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403)화 (402/1,192)

제403화

그녀가 콧잔등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술 냄새가 진동을 하는데 안 마셨다고요?”

묵용감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안 그래도 그만하려고 했는데 둘째 형님이 날 놓아 주질 않았소.”

그가 월규에게 빗을 건네받아 그녀의 머리를 빗겨 주었다. 그의 눈가엔 웃음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천범, 오늘 기분이 아주 좋소.”

역시 부부는 일심동체라더니, 그가 기쁘면 그녀도 기뻤다.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세요?”

그는 대답 대신 그녀의 얼굴에 제 얼굴을 맞대고 가볍게 문질렀다. 그는 무척 기뻤다. 태자는 오늘 그에게 속내를 털어놓고 그간의 심적 변화까지 말해 주지 않았던가.

처음에는 묵용감의 제안이 달갑지 않았지만, 지금은 기대가 크다는 것까지, 마음속에 품고 있던 말을 하나도 남김없이 그에게 털어놓았다.

황실에서 혈육의 정은 아주 희미한 편이었다. 클수록 마음의 거리가 멀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의 술자리를 통해, 두 형제의 거리는 부쩍 줄어들었다.

그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아내와 아이가 있었지만, 형제도 필요했다. 북쪽 땅의 가족은 평생 그리워해야만 할지도 모른다. 그뿐이랴, 두 번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다. 그 때문에라도 그는 곁에 있는 이를 더욱 소중히 여길 생각이었다.

묵용감은 그녀를 끌어안은 채 지그시 눈을 감았다. 꼭 잠이 드는 모습처럼 보였다. 백천범이 그를 밀어내며 말했다.

“주무시면 안 돼요. 어서 가서 씻으세요. 이러다 아기까지 술 냄새를 맡겠어요.”

묵용감은 그녀의 얼굴에 힘껏 입을 맞춘 뒤, 기분 좋게 웃으며 목욕간으로 향했다.

그가 씻고 돌아왔을 때, 백천범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가 손을 내저으며 주위를 물렸다.

장막을 걷고 안으로 들어가니 등을 돌리고 옆으로 누운 백천범의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 그가 엉큼하게 손을 그녀의 몸 위에 올렸지만, 흰 손이 단번에 그를 밀어냈다.

“가만히 좀 계세요. 술에 취하셔서 분별없이 아이를 다치게 할까 봐 걱정이니까요.”

“지금껏 그대의 지아비가 분별없이 굴었던 적 있소?”

그는 대수롭지 않게 다시 손을 뻗었다.

“우리 아이 좀 만져 보겠소.”

아이까지 못 만지게 하는 건 너무 매정한 일이었다. 백천범은 묵용감이 자신의 배를 만지게 내버려 두었다.

“조금 더 커진 듯하오.”

백천범이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매일 매일 자라니까 커지죠. 저는 더 컸으면 좋겠어요. 저랑은 다르게 쑥쑥 컸으면 해요. 전 어릴 때 병아리처럼 비쩍 말랐었거든요.”

“내가 그 병아리를 아주 잘 키우지 않았소.”

묵용감이 웃으며 손을 위로 옮겼다.

“아주 커져서 손에 다 안 잡힐 정도요.”

백천범은 얼굴을 슬쩍 붉히며 그를 노려보았다.

“이거 봐요. 또 왕야 멋대로 하시잖아요.”

부드러운 살결을 가볍게 만지작거리니 더없이 편안한 기분이 몰려왔다. 묵용감이 그녀의 목에 입을 맞추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위 의원 말로는 달이 찰수록 더 안전하다더군. 새 화첩을 받았는데 한번 해 보는 게 어떻겠소…….”

그의 손길이 견디기 힘들었던 백천범은 자꾸만 끙끙거렸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묵용감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조심스레 그녀의 몸을 끌어당겼다. 그때 그녀가 어렴풋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위 의원은… 왜 자꾸 화첩을 주는 거예요. 대체 의원인지 기방 주인장인지…….”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은 묵용감이 소리 없이 웃었다.

“수행 의관이지 않소. 주인의 몸과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게 그자의 본분이오. 그대는 그저 편안히 누리기만 하시오.”

