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9화
계속 젖이 나오지 않으니, 백천범은 수유를 포기한 상태였다. 한데 사흘째 되는 날, 가슴이 퉁퉁 붓더니 갑작스레 젖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서둘러 아이를 데려오라고 분부했다. 젖이 나온다는 말에 시녀들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어찌 갑작스레 나온단 말인가? 시녀들은 초왕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묵용감은 시녀들을 물린 뒤 한껏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천범, 우리 아들은 유모가 돌봐도 충분하오. 아니면, 크흠, 내가 처리하겠소.”
그 말에 백천범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녀는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하다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천하에 자식 걸 뺏어 먹는 아버지가 어디 있단 말이에요! 정말 낯짝도 두꺼우십니다!”
묵용감이 곧바로 얼굴을 붉혔다.
“부어오르지 않았소. 내버려 두면 통증을 견디기 힘들 것이오.”
백천범은 그의 말을 맞받아치기도 성가셨다. 그녀가 휘휘 손을 내저었다.
“꾸물대지 말고 아이를 데려오라고 해 주세요. 제가 직접 먹일 거니까요.”
묵용감이 필사적으로 핑계를 댔다.
“아이는 좀 전에 배불리 먹었소.”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오늘 젖을 물리면 앞으로 누구도 그녀를 말릴 수 없을 터였다.
“작은 아이들은 금방금방 배가 고프다고요. 어서 데려와요. 먹든 안 먹든 아기 마음이지, 왕야께서 결정하실 일이 아니에요.”
“천범, 그대가 모유를 먹이면, 유모는! 유모의 사정도 생각해 보시오. 매달 돈을 벌어 집안에 보태야 하는데 유모의 밥그릇을 빼앗으면 어쩌자는 거요?”
인정 많은 백천범이었지만, 이번에는 넘어가지 않았다.
“우리 아들은 대식가라서 제가 먹이는 걸로는 부족할 거예요. 유모와 제가 함께 먹이면 돼요.”
묵용감이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돼지가 환생한 것도 아니고… 우리 아들 혼자서 두 사람의 몫을 먹는단 말이오?”
“지금은 충분해도 사오 개월쯤 되면 부족할 거예요. 우리 아들은 튼튼하잖아요. 많이 먹을 게 분명해요.”
말을 하면서도 백천범은 정말 괴로웠다. 마치 겨드랑이에 단단하고 뾰족한 돌이 낀 듯 아프기 그지없었다. 그녀가 울상이 되어 말했다.
“정말 아이를 안 데려올 거예요? 제가 이렇게 괴로운데 신경도 안 쓰시고……! 절 아낀다는 말도 다 거짓이었던 거예요?”
덤터기를 씌우는 말에 초왕도 방법이 없었다. 어차피 그녀와 말싸움으로 이길 수도 없었다. 그녀가 하자는 대로 따라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아이를 데려오라고 소리쳤다.
아이가 오는 동안, 백천범은 침대 맡에 등을 기대고 기쁜 마음으로 기다렸다. 그러나 막상 옷을 걷어 올리고 아이에게 젖을 물리자, 세상에……! 그녀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누군가가 그녀의 가슴을 찢어 놓는 듯 아프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가까스로 이를 악물고 참았다. 옆에서 보고 있던 묵용감의 심장이 벌렁거릴 정도로 힘겨운 모습이었다.
“아픈 게 아니오? 그만두시오. 그대가 할 수 없는 일이오. 편히 유모에게 맡깁시다.”
일을 잃을까 안달이 난 유모도 옆에서 그녀를 타일렀다.
“왕비 마마, 어찌 마마께서 직접 하십니까? 아기들은 힘 조절을 못 해 통증이 심합니다. 살갗이 한 겹 떨어지는 것처럼 아프지요. 차라리 소인이 하겠습니다. 세자 아기씨께서 힘이 세시더군요. 잘못하다 피가 날 수도 있습니다.”
말만 들어도 묵용감은 겁이 나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가 아이를 데려가려 하자 백천범이 이를 악문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가만히 계세요. 저는 참을 수 있어요. 익숙해지면 괜찮을 거예요.”
