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4화
발길 닿는 곳마다 꽃과 푸른 나뭇잎으로 가득해 생기가 넘쳐흘렀다. 사월의 봄은 백천범에게 그림 같은 풍경을 안겨다 주었다. 그녀는 월규에게 몸을 완전히 의지한 채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그녀는 이 계절이 너무나 좋았다. 꽃과 새 생명을 피워내는 봄은 그녀에게 끝없는 희망을 전해 주었다. 어린 세자도 성격이 급하면 그녀처럼 사월에 태어날지도 몰랐다.
들뜬 와중에도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녀의 삶에서 생겨나는 변곡점은 대부분 이 계절에 있었다. 재작년 봄에는 초왕에게 시집을 왔고, 작년 이 계절에는 오수진에 정착했다. 올해 봄에는 곧 아이가 태어난다.
수많은 일이 일어나는 와중에도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이 참 놀랍기만 했다. 어느새 그녀도 열일곱 살을 앞두고 있었다. 그녀는 문득 고개를 돌려 오른편에 있는 누각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한참 동안 황보주아를 보지 못했다.
금릉에서 돌아온 이후로 황보주아는 도통 그녀를 보러오지 않았다. 몇 차례 놀러 오라는 말을 전하긴 했지만 그마저도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거절하기 일쑤였다.
“주아 언니는 요즘 어떻게 지내?”
문득 그녀가 월규에게 물었다.
“늘 똑같지요.”
월규가 담담히 말했다.
“누각을 내려오지 않으니 얼굴 한번 보기 힘듭니다. 그리 높은 곳에 있는 분이 저희처럼 평범한 이들과 어디 말이나 섞겠습니까.”
자신을 모시는 이들이 황보주아를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는 건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어쨌든 한집에 있으니 얼굴은 자주 보며 살아야지. 지난 일은 덮어 두자. 요즘은 조용히 지내고 있으니 너무 매몰차게 대하진 말고.”
월규가 코웃음을 쳤다.
“역시 어머니가 될 분이라 다르십니다. 참으로 이치에 맞는 말만 하십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쪽에서 간사한 계략만 쓰지 않는다면 저희도 일을 벌이진 않을 겁니다.”
한창 이야기를 나누는데 마침 황보주아가 누각의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얼핏 그녀를 바라본 백천범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예전의 그녀는 화려하게 피어난 꽃송이였다면, 지금은 거의 시들기 직전처럼 보였다.
두 볼은 움푹 패어 있었고, 눈은 광채를 잃었다. 그녀는 아주 중요한 부품이 빠져 버린 것처럼 공허해 보였다. 같은 시간을 보냈건만, 그녀는 다른 이들보다 훨씬 더 긴 세월을 맞이한 듯했다.
“왕비 마마를 뵈옵니다.”
무릎을 살짝 굽히며 예를 갖춘 황보주아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네, 언니가 걱정해 주신 덕에 잘 지냈습니다.”
인사를 마친 백천범이 그녀의 안부를 물었다.
“주아 언니, 몸이 좋지 않나요?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예. 몸이 통 말을 듣지 않아 내려오지 못했습니다.”
그녀가 백천범의 배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배가 벌써 이렇게 나왔군요. 곧 해산할 때이지요?”
“네. 위 의원 말로는 이달 말이나 다음 달 초쯤 나올 예정이라네요.”
“정말 빠릅니다.”
황보주아가 나직한 음성을 흘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해산할 때가 다가오다니요.”
그녀가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왕야께서도 긴장하셨겠습니다.”
“조금요.”
백천범이 활짝 웃으며 덧붙였다.
“작은 일에도 깜짝깜짝 놀라시니, 걱정 좀 그만하시라고 했어요. 누가 보면 왕야께서 아이를 낳는다고 생각하겠어요.”
황보주아가 나긋한 미소와 함께 답했다.
“왕비 마마 내외는 한 사람이라고 착각할 정도니, 마마가 낳든 왕야께서 낳든 별다르지도 않겠습니다.”
