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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410)화 (409/1,192)

제410화

하지만 아무도 그들을 내보내려 하지 않았다. 게다가 식사 때마다 맛있는 끼니를 챙겨 주었고, 월말에는 품삯까지 제때 지급했다. 심지어 눈치를 주는 이들도 없었다. 이렇게 받고만 있으니, 두 사람은 가시방석에 앉은 듯했다. 결국 유모가 먼저 운을 떼었다.

“보모는 조금이라도 일손을 거들지만 저는 정말 할 일이 없습니다. 아무리 가진 게 없는 사람일지언정, 돈만 받고 일을 안 할 수는 없지요. 젖도 말랐으니 정성껏 모시고 싶어도 그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전 이만 돌아가야겠습니다.”

사실 보모도 다를 것 없는 처지였다.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저랑 함께 가십시다. 조금씩 일손을 거든다고는 해도 제 속이 말이 아닙니다. 궂은일은 왕비께서 다 하시고, 제가 도우려고 하면 싫어하십니다. 주인이 하인의 일을 하다니요. 더욱이 게다가 아가씨들도 제 일을 뺏는 바람에 고달프긴 매한가지입니다…….”

처지를 늘어놓을수록 서글퍼진 탓에, 두 사람은 곧장 사직을 청하러 학평관을 찾아갔다.

학평관은 곧바로 난처해졌다. 이미 백천범에게서 두 사람을 관저에 두고 급여를 잘 챙겨 주라는 분부를 받지 않았던가. 그런데 두 사람이 나가겠다고 할 줄이야…….

“혹 불편한 점이라도 있습니까? 어찌 두 분이 함께 그만두겠다고 하는지요?”

보모가 어쩔 도리가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어르신,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게 있어야지요. 이렇게 놀고먹는 처지로 지내자니 송구해서 차마 지낼 수가 없습니다. 놀고먹으며 돈을 받는다면 안 될 일입니다. 저희는 그만 관저를 떠나는 게 좋겠습니다.”

사실 두 사람 정도는 놀고먹어도 상관없었지만, 워낙 강경하게 나오니 말릴 수도 없었다. 결국 학평관은 백천범을 찾아가 고했다.

백천범 역시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왜 나가겠다는 거예요? 누가 괴롭히기라도 했어요?”

학평관이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왕비 말고 그들을 괴롭힐 사람이 누가 있을까…….

요람 앞에서 세자와 놀아주던 녹하가 놀리듯 말했다.

“왕비 마마, 마마께서 그들의 일을 빼앗으셨으니 안 떠나고 배기겠습니까?”

학평관이 얼른 맞장구를 쳤다.

“맞습니다. 두 사람 다 놀고먹으며 돈을 받을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백천범이 살짝 놀라 고개를 휘휘 저었다.

“일을 빼앗다니요. 세자가 더 크면 제 모유로는 부족할 테니 유모가 꼭 필요해요. 게다가 모르는 건 보모에게 늘 물어보는데, 두 사람이 놀고먹다니요! 계속 관저에 남아 있으라고 해 주세요. 두 사람이 도울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때, 월규가 끼어들었다.

“세자 아기씨가 오 개월쯤 되면 유모는 젖을 물릴 수가 없습니다. 지금도 한 달이 다 되었으니, 젖이 거의 말랐겠지요.”

백천범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월규 네가 어찌 알아?”

“위 의원이 말해 주었습니다.”

그 말에 녹하가 도끼눈을 뜨고 물었다.

“출가도 하지 않은 아가씨가 위 의원이랑 그런 얘길 했단 말야?”

“…왕야께서 왕비 마마의 수유를 반대하시길래 하는 수 없이 물어봤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던 백천범은 보모와 유모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었다. 직접 아이를 돌보고 싶은 마음이 그들에게 피해를 주고 말았다. 더욱이 생각할수록 월규의 말이 맞았다. 젖이 말랐을 테니 유모는 붙잡아도 소용없었다. 그래도 보모는 남겨 두고 싶었다.

녹하가 고개를 저었다.

“내보내시려면 함께 보내셔야지요. 저희도 세자 아기씨를 모시는 일이 손에 익었습니다. 저희만으로도 괜찮을 겁니다.”

월규가 그런 그녀를 놀리듯이 말했다.

“제가 보기엔 녹하 언니가 제일 적극적입니다. 나중에 아기가 생겼을 때를 대비해 배워 두시려는지요? 녹하 언니께서도 왕비 마마처럼 직접 아이를 기르시려고요?”

녹하가 대번에 쏘아붙였다.