문밖에 서 있던 학평관은 기홍에게 타락차를 만들라고 분부했다. 초왕의 명이 떨어지면 곧장 올릴 생각이었다. 일찍이 궁에 있었던 그는 친왕비가 아이에게 젖을 물린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젖몸살을 방지하기 위함이기도 했고, 오히려 지나친 사랑이 아이를 망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작위를 이어받으면 큰일을 할지도 모르니 아무리 어려도 응석받이로 키우면 안 된다는 생각이 짙게 깔려 있었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이유는, 몸매가 망가져 부군의 총애를 잃을까 하는 우려였다. 그러나 초왕비는 그 이유에서 예외이리라. 초왕처럼 일편단심인 부군은 참으로 드물었다. 그녀가 불구가 된다 한들, 초왕의 마음은 절대 변하지 않고 오직 그녀에게 있을 터였다.
유모의 말처럼, 아기는 자그마한 몸집과 달리 힘이 셌다. 꼭 작은 들짐승처럼 젖을 빨면서 헤적대곤 했다. 덕분에 국화처럼 새하얀 가슴이 초왕의 눈앞에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훑으며 물었다.
“듣자니 맛이 좋은 것도 아니라던데, 어찌 이리 힘껏 먹으려 드는 것이오?”
백천범이 그를 힐끗거렸다.
“왕야께서는 젖을 먹고 자라지 않은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묵용감이 멋쩍어하며 말했다.
“어찌 어릴 때 일을 기억하겠소. 젖을 끊고 유모를 돌려보냈으니 기억나지 않소.”
그 말에 유모가 떠올라, 백천범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그녀는 세자의 머리를 가볍게 어루만졌다. 유모가 그녀의 아기를 보았다면 얼마나 기뻐했을까? 아쉽게도 유모는 너무나 일찍 떠나 버렸다.
어두워진 그녀의 안색을 보자마자, 묵용감은 그녀의 생각을 알아차렸다.
“여름이 지나면 인부를 불러 유모의 묘를 옮겨 오겠소. 앞으로 명절을 쇨 때마다 유모의 제를 올립시다.”
백천범은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론 걱정이 되는 듯 머뭇거렸다.
“정말요? 혹여 묘를 옮기다 북쪽 황제께서 아시기라도 하면…….”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오.”
묵용감이 그녀를 다정히 위로했다.
“황제께서도 효심이 크신 분이니, 아셔도 우리를 난처하게 하진 않을 것이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백천범은 다행이라는 듯 품에 안긴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태비 마마도 모셔 오는 게 어때요? 그럼 가족이 온전하게 모이는 거잖아요.”
그녀의 말에 묵용감이 흠칫 놀랐다. 설마 그녀가 먼저 말을 꺼낼 줄이야. 그가 그녀의 의중을 떠보듯 슬쩍 물었다.
“정말 모셔 오길 원하오?”
서 태비에게 지독하게 당하지 않았던가.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던 차였다.
“그럼요.”
백천범이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태비께서는 왕야의 친모이자 우리 세자의 할머니시잖아요. 제가 원치 않을 리가요.”
그녀가 예전 일을 떠올린 듯 미소를 지었다.
“태비 마마께선 제가 규율을 모르는 탓에 싫어하셨죠. 그래도 손자를 낳아 드렸으니 조금은 바뀌지 않으셨을까요?”
“맞소.”
묵용감이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오래 보아야 마음을 느낄 수 있다고 하였소. 태비께서도 분명 그대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아실 것이오.”
한참 젖을 먹던 세자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볼수록 사랑스러운 아기였다. 백천범은 고개를 숙여 살며시 입을 맞췄다. 유모가 잠든 세자를 데려가기 위해 손을 뻗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왕비 마마. 이제 소인이 데려가지요.”
백천범이 천천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제 옆에서 재울게요.”
그녀는 아기를 내려놓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오히려 아이를 더 단단히 껴안고 알 수 없는 노래까지 조용히 흥얼거렸다.
유모가 다시 그녀를 타이르려고 했지만, 묵용감이 손을 내저었다. 물러나라는 의미였다.
유모가 계속 머뭇거리자 월규가 그녀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두 사람이 밖으로 나오기 무섭게, 기다리고 있던 기홍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어때, 마마께서 세자 아기씨께 수유를 하셨어?”
