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402)화 (401/1,192)

제402화

사장풍을 해결하니 초왕은 그간 가슴을 짓누르던 돌을 치운 기분이었다. 사장풍은 제 신부를 데리고 먼 타향으로 떠나지 않았는가. 이제 다시는 말썽거리가 되지 않을 터였다.

기분마저 상쾌해진 터라, 이런 날에는 술을 한 잔 마시고 싶었다. 그는 태자의 처소로 향했다.

태자는 초왕이 저를 찾아오자 뜻밖이라는 기색이었다.

“왕비 곁을 지키지 않고 술을 마실 여유가 있단 말이냐?”

묵용감이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늘 눈앞에 있으니 왕비도 제가 성가셨나 봅니다. 일을 좀 더 열심히 하라고 하더군요.”

태자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왕비가 사리에 밝구나. 안 그래도 내년에 있을 즉위식 준비로 네 도움이 필요하던 참이었다.”

“형님을 돕는 게 이 아우의 본분입니다. 마땅히 그리해야지요.”

사실 그도 바쁘긴 마찬가지였다. 서북을 발전시키는 일은 애초에 그가 제안했기에, 태자는 한발 물러나 있었다. 서북과 관련된 일은 초왕의 몫이었고, 아이가 태어난 후에는 시찰을 위해 서북 지역을 방문할 예정이었다.

태자가 하인을 불러 술상을 차렸다. 묵용감은 자신이 가져온 술병의 뚜껑을 열었다. 향을 맡은 태자가 싱긋 웃어 보였다.

“여아홍女兒紅인 듯하구나.”

“대단하십니다. 향만 맡고 바로 알아맞히시다니요.”

묵용감이 웃으며 말을 더했다.

“십육 년 된 여아홍입니다. 사 주인장이 계수나무 아래 묻어 두었던 걸 꺼냈는데 열자마자 온 방에 향이 가득 퍼졌지요. 색이 짙고 맛이 그윽하여 아주 훌륭했습니다. 사 주인장이 두 병을 주어 형님께도 맛을 보여 드리려고 가져왔습니다.”

태자는 사장풍과 백천범의 일을 알고 있었지만 그저 미소만 지었다.

“셋째는 부하들에게 참 잘하는구나. 사 장군이 혼인을 한다고 하니 직접 찾아가서 축하주도 마시고 말이다.”

“마땅히 그리해야지요.”

묵용감이 태자에게 술을 따라 주며 눈을 내리깔았다.

“임안성에 있을 때부터 사장풍과 연이 깊었습니다. 이제 그가 서북으로 가게 되었으니 혼인을 축하할 겸 송별연을 열어 준 셈이지요. 이번에 가면 다신 못 볼 듯합니다.”

서북 이야기가 나온 참에, 태자는 직접적으로 물었다.

“요즘 네가 보고하는 일들은 전부 서북과 관련되었더구나. 서북 지역 개발을 꼭 해야만 하는 것이냐?”

“선황께서도 하시려던 일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흐지부지되긴 했지만 말입니다. 선황께서는 안목이 남다르셨지요. 서북을 개발할 수 있다고 여기셨으니 저도 한번 해 보려 합니다. 형님도 제 성격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결정을 내렸으면 뭐가 되었든 해 봐야지요.”

“우리 머리를 합친 것보다 선황께서 훨씬 지혜로우셨지. 안타깝게도 건강은 좋지 않으셨지만. 선황께서 계셨다면 오늘 같은 상황이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태자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북쪽의 상황은 알고 있느냐?”

“요즘은 서북 지역에만 신경을 쏟고 있습니다. 북쪽의 동향은 형님께서 아실 텐데, 어찌 제게 물으십니까?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태자가 여유로운 웃음을 보이며 손에 쥔 술잔을 살짝 흔들었다.

“몽달과 북쪽에 무역 통관항을 만들어 사이가 좋아 보이더니, 어찌 된 일인지 싸움이 일어났다. 그리 큰 싸움이 아닌 걸로 봐선 아마 체면을 생각한 모양이다. 몇 차례 대화를 하는가 싶더니 얼마 전 또 다른 소식이 오더구나.