“점점 말재주만 느는구나. 위 의원한테 장가나 오라고 해. 그 입은 위 의원한테 맞설 때나 쓰라고.”

얼굴이 붉어진 월규가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요람 주변을 빙빙 돌며 깔깔 웃었고, 세자가 희고 통통한 손을 흔들며 그녀들의 소란을 지켜보았다.

백천범은 아기를 안아 들고 학평관을 돌아보았다.

“어쩔 수 없죠. 일 년 동안 일하는 걸로 계약을 했으니 일 년치 급여를 지불해 주세요. 참, 얼마 전에 태자 전하께서 세자에게 옷감 몇 필을 보내셨는데, 옷은 이미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요. 지금도 세자가 다 입을 수 없을 정도이니 두 사람에게 한 필씩 나눠 주세요. 그동안 고생했다고 꼭 말씀해 주시고요.”

학평관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녕 그가 알던 엉뚱하고 어린 왕비가 맞단 말인가? 역시 어머니가 되니 예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다. 이제 그녀에게서 안주인의 풍모를 엿볼 수 있을 정도였다.

녹하가 혀를 내둘렀다.

“왕비 마마, 정말 배포가 크십니다. 일 년 치 임금을 주는 것도 모자라 좋은 옷감까지 상으로 주시다니요.”

백천범이 아이를 안은 채 몸을 가볍게 움직였다.

“그 옷감은 문양이 화려해서 아기 옷에나 어울려요. 걱정하지 마세요. 언니가 아이를 낳을 땐 더 좋은 걸 선물할게요.”

녹하의 얼굴도 불타오르듯 붉어졌다.

“옷감이 부러워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마마.”

월규가 얼른 끼어들었다.

“언니도 혼사를 올린 지 제법 지났는데 어째서 아무 소식도 없는 것이에요? 보세요, 세자 아기씨는 옷이 너무 많아서 다 입지도 못하십니다. 세자 아기씨의 물건들이 이리도 많으니 아이만 낳으면 됩니다.”

녹하는 왕비 앞에서 불경한 말을 할 순 없었지만, 월규에게는 거리낌이 없었다.

“입만 열면 이 얘길 하는 걸 보니 시집 가고 싶어 죽겠구나? 너나 서둘러야지. 세자 아기씨의 옷은 여러 아기가 입을 수 있을 정도로 많으니까.”

* * *

학평관의 말을 들은 보모와 유모는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왕비가 이렇게까지 해 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따지고 보면 초왕비가 먼저 계약을 어긴 상황이나, 그들과 왕비 사이의 신분의 차이가 커도 너무 컸다. 감히 따져 볼 엄두도 나지 않은 터였다.

그런데 초왕비가 먼저 일 년 치 임금뿐만 아니라 상으로 옷감까지 내릴 줄이야! 그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두 사람은 서둘러 왕비에게 감사 인사를 올리기 위해 방으로 달려갔다. 무릎을 꿇은 두 사람은 연신 감사 인사를 올렸다. 어찌나 감동했는지, 그들의 인사에 진심이 담겨 있었다. 백천범은 아기를 녹하에게 맡기고 두 사람의 팔뚝을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제가 두 분에게 사과해야죠. 공연히 헛물을 켜게 했잖아요. 관저에 있는 동안 정성껏 세자를 돌봐 줘서 고마워요. 앞으로 어려운 일이 있거든 언제든 절 찾아오세요.”

그녀의 말에 두 사람은 눈물까지 글썽였다. 다시 절을 올리려 했지만 백천범이 서둘러 말렸고, 직접 문 앞까지 두 사람을 배웅했다.

그녀는 그들과 세자가 인연이 있으니 만난 거라고 믿었다. 짧은 기간이라도 세자가 유모의 젖을 먹고 보모의 돌봄을 받았으니 그녀도 그들의 은혜를 입은 셈이지 않은가.

* * *

관저로 돌아온 초왕은 유모와 보모의 사직 소식을 듣고 얼굴을 굳혔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도 보모와 유모 못지않게 괴로운 시간을 보내던 차였다.

백천범은 요즘 아들만 곁에 있으면 전부인 듯했다. 낮에도 아들에게서 떨어질 생각이 없었고, 밤에도 옆에 두고 재웠다. 아이가 요람 속에서 혼자 버둥대다가 얼굴이 이불에 눌릴까 걱정된다는 이유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저리 많은 시녀들이 무얼 위해 있단 말인가? 설령 시녀들이 발견하지 못했다 해도 보모가 지켜보면 될 일이다. 다들 이런 일을 맡기기 위해 들인 사람이 아니던가. 그러나 백천범은 아이와 한사코 떨어지려 하지 않았고, 기어이 두 사람 사이에서 아이를 재웠다.

