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6화
녹하와 기홍의 긴 설득 끝에 묵용감은 밖으로 나갔다. 발이 드리워지고 붉은 문이 닫히자 안이 다시금 소란스러워졌다. 그가 밖에서 문을 두드리려고 했지만, 학평관과 위중청이 양옆에서 말렸다.
“왕야, 잠시 서재에 앉아 계십시오. 아직 더 기다리셔야 합니다.”
위중청이 공손히 말했다.
“왕비 마마께 소식이 있거든 곧장 알려 드리겠습니다.”
물론 묵용감은 자리를 비울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본왕은 어디도 가지 않겠다. 문 앞에 서 있으면 되니 다들 아무 말도 하지 말거라.”
학평관은 그의 견고한 의지를 알아차렸다. 초왕비가 아닌 이상, 누가 그의 결심을 막을까! 대신 학평관은 복도에 놓인 의자에 앉을 것을 조심히 권했다. 초왕이 우두커니 서 있는 것보다는 그나마 나을 듯했다.
그때, 태자가 급히 걸어왔다.
“어찌 된 것이냐? 해산은 하였느냐?”
학평관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입니다. 소식을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태자가 묵용감의 얼굴을 보더니 놀리듯 말했다.
“초왕야, 괜찮으십니까? 겁이 나서 다리가 풀려 버렸는지요?”
얼이 빠진 채 서 있던 묵용감이 천천히 태자를 바라보았다. 그가 몇 번을 주저한 끝에 물었다.
“형님, 왕비에게 아무 문제 없겠지요?”
“물론, 아무 일도 없고말고.”
태자가 그를 안심시켰다.
“우리 초왕비는 하늘이 돕는 사람이 아니더냐. 아무 문제 없을 것이다.”
학평관이 얼른 거들었다.
“왕야, 겁내지 마십시오. 저기 좀 보십시오. 소인이 칼과 황동 거울을 걸어 놓았습니다. 분명 왕비 마마의 순산을 도와줄 것입니다.”
그 순간, 방 안에서 백천범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높았다 낮아지고, 끊어졌다가 길게 이어지는 비명이었다. 덜컥 겁이 난 묵용감은 기둥을 붙잡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일이냐?”
위중청이 서둘러 그를 안심시켰다.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땐 대부분 소리를 지릅니다. 안 그러면 힘을 내기 어렵기 때문이지요.”
“지금 아이를 낳고 있단 말인가?”
위중청이 유심히 귀를 기울인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울부짖음은 갈수록 참혹하게 물들었다. 묵용감의 눈동자가 세차게 떨렸다. 그녀가 이토록 울부짖는 건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건만!
“어찌 이리도 울부짖는단 말인가?”
“통증이 심하셔서 그럴 것이옵니다.”
“이렇게까지 아프단 말인가?”
그가 대답할 틈도 없이 질문을 퍼부었다.
“대체 아이를 낳을 때 얼마나 아픈 것인가?”
“…….”
직접 겪어 보지 못한 일이니 위중청도 답을 할 수 없었다.
태자는 차마 눈 뜨고 봐줄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낸 사이였지만,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지금 묵용감의 모습을 보고 어떻게 종실 친왕이라 생각할까? 일반 백성들이 아내의 출산을 기다리는 모습과 별 차이가 없었다.
“조급해하지 말거라. 여인들이 아이를 낳을 땐 이런 과정을 겪는 법이지. 궁에 있었을 때 일이 생각나는구나. 양빈良嬪께서 아이를 낳을 때 선황께서는 군기대신들과 공무를 논의하고 계셨지.
황자가 태어났다는 소식에 선황께서는 짤막한 대답만 남기시고 내관을 불러 황후께 전하라고 분부하셨다. 그리곤 다시 공무를 논하시는 데 여념이 없으셨지. 셋째 너는 그런 침착함을 배워야겠구나.”
