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5화
방 안으로 들어가니 침대에 누워 있는 백천범과 출산 준비를 하는 아낙들이 보였다. 황동 대야, 커다란 목욕통, 뜨거운 물, 은가위, 자단목 그릇, 자단목 칼, 산더미처럼 쌓인 수건 등 수많은 물건이 한쪽에 착착 놓였다.
반대편에는 아기 옷, 모자, 배두렁이, 붉은색 아기 침대 등 아기를 위한 용품도 빈틈없이 준비되어 있었다. 아기 침대는 묵용감이 짬을 내어 직접 사 온 것으로, 한쪽에는 용과 봉황이, 다른 한쪽에는 통통한 아기가 조각되어 있었다.
그는 용과 봉황 조각은 부모를 상징하니 아이를 보호해 주고, 아기 조각은 태어난 아이의 곁을 지키는 동무가 되리라고 했다.
난데없이 양수가 터진 터라 백천범은 무서운 마음이 들었지만, 가지런히 정리된 아이 물품을 보고 있으니 두려움이 잦아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아픔은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이 아픔마저도, 아기를 위해 가치 있는 일이 되리라 믿었다.
다만 아이를 낳기 전에 묵용감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의 격려가 필요했다. 그가 따뜻하게 안아 준다면, 얼마든지 힘을 낼 수 있을 듯했다.
그러나 늘 초조해하던 그의 모습이 떠올린 백천범은 차라리 그가 돌아오기 전에 낳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혹여 그녀의 비명을 듣고 그의 다리라도 풀린다면 그간 쌓아 올렸던 명성이 대차게 무너질 테니.
그녀는 만삭의 배를 가볍게 어루만졌다. 배를 향한 그녀의 눈빛은 그윽했고, 끝없는 사랑이 담겨 있었다. 여섯 달 정도 되었을 때부터 태동을 느꼈다. 아기가 그녀의 배 속에서 주먹질을 하고 발차기를 할 때마다 배에 죽순이 돋아난 듯 볼록볼록 튀어나오곤 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움직이는 걸 보는 게 어찌나 재밌던지. 그 후 달이 찰수록 아기는 얌전해졌다. 아무래도 곧 부모를 만난다는 걸 알고 수줍어하는 게 아닐까. 그마저도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이제, 드디어 아기가 세상으로 나올 시간이 되었다. 얼마 뒤면 그토록 기다리던 아기와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백천범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 * *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묵용감은 우산도 받치지 않고 오디를 따는 데 여념이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직접 하는 것만큼 기쁜 일이 어디 있을까.
그때, 가동이 밭두렁을 가로질러 빠르게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뭐가 그리 급한지 발을 헛디뎌 앞으로 철퍼덕 고꾸라졌다. 그 모습에 묵용감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바보 같은 놈.”
그러나 가동은 허겁지겁 일어나 그에게 소리쳤다.
“왕야, 어서 돌아가셔야 합니다! 왕비 마마께서 곧 해산하신답니다. 학평관 어르신이 사람을 보냈습니다!”
묵용감의 손이 흠칫 떨렸다. 애써 딴 오디가 땅에 전부 떨어졌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는 허겁지겁 앞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자신을 향한 원망이 물안개처럼 피어 올랐다.
어리석게도, 왜 하필 오늘 같은 날 성 밖을 나왔단 말인가.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인 관청에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곁에 그가 없으니 잔뜩 겁을 집어먹었을 그녀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길가로 나오자 영구가 말을 대기시켜 놓았다. 함께 따라온 관원들이 다가와 축하 인사를 건넸다.
“왕야, 감축드립니다…….”
묵용감은 일일이 대꾸할 겨를도 없었다. 그저 말을 타고 빠르게 질주할 뿐이었다.
* * *
백천범은 조금씩 불편해지는 몸을 알아차렸다. 몹시 아프진 않았지만, 허리가 끊어질 듯 시큰거렸다. 참을성 많은 그녀는 미간만 찌푸리고 있었다.