분명 농담에 불과한 말이었지만, 광채가 없는 눈으로 바라보며 말하니 꽤나 기묘하게 들렸다. 백천범은 까닭 없이 어리둥절해졌다.
“왕비 마마, 신경 쓰지 마십시오.”
월규가 나직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누각에만 틀어박혀 있으니 어디에 문제가 생겼나 봅니다. 방금 마마의 배를 쳐다보는 눈빛이 어찌나 섬뜩했는지 모릅니다.”
물론 백천범은 신경 쓰지 않았지만, 황보주아가 조금 가여울 따름이었다. 금릉으로 거처를 옮기면 그녀에게 꼭 좋은 배필을 골라 주리라. 곁을 지키는 사람이 있으면 그녀도 나아질 게 분명했다.
* * *
어린 세자는 역시나 성격이 급했다. 월말도 되지 않았는데 세상에 나올 채비를 마친 듯했다.
빗줄기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이었다. 물안개가 수성을 감싸고, 정자와 누각에 운치를 더했다. 백천범은 천천히 복도를 거닐고 있었다. 녹하와 월규가 그녀의 양옆을 지켰고 기홍은 작은 은사발을 든 채 그녀 뒤를 졸졸 따라갔다. 꼭 아이를 달래는 어머니처럼 보였다.
“딱 한 입만 드셔 보십시오. 소인이 오랜 시간 끓였습니다.”
백천범이 고개를 저었다. 뭔가를 넘길 기분이 아니었다. 위가 금방이라도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듯했다. 이런 상태에서 어찌 더 먹을 수 있단 말인가?
그때, 갑작스레 다리를 타고 물이 흐르는 느낌이 났다. 물줄기는 순식간에 치맛자락을 적셨다. 깜짝 놀란 그녀가 황급히 고개를 숙여 치마를 확인했다. 그녀의 행동에 시녀들도 바닥에 흐르는 맑은 액체를 발견하고 말았다.
‘치마에 실수를 하시다니……?’
‘어찌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실수를…….’
멍하니 생각에 잠긴 월규, 녹하와 달리 기홍이 다급하게 외쳤다.
“양수가 터졌습니다. 어서, 어서! 왕비께서 곧 해산하십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월규와 녹하도 잔뜩 긴장한 얼굴로 재빨리 뛰어갔다. 뒤늦게 흥분한 두 사람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왕비께서 곧 해산하십니다. 학 어르신, 왕비 마마께서 곧 아기씨를 낳으실 겁니다. 어서 하인을 보내 왕야께 소식을 전해 주시어요!”
조금 얼떨떨했던 백천범은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기홍도 일단 외치기는 했으나, 출산 경험이 없는 아가씨라 갈피를 잡지 못했다. 두 사람은 혼이 쏙 빠진 채 서로를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했다.
다행히 관저에 불러 두었던 산파 아낙들이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 얼이 빠져 있는 왕비와 기홍을 보고, 아낙들이 입을 모았다.
“왕비 마마, 겁내지 마십시오. 진통이 느껴지십니까?”
백천범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럼 조금 더 기다리시지요. 양수가 조금 일찍 터지긴 했지만 아직 괜찮습니다.”
백천범은 그제야 한시름 놓고 치마를 걷어 올렸다.
“알겠어요. 그럼 옷 갈아입으러 가요. 누가 보면 치마에 오줌을 싼 줄 알겠어요.”
기홍은 입을 가리고 웃었다. 예전에 초왕 앞에서 백천범이 실례를 했던 일이 떠올라서였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녀를 에워싸고 방으로 향했다. 소식을 듣고 쏜살같이 달려온 학평관과 위중청이 왕비 일행을 마주했다. 하인들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백천범은 출산을 앞둔 산모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학평관이 그녀를 의아하게 바라보는데, 한 아낙이 예를 갖춰 인사를 건넸다.
“어르신, 위 의원님, 양수가 터졌습니다. 마마께서 곧 해산하실 테니 두 분께서는 밖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소인들이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위중청은 의관이긴 했지만 아이를 낳는 과정은 서책으로 배운 게 전부였다. 그가 맞잡은 두 손을 들어 올리며 예를 갖췄다.