어찌 선황과 자신의 상황을 비교할까. 선황은 후비가 수없이 많았고, 황후 외에는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았으니, 묵용감과는 처지가 달랐다. 그에게는 오직 백천범, 한 명뿐이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녀가 이토록 처절하게 울부짖으니, 그도 함께 고통스러웠다. 여인이 아기를 낳는 일은 말 그대로 목숨을 거는 일이 아니던가. 이러다 혹시 무슨 사고라도 생기면……. 그는 차마 생각할 수도 없어, 기둥을 힘껏 내리쳤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낳지 말 것을. 이런 망할 놈, 태어날 때부터 이리 속을 썩이다니!”
태자가 결국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비가 될 사람이 어찌 그리 말하느냐. 왕비를 아끼느라 아이는 생각지도 않는단 말이냐?”
그는 초왕을 잡아끌며 태연히 권했다.
“그리 서 있지 말고 내 처소에서 바둑이나 두자꾸나. 한 판 두고 나면 아기가 태어나 있을 테니.”
그러나 초왕은 기둥을 단단히 붙든 채, 완고히 고개를 저었다.
“안 갑니다. 아무 데도 가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설령 속이 죄다 타들어 가 잿더미가 된다 한들, 그는 이곳을 떠날 수 없었다. 더욱이 그녀가 안에서 저리 큰 고통을 이겨내고 있는데 자신이 바둑을 두다니, 말이 된단 말인가?
완강한 그의 태도에 태자가 결국 포기의 한숨을 내쉬었다. 태자가 자리에 앉아 묵용감에게 말했다.
“그래, 가지 않을 거면 그만 앉거라. 그리 기둥을 붙잡고 있으니 볼썽사납구나.”
초왕이 밖에서 애를 태우는 동안, 백천범은 힘겨운 사투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버틸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녀는 탈진할 것만 같았다. 눈앞이 어지럽고 고통스러웠다. 도무지 이 고비를 넘길 자신이 없었다.
방 안 곳곳에 켜진 촛불이 그녀의 혼미한 시야에서 번져나갔다. 꼭 불사佛事(부처가 중생을 교화하는 일)를 하는 듯한 모습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묵용감을 불렀다.
“왕야! 왕야!”
그녀의 울부짖음을 듣고, 묵용감은 곧바로 달려들었다. 학평관과 위중청이 가까스로 그를 붙들었다. 묵용감이 벌컥 성을 내었다.
“놓거라. 왕비가 부르는 소리를 못 들었느냐!”
보다못한 태자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불렀다 한들 들어가선 안 된다. 금기도 모르는 게냐!”
바깥의 소란을 알아차린 월규가 서둘러 침대 앞으로 다가왔다.
“마마, 왕야를 부르지 마시옵소서. 한 번만 더 부르시면 들어오실 기세입니다.”
결국 백천범이 고통에 헐떡이며 소리쳤다.
“왕야, 들어오지 마세요. 전 괜찮아요. 들어오지 마세요……!”
태자가 얼른 묵용감을 달랬다.
“왕비가 괜찮다고 하지 않느냐. 걱정 붙들어 매거라.”
묵용감이 목청을 높여 그녀에게 답했다.
“알겠소. 밖에 있겠소. 그저 벽 하나만 사이에 두었을 뿐이오. 천범, 내가 미안하오. 그대에게 큰 죄를 지었소. 내가 원망스럽소. 그대만 있으면 충분한데 무슨 아이를 갖겠다고.”
그 말에 백천범의 눈가에서 눈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옆에서 돕던 아낙이 황급히 말했다.
“왕비 마마, 울지 마시옵소서. 힘을 아끼셔야 합니다. 이제 진통 주기가 더 빨라질 겁니다. 아기씨는 이미 산도로 들어섰으니, 힘을 주시는 데 집중하셔야 합니다.”
울 힘마저 아껴 두어야 했다. 그녀는 가까스로 심호흡을 하며 울음을 억눌렀다. 밑이 찢어지는 통증을 더는 참아낼 힘도 없었지만, 묵용감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이 모든 고통보다도 그가 자책하는 일이 괴로웠다.