기홍이 커다란 쟁반을 들고 와서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는 막 지은 밥과 반찬을 쟁반 가득 담아 왔다.
“왕비 마마, 조금이라도 드십시오. 어머님들 말로는 뭐라도 드셔야 낳을 힘이 생긴답니다. 탕에 삼을 넣었으니 기력을 보충하는 데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조금만이라도 드셔 보시어요.”
녹하가 그녀를 일으켜 앉히고 푹신한 베개를 허리에 대 주었다. 백천범이 말했다.
“허리가 너무 아파요. 베개를 하나 더 대 주세요.”
월규가 곧장 아낙들에게 소리쳤다.
“왕비 마마께서 허리가 아프시답니다. 괜찮은 것입니까?”
한 아낙이 웃으며 답했다.
“곧 진통이 시작될 겁니다. 처음엔 허리가 시큰거리다 곧 배가 아프실 테지요. 그리고 나면 아기씨가 태어나실 겁니다.”
백천범이 끙끙거리다 물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요?”
“왕비 마마께 아룁니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초산은 조금 길 수도 있습니다. 마마께서는 아직 진통이 오지 않으셨지요. 어떤 이들은 열 시진 넘게 진통을 겪기도 하며, 아주 짧은 이들도 최소 두 시진은 걸리지요. 둘째 아이부터는 조금씩 빨라집니다. 어떤 이들은 별 느낌 없이 낳기도 하지요.”
백천범이 벅찬 숨을 내쉬었다.
“그렇게나 오래 걸리는군요. 왕야께서 돌아오시기 전에 끝내고 싶었는데, 어렵겠네요.”
출산을 저리 쉽게 여기는 왕비의 모습에 아낙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아이를 낳는 일은 아무도 단언할 수 없답니다.”
백천범이 수저를 겨우 들더니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렇게 오래 걸리면 많이 먹어 두긴 해야겠네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위가 목에 걸린 듯해 아무것도 넘길 수 없었는데, 지금은 제 위치로 내려갔는지 입맛이 돌았다. 그녀는 밥 두 그릇에 탕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기홍은 그제야 안심이 되는지 함박웃음을 지었다.
잠시 뒤, 배가 간헐적으로 아프기 시작했다. 허리도 여전히 끊어질 듯 시큰거렸다. 백천범은 눈을 감고 묵용감을 기다렸다. 그는 여전히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데, 배만 점점 더 아프기 시작했다.
“왕야께서는 아직이셔?”
그녀는 속상함에 입을 삐죽거릴 뻔했다.
기홍이 침대 옆에서 그녀의 허리를 문질러 주며 위로했다.
“비가 내리니 빨리 오시긴 힘들 겁니다. 돌아오실 때까지 한숨 주무시어요. 왕야께서 도착하시면 소인이 깨워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아픈데 어떻게 잠들 수 있겠는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통증이었다. 흠씬 두들겨 맞는 것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아팠는데, 그중에서도 허리가 끊어질 듯했다. 배와 허리의 통증이 한데 뒤섞이니 말이 나오지 않을 만큼 괴로웠다.
견디기 힘들었던 그녀는 아예 자신의 살을 꼬집기 시작했다. 다른 곳을 아프게 해서 잠시나마 진통을 줄이고 싶었다. 그 모습에 월규가 서둘러 자신의 손을 뻗었다.
“왕비 마마, 소인의 팔을 꼬집으시어요. 소인은 괜찮습니다.”
그녀는 이유를 설명할 정신도 없었기에 고개만 저으며 계속 살을 꼬집었다.
* * *
정신없이 말을 몬 끝에, 묵용감이 관저에 도착했다. 후원에 다다라서야 말에서 내린 그는 저 멀리 복도에 서 있는 학평관과 위중청에게 소리쳤다.
“아기는?”
“아직입니다.”
학평관이 묵용감에게 다가와 무릎을 굽히고 예를 갖췄다.
“경하드리옵니다, 왕야.”
