늘 그는 진심으로 기뻤다. 사랑스러운 부인과 아기를 데리고 많은 이들의 축하를 받고 있으니,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그조차 기쁜 마음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그는 활짝 웃는 얼굴로 손님들을 맞이하기 바빴다.

평소 온화하고 고상한 성격의 태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오늘은 군주가 아닌 백부의 신분으로 바쁘게 손님들에게 인사를 건네며 잔치를 도왔다. 그에게 인사를 받은 손님들은 황송함에 어쩔 줄 몰라 했다. 마음 같아서는 무릎을 꿇고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수많은 별이 달을 에워싸듯, 그들은 활짝 웃으며 태자 주변을 맴돌았다.

백천범의 주변은 전부 부녀자들로 채워졌다. 나이가 지긋한 관료 부인들, 젊은 아씨들 할 것 없이 그녀에게 세자를 치켜세우는 말을 늘어놓았다. 어찌나 칭찬을 늘어놓는지 천계에 있어야 할 이가 속세로 떨어졌다고 해도 믿을 만한 수준이었다.

그녀는 대부분 알아듣지 못했지만, 어쨌든 좋은 의미라는 건 알아들었다. 그녀는 오늘의 주인공인 아들을 보며 점점 더 의기양양해졌다. 이렇게 뛰어난 아들이 그녀의 배 속에서 나오다니!

오늘 가장 바쁜 사람은 학평관이었다. 그는 연신 웃는 낯으로 굽실거리며 인사를 건넸다. 어디에 있든 높게 찌르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아이고, 오셨습니까! 어서 위층으로 드시지요.”

“아이고, 한 장군님! 오셨습니까? 왕야께서는 별실에 계십니다. 자리를 마련해 두었으니 어서 드시지요.”

“왕비 마마의 본가에 계시는 전 주인장이 아니십니까? 선물은 이쪽입니다.”

“장 부지사님, 오셨습니까? 먼 길을 오시느라 노고 많으셨습니다. 별실로 드시지요. 태자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 층 창가에 서 있던 사성성은 떠들썩한 모습을 보니 어쩐지 서글픈 기분이 밀려왔다. 만약 이 자리에 딸과 사위도 함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쉽게도 같은 산자락에 범 두 마리가 살 수는 없는 법. 초왕이 있는 곳에 사장풍은 나타날 수 없었다.

손님이 너무 많은 탓에 연회를 점심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치러야 했다. 한 번 치를 때마다 연회상을 세 번 넘게 차리곤 했다. 사성성은 성안에 있는 다른 주루의 점원들까지 전부 불러왔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관리인과 함께 소매를 걷어붙이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직접 일을 도왔다.

몸은 분주하지만, 얼굴은 활짝 편 관리인이 시시덕거렸다.

“주인 어르신, 초왕야께서는 화통하신 분이니 이번 연회로 큰돈을 벌겠습니다.”

사성성은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치며 헤벌쭉 웃었다.

“그럼. 오늘 제대로 힘 써 봐야지. 나중에 상도 내리실 게 분명해. 조만간 현판을 하나 만들어야겠다. 세자 아기씨의 만월 잔치를 한 곳이라고 적어 두면 연회를 앞둔 성안 고관 나리들이 기를 받으려고 몰려들지 않겠는가.”

관리인은 그의 장사 수완에 감탄을 멈추지 못했다.

“역시 주인 어르신은 대단하십니다. 어르신이 돈을 못 버시면 누가 벌겠습니까? 이대로라면 어르신 재산이 나랏돈만큼이나 많아지겠습니다.”

사성성은 절로 득의양양했다. 그간 큰돈을 모을 수 있었던 건 그가 똑똑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돈을 벌 기회를 절대 놓치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마음을 숨기고 겸손한 표정을 유지했다.

“아이고, 그런 말을 함부로 하다니. 태자 전하와 초왕야께서 별실에 계시거늘. 그분들이야말로 천하에서 가장 큰 부를 누릴 분들이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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