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0화
사장풍은 뱃속이 뒤틀리는 기분을 느꼈다. 마음씨 좋은 여인이라니, 뻔뻔한 여인이겠지……. 아니, 뻔뻔하다는 건 조금 과한 표현이다. 목적이 있긴 했어도 그녀는 분명 최선을 다해 그를 보살펴주지 않았던가? 다만, 뭐랄까 그녀는… 너무도 막무가내였다.
그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오라고 한 적은 없었습니다. 본인이 이곳에 있으려고 한 것이죠.”
“제가 힘들까 봐 밀어낸 거잖아요. 또, 다른 사람들이 저에 대해 시답잖은 말을 떠들어 댈까 봐 그렇기도 하고요.”
그의 기세가 누그러지자 사앵앵도 덩달아 나긋하게 말했다.
“저는 그런 거 하나도 안 무서워요. 우리가 잘 만나 보기로 한 그날부터 마음을 정했으니까요. 살아서도 죽어서도 사 장군님 곁에 있을 거예요. 다른 이들이 손가락질하고 욕을 한다 해도 상관없어요.”
“…….”
잘 만나 보기로 한 그날이라니, 어째서 그는 처음 들어 보는 일이란 말인가…….
“아가씨…….”
“왜 그래요? 앵앵이라고 잘만 부르더니 갑자기 아가씨라니요. 정말 절 버리려는 거예요?”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 앞에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대체 어쩌다 이토록 무지막지한 사람을 만났단 말인가……. 하늘에 대고 맹세하건대, 그는 지금껏 그녀의 이름을 제대로 부른 적이 없었다. 용건이 있으면 ‘저기’하고 넘기거나 호칭을 빼고 어물쩍 부른 게 전부였다.
이제는 사앵앵이 대단해 보일 지경이었다. 그녀는 허무맹랑한 일을 진실보다 더 진실처럼 말할 수 있었다. 지금 그녀의 얼굴만 보면, 정말 그가 단물만 쏙 빼먹고 그녀를 내치는 배신자처럼 느껴졌다. 그가 말문이 막히자, 사앵앵이 울음을 터뜨렸다.
“제가 여기서 지낸 지도 두 달이 다 되어가요. 다들 저를 장군님의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몸이 나았다고 이렇게 내치시는 건가요? 대체 저더러 어찌 살란 말입니까……? 엉엉, 소문도 다 퍼져서 혼담을 권할 사람도 없을 텐데.
혼사를 치르고 쫓겨나는 것보다 더 비참한 일이 아닙니까? 엉엉, 실컷 농락만 당하다 내팽개쳐지니, 제가 누굴 탓하겠습니까? 제대로 처신하지 못한 제 탓이지요. 그래요, 버림받아도 쌉니다…….”
그녀가 소매로 얼굴을 가린 탓에 우는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흐느낌만은 선명하게 들려왔기에, 사장풍마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어찌할 바를 모르다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울지 마십시오. 대화로 풀면 될 일 아닙니까? 아이참, 쿨럭쿨럭. 앵앵, 울지 마십시오. 울지 마세요…….”
사앵앵은 너른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어깨를 끊임없이 들썩거렸다. 결국 그녀가 무너지듯 천천히 그에게 기댔다.
그녀가 이토록 우니 사장풍도 마음이 뒤숭숭했다. 그녀가 품에 안겨 있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한 채, 그는 그녀의 등을 계속 토닥이며 말했다.
“되었습니다, 되었어요. 속상한 거 다 압니다. 그만 울고 말로 얘기합시다. 그리 울고만 있으면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사앵앵의 흐느낌 사이로 또렷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혼사를 치르겠다고 약속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건… 조금 어렵습니다…….”
“으앙!”
날카로운 울음소리에 화들짝 놀란 사장풍은 순간적으로 그녀를 밀칠 뻔했다.
“알겠습니다, 울음을…….”
“그럼, 약속하신 거예요!”
어느새 사앵앵이 소매를 내리고 활짝 웃어 보였다.
“약속하셨으니까 번복하면 안 돼요!”
그녀는 곧바로 몸을 일으켜 밖으로 향했다.
“집에 다녀올게요. 아버지께 혼사를 준비해 달라고 말씀드려야 하거든요.”
사장풍은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대체 뭘 약속했단 말인가? 그가 하려던 말은 ‘알겠습니다. 울음을 그치면 생각은 해 보겠습니다.’였다.