묵용감은 짤막하게 대꾸하고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자 학평관이 황급히 앞을 막아섰다.
“왕야, 산방은 함부로 들어가시면 아니 되옵니다. 혹여…….”
묵용감은 들은 척도 않고 문 발을 걷어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 있던 아낙들이 그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그를 막고 싶어도 매서운 눈빛을 마주하니 감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묵용감이 안으로 들어가니 학평관도 따라 들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위중청이 그를 단단히 붙들었다. 사내들은 산방에 들어갈 수 없는 게 동월국의 관례였다. 저 사람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초왕이라지만, 학평관은 무슨 명분으로 들어간단 말인가? 혹 봐서는 안 되는 걸 본다면 환관이라 한들 목을 내놔야 했다.
백천범은 묵용감의 목소리에 곧장 눈을 떴다. 어느새 커다란 그림자가 그녀의 위에 드리웠다. 그녀는 팔을 뻗으며 칠 할은 괴로움, 삼 할은 애교가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왕야, 아파요…….”
묵용감은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시큰거리고 아팠다. 그가 고개를 돌려 포효했다.
“다들 뭣들 하는 것이냐? 왕비가 아프다는 말이 들리지 않느냐!”
묵용감이 허리를 숙여 그녀를 품에 안았다. 소매를 걷어 그녀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주던 그가 먹먹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프다는 거 잘 아오. 곧 괜찮아질 테니 조금만 참으시오.”
그가 그녀의 손을 잡고 열 손가락에 일일이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대 대신 내가 아팠으면 좋겠소. 천범, 미안하오. 아기를 위해서 조금만 참으시오. 그럴 수 있겠소?”
그의 호통에 방 안에 있던 이들이 모두 긴장하며 떨고 있었다. 가까스로 한 아낙이 다가와 고했다.
“왕비 마마, 진통이 심하실 땐 심호흡을 하십시오. 조금 나아지실 겁니다.”
당장은 다른 방법이 없었다. 어찌 고통 없이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그 말에 묵용감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자, 따라 해 보시오.”
묵용감이 어린아이를 가르치듯 시범을 보였다.
“깊게 들이마시고, 크게 내쉬고.”
그녀도 그를 따라 진지하게 숨을 고르며 열심히 따라 했다. 평소라면 다들 유치하게 봤을 테지만, 지금은 방 안의 모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둘을 바라보았다.
아이를 낳기 전, 그를 만나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백천범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심호흡을 몇 차례 하고 나니 통증이 조금은 줄어든 것도 같았다. 그녀가 서둘러 그를 밀어내려 했다.
“왕야, 그만 나가 보세요. 사내는 산방에 있으면 안 되니까요.”
“아무 데도 가지 않고 그대 곁을 지킬 것이오.”
그가 그녀의 손을 꽉 붙들었다. 아무리 침착한 척을 한들, 그의 눈망울에 서린 두려움과 당혹감이 너무나 선연했다.
그의 모습에 백천범은 더욱 그를 내보내기로 마음먹었다. 게다가 그가 산방에 있으면 불길한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묵용감에게 불길한 일이 생긴다는데, 어찌 그녀가 두고만 볼 수 있겠는가?
“나가요, 어서요!”
별안간 그녀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왕야가 안 나가시면 저도 낳지 않을 거예요.”
묵용감이 황망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찌 갑자기 화를 내는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기홍이 옆에서 그를 타일렀다.
“왕야, 그만 나가시지요. 여기 계셔도 도와주실 수 있는 게 없사옵니다. 오히려 마마께서 왕야를 신경 쓰시면 집중하기가 더 어려우실 겁니다…….”
어느새 긴장한 그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흥건했다. 더욱이 비를 맞고 온 터라 그의 옷은 흠뻑 젖어 있었다. 옷이 몸에 딱 들러붙은 탓에 불편하고 괴로웠지만, 그는 이 괴로움이 정녕 젖은 옷 때문인지, 어찌할 수 없는 마음에서 새어 나오는지 구분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