아이를 원한 사람은 그녀였다. 두 사람이 아무리 서로를 사랑한다 해도 아이가 없으면 무언가 부족하다 느꼈기 때문이다.
백천범에게 있어 아이는 부부 사이를 이어주는 끈과도 같았다. 한쪽 끝은 그녀에게, 다른 한쪽 끝은 그에게 묶여 있는 끈. 아이에게는 두 사람의 피가 흐른다. 시간이 백 년쯤 흐르면 두 사람은 백골이 될지언정, 그들의 사랑은 자손들에게 이어지리라.
그녀는 이를 악물고 두 손으로 이불을 힘껏 움켜쥐었다. 필사적인 그녀의 모습에 아낙이 기뻐하며 소리쳤다.
“아기씨의 머리가 보입니다. 마마, 조금만 더 힘을 내십시오. 조금만 더!”
그 말이 백천범의 정신을 퍼뜩 일깨웠다. 시간이 지날 수록 아픔도 조금씩 익숙해지는 모양이다. 그녀는 가볍게 숨을 몰아쉬다가 입술을 깨물고 힘껏 힘을 주었다. 이윽고 아이의 머리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이의 머리가 걸리자 아낙들은 가위로 조심스레 살갗을 잘라냈다.
그 순간, 백천범은 혼절할 것 같았다. 그녀가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나왔어요?”
“곧 나옵니다. 조금만 더 힘을 주시면 나올 것 같습니다.”
별이 보이듯 눈앞이 반짝였고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는 것처럼 머리도 어지러웠다. 정신이 아득해지려 했지만, 신경 쓸 새가 없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비명을 내질렀다. 이내 그녀의 몸을 꽉 짓누르던 아픔이 모두 밀려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되었습니다!”
아낙이 기뻐하는 외침이 들려왔다.
“세자 아기씨입니다!”
가쁜 숨을 내쉬던 백천범은 마침내 정신을 잃고 말았다.
묵용감은 밖에 있었지만, 그녀가 죽을 고비를 넘기며 아이를 낳았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다. 곧 우렁차게 우는 아기의 울음이 그의 귓가를 세차게 때렸다. 누군가 정문일침을 가한 듯, 그의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 어렸다.
“역시, 우리 부인이오.”
그가 눈물을 머금은 채 중얼거렸다.
“역시, 착한 우리 부인이오.”
아직도 아이 같은 그녀가 아기를 낳다니. 대체 그녀를 어떻게 더 아끼고 사랑해야 할까.
아낙들이 서둘러 강보로 아이를 감쌌다. 곧 아낙들은 활짝 웃으며 아이를 묵용감에게 보여 주었다.
“왕야, 경하드립니다. 공자님입니다!”
서둘러 아기를 훑어본 그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아기는 새빨간 얼굴에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어 갓 태어난 새끼 쥐처럼 보였다. 곧바로 원망이 밀려와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고작 이놈 하나 때문에 아내가 목숨을 걸고 고된 싸움을 벌이다니, 참으로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그는 문틀에 기대어 안을 들여다보며 재차 물었다.
“왕비는, 왕비는 괜찮느냐? 괜찮은 것이냔 말이다? 어찌 왕비의 목소리는 어찌 들리지 않느냐?”
“…….”
천하에 이런 아버지가 어디 있을까? 갓 태어난 아들은 본체만체하고, 부인에게만 마음을 쓰다니.
“왕비 마마는 괜찮으십니다. 진이 다 빠지셔서 누워 계시지만, 조금 쉬고 나면 정신을 차리실 겁니다.”
묵용감의 귀에는 마지막 문장만이 들려왔다. 그가 곧장 호통을 쳤다.
“정신을 차린다니, 혼절이라도 했단 말이냐? 어째 아무런 목소리도 들리지 않더라니!”
그는 황급히 문턱을 넘어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어찌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있을까! 마침 핏물이 담긴 대야를 들고 나오던 아낙이 기겁하며 그를 피하다 핏물을 조금 쏟고 말았다.