화가 치밀었다. 젠장, 또 이 여인에게 당하고 말았다! 이렇게 팔려 가듯 장가를 갔다간 앞으로 얼마나 큰 일을 당할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사장풍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런 여인과는 절대, 절대로 혼사를 치를 수 없었다!
사앵앵은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왔다. 그녀는 사장풍에게 반박할 틈을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어쨌든 ‘알겠다’라는 말을 들었으니 그것으로 되었다.
빈손으로 돌아온 그녀를 보고 사성성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어찌 빈손으로 오는 게냐?”
그녀가 곧바로 히죽거리며 물었다.
“왜요? 사위가 보고 싶으세요? 나은 지 얼마 안 되었으니 아직 무리하면 안 돼요.”
“…그릇은 어디에 두고 빈손으로 오냔 말이다.”
“…아버지, 지금은 자질구레한 일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에요. 아주 중요한 일이 있거든요.”
사성성이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
“중요한 일은 무슨 중요한 일?”
“혼사를 올려야 해요. 지금이요. 곧바로, 당장이요.”
사성성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게 무슨 말이냐. 어찌 이리 급하게 하겠단 말이냐?”
“아버지께서 그러셨잖아요. 사 장군이 침대에서 걸어 내려올 수 있으면 혼사를 올리라고요.”
사성성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래도 이건 너무 급하지. 적어도 길일은 정해야 하지 않겠냐? 이런 식으로 아무렇게나 혼사를 치를 수는 없다.”
“늦어지면 도망이라도 칠까 봐 걱정돼서 그래요.”
사성성은 그제야 알겠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집에 혼자 내버려 두었으니 걱정이 될 만도 하지.”
그 말에 사앵앵이 가게 점원을 불렀다. 그에게 사장풍의 집에서 그릇을 가져오라고 분부하던 사앵앵이 험악하게 덧붙였다.
“내가 도착하기 전까진 절대 그 집을 떠나지 마. 나 대신 사 장군님을 잘 감시하란 말이야. 만약 사 장군님이 도망이라도 치면, 그땐 너한테 책임을 물을 테니 알아서 해!”
그녀의 말투는 꼭 여자 산적을 연상케 했다.
점원은 연신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재빨리 사장풍의 거처로 뛰어갔다. 새신랑이 도망이라도 친다면, 그걸 전하게 될 자신은 아가씨의 손에 죽을지도 몰랐다…….
사성성은 여전히 도리에 어긋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찜찜한 마음에 사앵앵을 타이르려 했다.
“앵앵아, 너무 무리한 요구가 아니냐?”
사앵앵이 눈을 희번덕거리며 사성성을 돌아보았다.
“아버지, 몰아세우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도 있는 거예요. 아버지가 알려 주신 거잖아요.”
“…….”
사성성 역시 자신의 딸을 말릴 방법을 몰랐다.
* * *
사장풍은 잠시 낮잠을 잘 생각이었다. 침대에 눕자마자 가게 점원이 안으로 들어와 인사를 올렸다.
“작은 어르신, 아가씨께서 그릇을 가져오라고 하셔서 찾아왔습니다.”
사장풍은 ‘작은 어르신’이라는 호칭이 못마땅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사앵앵이 이곳에 머물기 시작한 뒤로 취선루의 점원들은 그를 집안의 사위로 여겼다. 자연히 그를 부르는 호칭은 ‘작은 어르신’이 되었다. 그가 인정하든 안 하든, 반응을 하든 안 하든 매일같이 불러 댔다.
“부엌에 있으니 가져가게. 갈 때 문 잘 닫고.”
이젠 상대하기도 성가셨던 그는 다시 누워 잠을 청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밖으로 나가는 기척이 없었다. 집에 다른 이가 있으면 편히 잘 수 없었기에 그는 숨을 죽이고 부엌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다. 그는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와 부엌으로 들어갔다.
부엌 입구에서 보니 그릇은 여전히 부뚜막 위에 놓여 있었다. 그릇을 가져간다던 점원은 자그마한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사장풍은 쓸데없는 참견을 싫어했지만, 눈앞에서 저리 게으름을 피우고 있으니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그는 적당히 일깨워 줄 요량으로 점원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그릇을 가지러 왔다면서 어찌 잠이 든 것인가?”
