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8화
“알겠소. 그보다, 아이 이름은 생각해 둔 게 있소?”
백천범이 활짝 웃으며 손을 펼쳤다.
“다섯 개나 생각해 두었어요. 왕야, 어떤 게 좋을지 한번 들어 보세요.”
그가 웃으며 대꾸했다.
“알겠소. 들어 볼 테니 말해 보시오.”
“소보小寶, 주자柱子, 철단鐵蛋, 구구球球, 장장壯壯이요.”
“…그게 그대가 생각한 이름이란 말이오?”
“옛날에 유모가 그랬어요. 유모네 고향에서는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지 못할까 봐 일부러 이름을 소박하게 짓는대요. 이름이 소탈할수록 하늘이 지켜준다고 하니, 이건 어릴 때 쓰는 아명으로 해요. 왕야께서 제대로 된 이름을 지어 주세요.”
묵용감이 그녀를 흘겨보았다.
“내 지위를 물려받을 장자인데 아명이 소보나 철단이면, 커서 그대를 원망하지 않겠소?”
백천범이 다소 민망한 듯 미소를 지었다.
“그저 건강하게 자라라는 마음으로 지은 이름인걸요.”
“다시 고민해 보는 게 좋겠소. 황금 열쇠를 지니고 태어난 귀족의 신분이오. 아명이든 본래 이름이든 부족함이 없어야 하오. 곧 종인부宗人府(황가 종실 사무를 관리하던 기관)에서 황실 족보에 올릴 이름이란 말이오.”
백천범이 입을 삐죽였다.
“그런 고상한 건 잘 모르겠으니 왕야께서 알아서 하세요. 그저 좋은 아명이면 좋겠어요. 사실 구구나 장장도 마음에 들어요.”
“아이도 언젠간 클 것 아니오. 스무 살이나 되어서도 구구와 장장이라 불리면 체면이 어찌 되겠소?”
그 말에 백천범이 곰곰이 생각하다 말했다.
“그럼 내일 서책 몇 권만 좀 가져다주세요. 제가 입에 착착 감기고 여든 살이 되어도 듣기 좋은 이름으로 골라 볼 테니까요.”
묵용감은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그가 그녀의 볼을 가볍게 꼬집었다.
“되었소. 산후에는 눈이 나빠질 수도 있으니 책을 읽으면 안 된다고 하오. 이름을 짓는 건 내가 알아서 하겠소. 안 그래도 녹하가 잔소리를 하더군. 왕비에게 세자의 작명을 맡기면 토끼들에게 붙인 것처럼 황당한 이름이 나올 거라고 말이오.”
* * *
말로는 아기를 원망했지만, 막상 이름을 지으려고 하니 초왕은 누구보다 신중해졌다. 백천범이 잠든 후 서재로 향해 서책을 뒤적거렸지만, 도통 마음에 드는 이름을 고를 수 없었다. 눈이 다 시큰거릴 정도로 서책을 넘기던 그가 결국 두꺼운 책을 덮고 미간을 구겼다.
묵용감은 곧 그녀를 살피기 위해 다시 침실로 향했다. 방 안에서는 월규가 세자에게 줄 인형을 만드는 데 열을 올리고 있었다. 세자는 그녀가 모셔야 하는 주인이었지만, 속으로는 조카라고 여기며 진심으로 정을 주었다. 월규는 아기를 위해 무엇이든 다 해 주고 싶었다.
적막이 내려앉을 만큼 집중하던 월규는 안으로 들어온 묵용감을 보고 급히 일어나 인사를 올렸다. 조용히 해야 한다는 손짓도 잊지 않았다.
묵용감은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장막 안을 들여다보았다. 백천범은 이불을 덮은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는 이불을 잘 여며주고 잠시 그녀를 지켜보다 밖으로 나섰다.
그의 발걸음은 바로 옆방인 세자의 방으로 향했다. 마침 보모와 유모가 아이를 어르며 돌보고 있었다. 그가 안으로 들어오자 두 사람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묵용감은 무표정한 얼굴로 아이를 들여다보았다.
신기하게도, 이틀 전엔 빨간 새끼 쥐처럼 보였던 아이는 새하얀 얼굴로 까만 눈을 뜨고 있었다. 크고 까만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는 모습이 참으로 영특하게 보였다. 보면 볼수록 그녀 못지 않게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보모가 다가와 공손히 말했다.