* * *

바람에 책장이 넘어가듯,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어느새 한 해는 완전히 저물고 봄이 찾아들었다. 시도 때도 없이 잠이 오는 따뜻한 날씨였지만, 관저의 사람들은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초왕비가 출산을 앞두고 있지 않은가. 언제 진통을 느낄지 몰랐다. 위중청은 아예 매일 아침과 저녁마다 진맥을 하러 왔다.

만삭의 초왕비는 배는 물론이고 얼굴과 다리도 포동포동해져 있었다. 그녀의 몸을 닦아 주던 월규가 실수로 그녀의 다리를 꾹 누르고 말았다. 그러자 그 자리에 움푹 팬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화들짝 놀란 월규가 주저앉아 울상을 지었다.

“어찌하면 좋습니까, 소인이 힘을 준 것도 아닌데 어찌 이런 자국이 남는단 말입니까. 왕야께서 보시면 제 가죽을 벗기고도 남으실 겁니다.”

사실 가벼운 흔적에 불과했다. 허리를 굽힐 수 없는 백천범은 다리의 상태를 제대로 못 봤지만,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었다. 별로 아프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괜찮아. 내가 너무 살이 쪄서 피부가 물렁물렁해졌나 봐. 그러니 자국도 쉽게 생기는 거겠지.”

그러나 시녀인 월규는 가볍게 넘길 수가 없었다. 그녀가 백천범에게 옷을 입혀 주며 말했다.

“왕야께서 안 계시니 소인이 위 의원을 모셔 오겠습니다. 곧 해산을 하셔야 하니 모든 일에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백천범의 반대에도 월규는 재빨리 앞뜰로 달려갔다. 마침 위 의원이 바닥에 쪼그려 앉아 소쿠리에 담긴 약초를 살펴보고 있었다. 월규가 다급히 그를 불렀다.

“위 의원님, 어서 왕비 마마를 살펴봐 주시어요. 마마께서…….”

위중청은 다급한 목소리에 놀라 얼른 몸을 일으켰다.

“진통이 왔습니까?”

“아뇨.”

월규가 숨을 헐떡거리며 손짓을 했다. 마음이 급하니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왕비 마마의 다리에, 제가 실수로, 자국이 생겨서…….”

그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한 그림자가 빠르게 곁으로 다가왔다.

“왕비가 어찌 되었다고?”

월규가 입술을 달싹이는데, 그가 위중청을 노려보았다.

“뭘 꾸물대고 서 있는가, 어서 가야지!”

위중청은 서둘러 대답을 올리고는 급히 뛰어갔다. 묵용감은 큰 보폭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월규는 잰걸음으로 뒤를 따랐다. 초왕이 없는 시간에 위중청을 부르려고 한 것인데, 하필 딱 마주치고 말았다……. 월규는 걷는 내내 겁이 나 죽을 것만 같았다.

안락한 의자에 기대 있던 백천범은 헐레벌떡 들어오는 그들이 의아하기만 했다.

“아직 소식도 없는데 왜 그리 뛰어 와요?”

묵용감은 싱긋 웃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서야 마음을 놓았다. 그가 월규를 돌아보았다.

“대체 왕비가 어찌 되었단 말이냐?”

월규가 조심스레 백천범의 치마를 들어 올려 자국을 보여 주었다.

묵용감의 눈이 곧바로 부릅떠지며 살기가 깃들었다.

“누가 한 짓이더냐?”

월규가 털썩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소, 소인이 그리하였습니다.”

“어찌 감히!”

묵용감이 발을 들어 올린 순간, 위중청이 재빨리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왕야, 노여움을 푸시옵소서. 월규 아가씨의 잘못이 아닙니다. 만삭이 가까워진 임부는 부종이 심해 스치듯 닿아도 자국이 생기곤 합니다.”

만삭이 된 백천범은 모든 일에 반응이 반 박자씩 느려졌다. 그녀가 그제야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왕야, 어쩜 이리 흉악하게 구시는 거예요? 아기까지 다 놀라겠어요. 월규, 너도 어서 일어나. 위 의원이 너랑은 상관없는 일이라잖아. 네가 너무 긴장해서 그래. 이렇게 사소한 일로 위 의원을 불러오다니.”

부종이 심한 건 그녀도 알고 있었다. 크게 불편하진 않아 가볍게 넘겼는데, 하필이면 월규가 소란을 피우고 말았다.

묵용감이 그녀 앞에 주저앉더니 다리에 남은 흔적을 가볍게 문질렀다.

“아프지 않소?”