점원이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은 어르신, 낮잠은 좀 주무셨습니까?”
“자네가 안 가는데 어찌 잘 수 있겠나? 나는 다른 이가 집에 있으면 편히 잘 수 없으니 어서 돌아가게.”
점원은 어쩔 수 없이 꾸물대며 그릇을 정리했다. 그러나 고작 접시 몇 개와 젓가락 두 쌍이 전부인데, 시간을 끌 것도 없었다. 게다가 사장풍이 지켜보고 있으니 더 버티기도 힘들었다. 점원은 속이 바짝 타들어 가는 걸 느끼며 사앵앵을 원망했다.
‘아가씨는 왜 아직도 감감무소식이람…….’
결국 정리를 마친 그가 넉살 좋게 웃어 보였다.
“작은 어르신, 물 한 잔 얻어 마셔도 되겠습니까?”
사장풍이 모퉁이에 놓인 물독을 턱 끝으로 가리켰다.
“저기 있으니 직접 떠 마시게.”
점원은 물독을 힐끔 살펴보고는 다시 넉살 좋은 표정을 보였다.
“그것이, 차를 좀 마시고 싶어서요.”
“꿈 깨게. 여기가 차관도 아니고. 냉수밖에 없으니 그거라도 마시게나, 싫으면 관두게.”
지금껏 그래왔듯이, 사장풍은 사앵앵의 식구들에게 그리 살갑게 대하지 않았다.
점원은 어쩔 수 없이 표주박으로 물을 떠서 천천히 들이켰다.
“작은 어르신, 몇 시진이나 되었습니까?”
사장풍이 언짢은 기색으로 답했다.
“낮잠도 못 잤는데 해가 산으로 기울기 직전이라네. 그런데도 시간을 묻는 겐가? 어서, 어서 돌아가게. 어찌 그리 꾸물대는 것인가?”
결국 점원은 찬합을 들고 꾸물거리다가 문 앞으로 향했다.
“작은 어르신.”
“또 무슨 일인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시간을 끌기 위해 부른 것이니, 할 말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럼 어서 가게.”
사장풍은 성가시다는 듯 그를 밀쳤다.
대문 밖으로 쫓겨난 점원은 머뭇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는 한 걸음을 뗄 때마다 세 번씩 뒤를 돌아보았다. 문 앞에 선 사장풍이 그 모습을 빤히 지켜보고 있었다. 모르는 이가 보면 서로 헤어지기 아쉬워하는 것처럼 보일 터였다.
점원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꼴이었다. 이렇게 주루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아가씨의 성격이 얼마나 난폭한데, 이대로 가면 못 볼 꼴을 당할지도 모른다. 그는 사장풍이 잠시 한눈을 판 사이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설령 사장풍이 도망친다 해도 길은 이곳밖에 없으니 이 길목에서 잘 지키고 있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사장풍이 어떤 사람인가? 구문 제독 출신인 데다 우원 장군의 자리까지 올랐던 이다. 그런 하찮은 재주로는 사장풍의 눈썰미를 피할 수 없었다. 나무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온 사장풍이 점원의 옷깃을 붙잡고 끌어당겼다.
“어서 말하거라. 무슨 이유로 이리 수상쩍은 짓을 하느냐?”
사장풍의 손에 끌려 다니던 점원은 덜컥 겁이 났다. 장군까지 올랐던 남자의 손에 잡혔으니 어쩌면 좋단 말인가?
몸 성히 돌아갈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그가 울상을 지었다.
“그, 그것이 아가씨, 아가씨께서 작은 어르신이 도망칠지도 모르니 잘 지켜보라고 하셨습니다.”
사장풍의 손아귀에서 천천히 힘이 빠져나갔다. 마치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했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도망치면 그만인 일을!
그가 괜히 목청을 가다듬고 얼굴을 굳혔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사내대장부가 어찌 도망을 간단 말이냐? 죽음이 눈앞에 닥쳐도 목숨을 구걸하진 않는단…….”
그때, 점원이 멀리서 다가오는 사앵앵을 발견하고 서둘러 손을 휘적거렸다.
“아가씨, 아가씨, 여깁니다요! 여기 작은 어르신이 계십니다!”
두 사람을 발견한 사앵앵도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녀가 빙그레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이곳까지 마중을 나오셨습니까? 어서 들어가시지요.”
“…….”
지금 도망쳐도 늦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