순간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에 그는 절로 가슴이 서늘해졌다. 병사들을 이끌고 피 칠갑을 하며 전장을 누빌 때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건만, 지금은 대야에 담긴 흥건한 핏물만으로도 다리에 힘이 풀릴 지경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아내가 흘려낸 피다. 그의 가슴을 칼로 찔러도 이리 아찔하진 못할 터였다.
뒤따라오던 아낙이 다급히 소리쳤다.
“왕야, 지금은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아직 뒷정리를 해야 합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기홍과 녹하가 밖으로 나와 그를 막아섰다.
“왕야, 마마께서 잠이 드셨습니다. 잠시 후에 오시지요.”
아내가 혼절했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까. 지금은 그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그는 두 시녀를 밀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백천범은 잠자듯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는 꼭 가슴팍을 힘껏 걷어차인 듯했다. 숨조차 제대로 내쉴 수 없어, 비틀거리며 침대로 다가가는 게 고작이었다. 그녀를 오랜 시간 봐왔지만 이렇게 축 처진 모습은 처음이었다.
땀으로 젖은 이마엔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붙어 있었고, 고통이 가시지 않는지 미간을 찌푸린 채였다. 도톰하던 입술은 다 터져서 검붉은 피딱지가 듬성듬성 앉았다. 침대 가장자리에 걸친 한쪽 손도 안쓰러울 정도로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그는 허리를 숙이고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쥐었다. 살짝 차가우면서도 축축한 촉감이 전해져 왔다. 그러나 여전히, 온기가 있었다. 그가 희망을 쥐어짜 내 가볍게 그녀를 불렀다.
“천범, 천범. 좀 어떻소?”
그녀의 눈꺼풀이 잘게 떨리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 탈진하는 바람에 정신을 잃었지만, 워낙 체력이 좋아 누운 사이에 기력을 조금 찾은 듯했다. 그녀가 나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왕야, 아기는 보셨어요? 딸이에요? 아들이에요?”
“아들이오.”
그가 얼른 대답했다.
“아주 튼튼하게 생겼소. 걱정하지 마시오.”
“안아서 제게 보여 주세요.”
아이를 낳자마자 정신을 잃었던 터라, 그녀는 아이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묵용감이 고개를 저으며 타일렀다.
“아낙들이 아이를 데려갔소. 아이는 도망가지 않으니 조금 더 쉬었다가 보는 게 어떻겠소?”
“안 돼요. 지금 보고 싶어요.”
그녀는 완강하게 나왔다. 열 달을 기다린 아이다. 드디어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었는데 어찌 지체할 수 있을까.
그는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데려오라고 분부했다.
마침 아이를 씻기던 아낙들은 소식을 듣고 황급히 마무리를 했다. 그들은 아이에게 옷을 입히고 황금빛 실로 복福 자가 수 놓인 강보에 싸서 데려왔다.
백천범은 가까스로 힘을 주어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 때문에 가위로 찢은 상처 부위가 쓸려, 저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묵용감이 황급히 그녀를 살폈다.
“움직이지 마시오. 어디가 아픈 것이오?”
지켜보는 눈이 이렇게나 많은데 어찌 정확하게 말할 수 있을까. 그녀가 머뭇거리다 말했다.
“괜찮아요. 그렇게 아픈 건 아니에요.”
옆에 있던 기홍이 넌지시 말하며 그녀를 말렸다.
“왕비 마마, 어머님들이 지금은 움직이시면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편히 누워 계십시오. 산후조리를 소홀히 하시면 안 됩니다.”
출산은 정말 고통스럽고 괴로운 일이었다. 백천범은 차마 더 움직이지 못하고 몸을 살짝만 일으켜서 아이를 바라보았다. 강보에 싸인 아이는 여전히 붉은 얼굴에,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의 주먹보다도 얼굴이 작은 듯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그녀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정말 예뻐요!”
그녀가 낳은, 그녀의 아이였다. 드디어 그녀와 한 핏줄을 가진 혈육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