자그마한 아이가 옆에 누워 있으니 그는 겁이 났다. 혹여 자신의 몸에 아이가 눌리면 어찌한단 말인가? 결국 그는 침대 가장자리에서 잠을 청했고, 그 불안정함에 이따금 놀라 깨어나기도 했다.

그가 불만을 털어놓자, 백천범도 순순히 받아들였다. 대신 그녀는 아이를 안쪽에 두고 등을 돌려 옆으로 누운 채 아이와 한 몸이 되었다. 그는 완벽히 찬밥 신세가 되었다.

그가 넉살 좋게 다가가 뭐라도 해 보려고 하면, 그녀는 아이를 핑계 삼아 피했다. 아이도 동그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 대는 게 그를 호시탐탐 경계하는 듯했다. 두 모자가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니 들떴던 마음이 그대로 사그라들었다.

산후조리도 얼마 뒤면 끝난다. 그날을 기다리며 오랜 시간 참아왔지만, 어째 그가 기다리는 좋은 날은 점점 더 멀어지는 듯했다. 산후조리를 하는 내내 백천범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아이만 돌봤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터였다.

누군가 이 광경을 보면 크게 비웃으리라. 그녀를 두고 자신의 아들과 경쟁한다니!

그렇다고 계속 이렇게 지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부인을 얻고 어머니를 잊는다는 말은 들어 보았어도, 아들을 얻고 지아비를 잊는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며칠간 어떻게 해야 아이를 유모와 보모에게 맡길 수 있을지 고민했건만, 두 사람마저 떠났다니, 가망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래도 그는 그녀를 탓할 수 없었다. 원망해 봤자 욕만 얻어먹을 게 뻔했다. 아이의 이름을 짓겠다고 말한 지 한 달이 되었지만 그는 글자 하나 정하지 못했다. 서책을 몇 권이나 뒤지며 좋은 한자를 찾으려 애썼지만, 마음에 드는 글자가 몇 개 되지 않았다. 애초에 영특하고 뛰어난 세자에게는 어울리는 글자는 많지 않았다.

결국 그는 보모와 유모를 내보낸 일에 별 대꾸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나 마음속에 품어 둔 불만은 사라지지 않았다.

백천범은 여느 때처럼 아기의 이름을 물었다.

“아직도 생각 못 하신 거예요?”

그녀가 아이의 포동포동한 팔을 잡고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그냥 장장이로 해요. 이것 보세요, 얼마나 튼실한지.”

“…….”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한 달이나 고민했는데 그리 촌스러운 이름을 붙일 순 없었다.

“그래도… 조금만 더 고민해 보겠소.”

“이제 곧 만월滿月(아기가 태어난 지 만 한 달이 되는 시기)이라고요. 총관리인은 벌써부터 만월 잔치를 준비하느라 분주한데, 왕야는 어떻게 된 거예요. 이렇게 꾸물대는 아버지는 본 적이 없어요.”

그녀가 품에 안긴 아기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나긋하게 말했다.

“우리 아기 머리카락 좀 보세요. 가늘고 부드러운 게 꼭 여인의 머리카락 같아요.”

묵용감이 슬쩍 힐끔거리며 말했다.

“배냇머리라오. 만 한 달이 되면 밀어야 하니 소용없소.”

“머리카락이 없으면 못생겨지지 않을까요?”

백천범이 아이의 머리를 조심히 쓰다듬었다.

“우리 아들은 두상이 예쁘니 다행이에요. 동글동글한 게 머리를 빡빡 밀어도 예쁘겠죠. 엥, 이게 뭐지?”

그때, 아이의 정수리 부근을 조심스레 헤집던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와, 여기 자그마한 금룡 한 마리가 있어요.”

그 말에 묵용감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태어났을 당시 보모가 온몸을 구석구석 살펴보았는데, 그땐 모반母斑 하나 없이 깨끗하다고 했다. 세자를 보고 새하얀 백옥 같다더니, 정수리의 점이 머리카락에 가려 보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정말 유유히 헤엄치는 용처럼 보였다. 머리를 당당하게 든 데다, 몸 아래에 발처럼 보이는 작은 모양도 또렷했다. 초왕은 자신도 모르게 기쁨에 잠겼다. 역시 그의 아들다웠다. 모반마저 이리 비범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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