월규가 기뻐하며 답했다.
“역시 친어머니를 알아보나 봅니다. 세자 아기씨께서 아주 신이 나서 드십니다.”
유모는 입을 삐죽거렸다. 엄청난 경쟁을 뚫고 관저에 들어온 그녀는 자신에게 큰 복이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세자를 돌보면 음덕을 입을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마음이 들뜨기까지 했다. 그러나 다른 부인들과 달리 초왕비가 직접 모유를 먹이려고 할 줄이야. 그때부터 좋지 않은 예감이 들더니, 이제는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기홍이 문득 떠올린 듯 말했다.
“혹시 몰라서 타락차를 우렸는데 드릴 필요 없어졌네."
월규가 유모를 놀리듯 히죽 웃었다.
“왕비께서 직접 수유를 하시니 이 차는 유모께서 드시는 게 어떠신지요?”
유모의 안색은 돌처럼 굳어졌다. 그녀는 가까스로 억지웃음을 보이다 쌩하니 자리를 옮겼다.
* * *
방 안에 있던 세 식구는 더없이 화기애애했다. 배가 부른 세자는 곤히 잠들었다. 초왕이 부인의 가슴을 슬쩍 보며 말했다.
“아직도 부풀어 있소?”
백천범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쪽은 막혔던 게 뚫린 느낌인데 한쪽은 아직 불어 있어요.”
“하면.”
그가 넉살 좋게 웃으며 다가갔다.
“좀 뚫어 주오?”
어찌 그의 속내를 모를까. 그녀가 손가락으로 그의 이마를 찔렀다.
“맛이 궁금하다고 솔직히 말하면 되지, 뚫어 준다니요.”
얼굴이 붉어진 묵용감이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대가 괴로울까 봐 꺼낸 말이니, 내 마음을 왜곡하지 마시오.”
그 말에 백천범이 한쪽 옷깃을 훌러덩 젖혔다.
“자요.”
잠시 뒤, 초왕이 입맛을 다시며 신중한 표정을 지었다. 뭐라 말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했다.
“…어때요?”
백천범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맛있어요?”
그가 부끄러운 듯 짧은 웃음을 흘렸다.
“조금 비릿하오. 그대 것이니 넘겼지, 다른 이의 것이라면 이러지 못했을 것이오.”
“다른 이라고요?”
백천범의 언성이 높아졌다.
“누구 걸 그리 드시고 싶으신데요?”
* * *
유모의 예감은 적중했다. 그날 이후로 유모는 세자에게 젖을 물리지 못했다. 초왕비는 그녀의 일뿐만 아니라 보모의 일까지 빼앗아 갔다. 지겨운 산후조리를 하는 동안 세자를 곁에서 보고 싶다는 게 이유였다.
그녀는 세자에게 직접 젖을 물리고 기저귀를 가는 것도 모자라 목욕까지 시켰다. 대부분의 일을 배우지도 않고 홀로 해내니, 보모는 속으로 그녀를 칭찬할 수밖에 없었다.
일반 백성의 며느리들도 서툴게 하는 일을, 그녀는 싫은 기색 하나 없이 해냈다. 예전부터 초왕비가 남다르다는 소리는 들어왔지만, 직접 보니 역시나 비범한 사람이었다.
초왕비가 대견한 것과는 별개로, 보모와 유모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이대로라면 일자리가 사라질 판이었다. 두 사람은 방에 앉아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유모가 울상이 되어 입을 열었다.
“계속 이러시면 저도 방법이 없습니다. 매일 제때에 젖을 짜내야 한단 말입니다. 이대로라면 곧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지겠지요. 마마께서는 그 괴로움을 겪어 보셨으면서 어찌 제 고통은 몰라주실까요? 이러다간 관저를 나가야 할 듯합니다.”
보모도 한숨을 푹 내쉬며 답했다.
“이곳에 들어왔을 땐 유모와 보모를 잔뜩 들이는 저택과는 다르다고 얼마나 좋아했습니까? 시답잖은 일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보석을 주운 기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마저도 시답잖은 존재가 될 줄 알았겠습니까? 우리가 말하지 않아도 자연히 먼저 내쫓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