“정말로 안 아파요.”

위중청이 한결 깍듯한 자세로 말했다.

“왕야, 걱정하지 마십시오. 괜찮습니다. 모든 임부들이 겪는 일입니다. 당분간은 마마께서 많이 움직이셔야 증세가 좋아지실 겁니다.”

묵용감이 백천범 곁에 붙어 앉아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

“당분간 관청에 가지 않고 함께 있겠소.”

희고 통통한 손을 잡은 커다란 손이 희미하게 떨렸다. 백천범은 가만히 그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조금 감격스러운 기분이었다. 언제나 위풍당당하고 위엄 있는 초왕이었지만, 그녀의 문제에서만큼은 한없이 여린 모습을 보였다. 그를 놀려 주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지만, 괜스레 그의 체면을 깎을 순 없기에 백천범은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괜찮아요. 거리가 먼 것도 아니고, 무슨 일이 있으면 곧바로 달려오시면 되잖아요.”

그녀는 그가 그녀 곁을 지켜 주는 걸 원치 않았다. 이번처럼 크게 반응하다 괜히 하인들의 비웃음만 살 것 같았다.

결국 백천범이 잘 타이른 끝에 초왕은 다시 관청으로 돌아갔다. 위중청도 괜한 의심을 피하기 위해 앞뜰로 향했다. 그를 문까지 배웅하던 월규는 초왕이 먼저 앞으로 향하자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위 의원님, 절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위 의원님이 아니면 정말 걷어차일 뻔했어요.”

위중청이 손을 내저었다.

“대수롭지 않은 일일 뿐입니다. 그리 신경 쓸 일도 아니니 마음 쓰지 마십시오.”

이내 그는 뒷짐을 진 채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앞뜰로 향했다.

평소 그의 거만한 면만 보았던 월규는 남의 어려움도 쉽게 여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그녀를 도와주다니!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인 만큼, 그에 대한 인상이 크게 바뀌었다.

위중청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월규를 향해, 백천범의 의아한 시선이 들러붙었다.

“왜 그리 뚫어지게 위 의원을 보는 거야? 위 의원한테 돈이라도 떼인 거야?”

월규가 그녀를 흘겨보았다.

“곧 어머니가 되실 분이 어찌 그리 엉뚱한 말씀을 하십니까? 제가 언제 위 의원을 보았다고요.”

백천범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괜히 인정 안 하는 것 좀 봐. 위 의원한테 반했지? 지난번에 녹하 언니한테는 싫다고 했다며. 생각이 바뀐 거면 내가 왕야한테 말해 볼게. 위 의원의 마음을 알아봐 달라고 말이야.”

월규가 펄쩍 뛰며 손을 내저었다.

“아이참, 마마. 제발 좀 내버려 두십시오. 마마 곁에 있는 이들을 전부 내보내셔야 속이 후련하시겠습니까?”

“다 너희가 잘되길 바라서 그런 거지. 월향이는 작년에 시집을 갔고, 정월 초하루에 녹하 언니와 사부님도 혼사를 치렀잖아. 기홍 언니랑 영구 무사님도 머지않았으니 이제 월규 너만 남았어.”

“왜요, 제가 마마의 곁을 지키고 있으니 진절머리가 나십니까?”

“시집을 가도 곁에서 지내면 되잖아. 녹하 언니처럼 말이야. 나이가 찼으니 잘 생각해 봐.”

월규는 백천범이 조금 낯설었다. 마냥 어린 동생 같았던 왕비가 이제는 노파심에 이런저런 잔소리를 늘어놓는 어른이 된 듯했다. 눈앞의 왕비는 정말 많이 자라 버렸다.

그 변화가 기뻤지만, 조금 아쉽기도 했다. 어린 왕비는 해산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언행도 예전과는 달랐고, 부쩍 성숙해진 모습을 보였으므로.

“왕비 마마, 소인과 잠시 거니시지요. 위 의원 말로는 많이 움직여야 해산할 때 고생을 덜 한다고 합니다.”

그 말에 백천범이 팔을 내밀었다. 만삭이 된 후로 부쩍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위중청은 많이 걸으라고 했지만 그녀는 몇 걸음만 걸어도 숨이 차 멈춰 서기 일쑤였다. 몸이 이토록 천근만근이니 점점 더 움직이기 싫었다.

“그럼… 좀 걸어 볼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