큰형님이 위수 쪽을 지키고 있던 철기병 오만을 북쪽으로 옮겼다고 들었다. 조만간 전쟁이 날 수도 있겠구나.”

묵용감은 작은 술잔을 손에 쥔 채 생각에 빠져들었다. 잠시 후, 그가 입술을 떼었다.

“몽달국은 작은 국가지만 국토가 넓지요. 북쪽부터 서쪽까지 하서회랑河西回廊 절반이 그들의 국토입니다. 전쟁이 일어난다면 만일을 대비해 서북 지역의 경계도 강화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몽달국의 의도를 짐작해 보건대, 우리가 둘로 나뉘었으니 하나씩 치려는 게 틀림없다. 당장은 북쪽과 몽달 모두 우리를 상대할 여력이 없으니, 우린 불구경만 해도 되겠구나.”

그가 묵용감의 안색을 살피며 천천히 물었다.

“혹… 북쪽과 몽달국이 전쟁을 치른다면 도와주러 갈 마음은 없겠지?”

“없습니다.”

묵용감의 대답은 단호했다.

“북쪽의 병력으로도 충분합니다. 큰형님께 부족한 건 훌륭한 장수입니다. 군대를 잘 통솔하여 전쟁을 치를 장수만 있다면 몽달국은 북쪽의 적수가 되지 못합니다.”

태자는 손에서 한참이나 빙빙 돌리던 술잔을 내려놓고 묵용감의 눈치를 살폈다.

“위수 쪽의 병사가 반의반으로 줄었으니 이 틈에…….”

묵용감의 안색이 대번에 굳었다.

“형님, 아직도 북진을 생각하십니까?”

태자는 눈꺼풀을 내리깐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묵용감이 두 사람의 잔에 술을 가득 채우며 운을 떼었다.

“단념하십시오. 건국을 위해 수없이 많은 일을 진행하는 중입니다. 새 궁이 완공되는 즉시 이주해야 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백성들에게 전쟁은 없을 거라고 알렸는데, 번복한다면 민심을 잃을 겁니다. 둘째 형님께서도 잃는 게 더 많을 테지요.”

그가 술잔을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형님께서 현군이 되시길 진심으로 바라겠습니다. 이 아우는 형님의 신하가 되어 영원히 충성을 다할 것이고, 둘째 형님의 대업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태자가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묵용감의 뜻은 명확했다. 그가 분수를 알고 본분을 지키면 충성을 다해 그와 사직을 보필하겠지만, 분수를 모르면 어찌 될지 알 수 없다는 의미였다.

태자는 괜스레 묵용감을 떠본 일을 후회했다. 묵용감의 의심을 살까 싶어, 그는 일단 담담한 미소를 보였다.

“오해를 했구나. 금릉에 수군을 보충하려다 북쪽이 불만을 가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손을 놓고 있지 않았느냐? 그쪽은 병력이 이십 만이라 경거망동할 순 없다. 하여 북쪽이 정신없는 틈을 타 조용히 수군을 몇천 정도 늘리는 게 어떻겠느냐? 그 말을 하려고 했다.”

“그 말씀이셨군요.”

묵용감이 그제야 옅게 웃으며 말했다.

“그리하는 게 좋겠습니다. 동월국은 예전부터 수군이 약했습니다. 남쪽 해상은 늘 소란이 벌어지는데도 멀리 쫓아가지 못하니, 수군을 강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태자가 이어 말했다.

“수군도 그렇지만 황성사皇城司에 대한 얘기도 하고 싶구나. 지금 우리는 전문적으로 소식을 탐문하는 기관이 없다. 솔직히 말하면, 동궁에 있었을 때 전국에 있는 이들과 왕래를 하며 비밀 조직을 만들었다. 당시 탈출할 수 있던 것도 그들 덕분이었지.

그들은 늘 외부에서 누구보다 빠르게 소식을 접하고, 충성심도 강한 이들이다. 네가 동의한다면 그들 중 일부를 불러 황성사를 세우고, 새 조정을 돌보는 데 활용하고 싶구나.”

태자가 자신의 입으로 비밀 조직을 털어놓았다. 묵용감은 다소 의외라는 생각으로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태자에게 비밀 조직이 있다는 건 그도 알고 있었지만, 그간 한 번도 언급하지 않은 사실이었다.