“용은 용을 낳고, 봉황은 봉황을 낳는다더니… 우리 세자 아기씨는 정말 다른 아기들과는 확연하게 차이가 납니다. 소인은 이틀 만에 얼굴이 활짝 핀 아기는 처음 보았습니다. 이 커다란 눈을 보십시오, 왕야. 까맣게 빛나는 눈동자가 아주 귀여우십니다.”
그녀의 말처럼 정말 귀여웠다. 아기를 빤히 바라보던 묵용감은 마음이 천천히 녹아내리는 기분을 느꼈다. 이 아이가 바로 백천범이 낳은 두 사람의 피붙이였다. 그 사실만으로도 그는 아기를 어여삐 아끼고 사랑해 주어야 했다.
한데 생김새는 누굴 닮았단 말인가? 그는 아이의 이목구비를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미간은 살짝 그를 닮은 것 같았다. 자세히 보니 코와 입도 많이 닮아 있었다. 갑작스럽게도, 퍽 재미있다는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핏줄을 잇는다는 일은 바로 이런 형태인 듯했다. 자신을 축소해 놓은 듯한 아기가 강보에 싸여 누워 있다니. 이 아이가 커서 그와 닮은 외모에, 그와 비슷한 성격을 지니게 되지 않을까. 정말 재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이를 보는 초왕의 눈빛이 반짝였다. 보모가 그의 눈빛을 알아차리고 얼른 아기를 안아 올렸다.
“왕야, 세자 아기씨가 왕야를 보고 웃으십니다. 한번 안아 보시지요.”
묵용감은 얼떨결에 아기를 받아 들었다. 아기를 안아 보는 건 처음이었기에, 그는 어느 때보다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저절로 긴장이 되었다. 아기를 보는 일과 직접 안아 보는 일은 큰 차이가 있으므로. 그가 자신의 품으로 아이를 꼬옥 품어 보았다.
그의 온몸이 긴장으로 팽팽하게 당겨졌다. 깃털만큼이나 가벼운 데다, 손에서 미끄러질 것 같은 불안함이 들었다. 그는 어색한 자세로 아이를 안고 서서 품속의 아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젖을 먹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듯, 젖비린내가 풍겼다. 아기의 살 냄새와 섞인 따스한 냄새가 무척 좋아, 묵용감은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이대로 아기에게 입을 맞추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해가 될까 봐 그러지 못했다.
아기를 미워했던 마음은 봄볕에 녹는 눈덩이처럼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의 마음에는 기쁨만이 가득했다. 이 아이가 자신과 그녀의 아들이라는 게 새삼 자랑스러웠다.
그는 어려서부터 가족에 대한 정이 옅었지만, 동시에 누구보다 가족간의 정을 갈망했었다. 그 때문에 묵용감은 황제도 태자도 단호히 대하지 못했다. 어렵사리 얻은 형제간의 정을 조금도 잃고 싶지 않았다.
아이에게는 자신과 같은 길을 걷지 않게 할 것이다. 아들에게 대통을 계승하여 무거운 짐을 지울 생각도 없었다. 그저 진왕처럼 한가한 왕으로, 평생 유유자적한 인생을 즐겼으면 했다.
한편 보모는 그의 부자연스러운 자세를 보고 어쩔 줄 몰라 했다. 저렇게 안다간 허리를 삐끗할 터였다.
“왕야, 힘드시지요? 이만 소인이 안겠습니다.”
정작 묵용감은 아기를 넘겨줄 생각이 없었다. 이전까진 아기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다고 믿었다. 있다고 해도 원망이 전부였겠지만, 지금은 바라보기만 해도 달콤한 기분에 휩싸였다. 누구에게도 넘겨주지 않고 계속 안고 있고 싶었다.
그의 품에 있던 세자는 묵용감을 바라보다 갑작스레 입을 움직여 거품을 만들어 댔다. 묵용감은 아기가 대단한 일이라도 해낸 것처럼 함박웃음을 보였다.
그 광경에 보모는 웃음을 꾹 눌러 참았다. 다른 아버지들보다 반응이 한 박자 느렸기 때문이다. 아기가 태어난 지 이틀이 되어서야 그는 비로소 아버지가 된 기분을 느낀 모양이었다.
그가 여전히 아기를 주지 않자 보모는 핑계를 댔다.