“감사합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무슨 일이 생기시거든 곧장 알려 주십시오.”
한 아낙이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위 의원님, 저희는 경험이 많으니 긴장하지 마십시오. 산방産房에서 워낙 많은 일을 겪어 본 터라 어찌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평소의 학평관이라면 조금 거들먹거렸겠지만, 지금은 그들의 손에 왕비의 출산이 달려 있다. 어찌 감히 체면을 내세울까! 그가 얼른 허리를 굽히며 아낙들에게 말했다.
“부인들에게 부탁드리겠습니다. 부디 수고 좀 해 주십시오. 마마께서 순산만 하신다면 왕야께서도 분명 큰 상을 내리실 겁니다.”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백천범은 시녀들의 부축을 받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까치발을 들고 안을 들여다보던 학평관이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소리쳤다.
“왕비 마마, 겁내지 마시옵소서. 소인이 밖에서 힘을 보태겠습니다. 너무 아프시거든 힘껏 소리를 지르십시오. 저희가 함께 힘을 내겠습니다……!”
“…….”
위중청과 아낙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가 밖에서 힘을 낸다고 왕비에게 그 힘이 어찌 전해진단 말인가.
녹하와 월규는 관저 안을 한 바퀴 돈 뒤에야 안채로 돌아왔다. 이처럼 소리를 지르며 다니는 건 체통 없는 짓이지만, 기쁨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어쨌든 왕비와 관련된 일이니, 지금껏 그래 왔듯이 엉뚱하다 여길지언정 초왕도 크게 책망하지 않으리라.
녹하가 정원에 서 있는 학평관에게 물었다.
“어르신, 왕야께 소식을 전할 하인은 보내셨습니까?”
“보냈네.”
학평관이 소맷자락으로 눈가를 훔쳤다. 자꾸만 감정이 북받치는 통에 그는 대성통곡하지 않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왜 하필 오늘 왕야께서 자리를 비우셨단 말입니까. 그것도 마마께 드릴 오디를 구해 오신다며 성 밖 뽕밭까지 가셨거늘. 오가는 데만 한 시진은 걸릴 텐데, 아기씨를 낳은 뒤에 돌아오시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월규도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그리 되면 왕야께서도 몹시 아쉬우시겠어요. 세자 아기씨가 응애응애 울며 태어나는 모습을 놓치시는 거니까요.”
녹하가 정원을 훑어보더니 학평관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르신, 저번에 준비하셨던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는 어디 있습니까? 어서 매달아 주셔야지요. 황동 거울도 같이 걸어 주십시오.”
남쪽에서는 산모가 해산할 때 처마에 큰 칼을 매달아 액막이를 하는 풍습이 있었다. 칼을 걸어 놓음으로써 산모가 큰 화를 피해간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한편 북쪽에서는 거울을 매달아 놓았다. 칼과 마찬가지로 액막이를 하는 용도이니, 모두 준비해 두면 왕비가 무사히 출산할 수 있으리라.
학평관은 황급히 자신의 머리를 두드렸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보게. 시간이 되었으니 어서 걸어야겠군.”
그가 급히 목청을 높여 하인을 불렀다.
녹하가 방으로 들어가자 월규도 그녀를 뒤따르려 했다. 그러다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위중청을 발견하고 목청을 가다듬었다.
“위 의원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왕비 마마께서는 분명 순산하실 겁니다.”
위중청이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제가 왕야도 아니고 어찌 긴장하겠습니까? 제 직분을 다해야 하니 이곳에서 기다리는 게 마땅합니다. 만약 어머님들께서 결정하기 힘든 일이 생기거든 나와서 제게 알려 주십시오.”
눈이 살짝 커진 월규가 물었다.
“의원님은 아기를 받아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없습니다. 그래도 직접 해 보지 않았다고, 보고 들은 것도 없겠습니까?”
“…….”
역시 너무나 오만한 발언이었다. 이 자리에 초왕이 있었다면 혼쭐을 내고도 남았을 터였다. 월규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발을 걷어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