사실 그들처럼 높은 신분에 있으면 암암리에 세력을 형성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니 비밀 조직이 있다는 사실 자체는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다만, 그가 의아했던 것은 태자가 그 조직을 조정으로 끌어들이려 한다는 점이었다. 관직을 받게 될 테니 거동이 불편해질뿐더러, 묵용감의 감시도 피할 수 없을 텐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태자는 그에게 입장과 진심을 표하기 위해 속내를 드러낸 듯했다. 그렇다, 서로 숨기거나 속이지 않아야 앞으로 더 먼 길을 온전히 갈 수 있었다.

국정을 논하며 술을 마시던 두 형제는 점점 취기가 올랐고, 얼굴뿐만 아니라 눈가까지 붉게 물들었다. 어렵사리 속마음을 털어놓고 나니 포고와 활쏘기를 하며 허물없이 지내던 어린 시절로, 누구보다 가깝던 형제 사이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묵용감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눈빛을 흐렸다.

“형님, 그리고 하나 더 드릴 말씀이… 주아는…….”

태자도 그가 하려는 말을 알고 있는지, 말을 끊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내년 즉위식이 끝나면 내가 주아의 혼사를 정해 줄 테니. 이제 주아에게도 좋은 안식처를 마련해 주어야지.”

묵용감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가 걱정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 술자리가 모든 근심을 해결해 준 듯했다. 입꼬리를 올려 보인 그가 탁자를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취기가 오르는 듯합니다. 왕비의 노여움을 살지도 모르니 그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배웅을 위해 태자도 몸을 일으켰다. 그가 밖에 서 있던 가동을 불렀다.

“왕야를 잘 모시고 돌아가거라. 왕비가 언짢아하거든 내 책임으로 돌리고. 그래도 왕비가 내 체면은 봐주지 않더냐.”

묵용감은 손을 흔들거리더니 비틀거리며 앞으로 걸어갔다.

태자는 그의 뒷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지켜본 뒤,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어느새 제갈겸유가 등불 아래에 서 있었다. 태자의 눈망울이 잠시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곧 또렷하게 맑아졌다. 그의 얼굴에 냉랭한 기운이 감돌았다.

“초왕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는다고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지금…….”

“무엇도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전하.”

제갈겸유가 긴 수염을 훑어 내리며 미소를 머금었다.

“지금, 계획대로 되고 있지 않습니까?”

* * *

백천범은 목욕을 마치고 화장대 앞에 앉아 있었다. 월규가 길게 물결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빗겨 주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꼭 검은 비단처럼 은은한 광택을 머금고 있었다.

월규가 그녀의 머리를 천천히 빗으며 감탄을 늘어놓았다.

“왕비 마마, 머리카락이 예전보다 더 윤기가 흐릅니다. 꼭 참기름을 바른 것 같아요. 그간 보양식을 잘 챙겨 드셔서 머리카락에도 이리 윤기가 흐르나 봅니다.”

그녀가 거울 속 백천범과 눈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

“소인이 아부를 떠는 게 아니랍니다. 다른 부인들은 아이를 가지면 점점 더 기력을 잃으시는데, 마마는 그 반대입니다. 예전보다 더 생기가 넘치시지 않습니까? 이 보드라운 피부 좀 보시어요. 조금 전에 먹었던 두부보다 더 보드랍습니다.”

백천범도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더니 방긋 웃었다.

“나도 내가 점점 예뻐지는 것 같아. 부모의 용모가 이렇게 뛰어나니 아기의 외모도 엄청나겠지?”

월규가 웃으며 맞장구쳤다.

“그럼요. 우리 아기씨는 청출어람일 겁니다. 마마와 왕야보다 훨씬 뛰어나실 거예요.”

한 명은 아부에 심취하고 한 명은 자화자찬에 빠져드는데, 밖에서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백천범이 반색하며 입을 열었다.

“왕야께서 오셨나 보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묵용감이 문 발을 걷고 안으로 들어왔다. 짙은 술 내음이 훅 끼쳐왔다. 백천범이 미간을 찌푸렸다.

“또 이렇게 많이 드신 거예요?”

묵용감이 붉게 물든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안 마셨소. 정말 안 마셨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