“왕야, 소인에게 주시지요. 세자 아기씨께 젖을 물릴 시간입니다.”
묵용감은 그제야 조심스레 아기를 돌려주었다. 분부를 내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세자의 팔이 꺾이지 않게 조심하게.”
“…….”
그 말은 그녀가 그에게 해야 더 맞는 말이었다.
“잘 돌봐 주게.”
그의 시선은 어느새 아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세자를 잘 부탁하네. 잘 돌보거든 본왕이 상을 내리고, 소홀하거든 살가죽을 조심해야 할 걸세.”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기를 맡게 되었으니, 굴러온 복을 껴안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찌 소홀히 대할 수 있을까. 보모와 유모는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묵용감은 아쉬운 발걸음을 옮기며 문으로 향했다. 처음으로 느껴 본 부성애는 그에게 진한 감동을 안겨주었다. 그는 문득 북쪽에 있는 서 태비를 떠올렸다. 자식을 낳아야 부모의 은혜를 깨닫는다고 하였던가.
서 태비는 그를 낳았지만, 그를 기르진 않았다. 그 때문일까, 모자의 정은 깊지 않았고 사이도 데면데면했다. 그래도 그를 낳아 준 모친이었다. 출산은 여인에게 있어 엄청난 화를 감당하는 일이었다. 그러니 서 태비가 그를 낳아 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깊이 감사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는 장합전에 사람을 보내야 할지 고심했다. 이젠 그녀도 할머니가 되었으니 그 사실을 알아야 할 듯싶었다.
물론 그가 전하지 않아도 조만간 북쪽에 정보가 흘러갈 터였다. 초왕비의 회임은 큰 비밀이 아니었으므로. 서로간의 정세가 제법 안정적이고 화목해졌어도, 국토가 나뉜 건 변함이 없었다. 북쪽에 그들의 세력이 침투해 있듯 남쪽에도 북에서 보낸 정탐꾼들이 있었다. 다만 소식이 전해지는 데 시일이 조금 걸릴 뿐이었다.
* * *
서 태비는 뒤숭숭한 마음에 방 안을 서성거렸다. 결국 그녀가 영 마마에게 물었다.
“날짜를 세어 보니 곧 나올 때이거늘, 어찌 소식이 없단 말이냐?”
영 마마가 웃으며 답했다.
“태비 마마, 마음이 급하십니다. 계산해 보니 다음 달 초가 아니었습니까? 아직은 너무 이릅니다.”
“혹 진통이 이르게 왔을지도 모르는 일 아니더냐?”
서 태비가 가슴을 연신 쓸어내렸다.
“왠지 마음이 계속 술렁이는구나.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아서 겁이 난다.”
영 마마가 그녀를 부축해 의자에 앉혔다.
“세자 아기씨께서 태어나는 일 외에 또 무슨 일이 생기겠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마마, 소식이 오면 곧장 전해 드리겠습니다.”
서 태비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와 감이 사이의 응어리는 쉽게 풀 수 없지. 그래도 손자는 진심을 다해 아껴줄 것이다. 한 번이라도 그 아이를 볼 수 있다면 당장 눈을 감아도 여한이 없어.”
“다들 손주는 자신을 대신할 만큼 어여쁜 존재라고 하지 않습니까.”
영 마마가 이해한다는 듯 거들었다.
“그 말이 참말인 듯합니다. 지금은 영토가 갈라졌지만, 소인이 보기엔 언젠가 왕야와 다시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그러니 불길한 말씀은 넣어 두시고 태비 마마의 건강을 잘 살피셔야 합니다. 세자 아기씨를 만나 안아 보셔야지요.”
서 태비의 얼굴에 옅은 웃음이 어렸다.
“애가도 그날이 오기만을 바라네. 지금은 황상께서 애가에게… 되었네, 이런 지경이 되었으니……. 그래도 애가를 선황께 보내진 않았으니, 옛정을 잊지 않은 게야. 감이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애가는 황제에게 더 마음이 쓰였다네. 애가가 배 아파 낳은 자식은 아니지만, 내 궁에서 몇 년간 키웠으니 감이보다 더 편안하더구나. 감이는…….”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씩 낮아졌다.
“그래도 이제야 알겠어. 내가 낳은 자식이 더 좋은 듯하구나. 그저 애가가 너무 늦게 깨달은 게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