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399)화 (398/1,192)

제399화

두 사람은 한참이나 넋을 놓고 침묵했다. 마침내 사앵앵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제 다 나은 듯하니 제 간호는 필요 없겠네요. 이만 갈게요.”

그녀는 도망치듯 주루를 향해 걸어갔다.

사장풍은 그녀를 쫓아 발을 뗐다. 그러다 자신이 제법 안정적으로 걷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가 시선을 발끝으로 향했다. 제자리에서 몇 바퀴 돌던 그는 신이 나 폴짝폴짝 뛰기까지 했다. 그의 머릿속에서 사앵앵은 빠르게 사라지고 말았다.

사앵앵은 걸음을 내디디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힘들게 병간호를 해 줬더니 나를 밀기나 하고! 양심도 없지. 나도 자존심이란 게 있는데! 갈 거야. 이제 다시는 안 도와줘…….”

슬쩍 고개를 돌려 사장풍을 바라보니 그는 폴짝폴짝 뛰어 다니느라 바빠 보였다.

“정말 날 잡지도 않는 거야? 이제 나는 필요 없다는 거야?”

그 모습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사앵앵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녀가 연신 스스로에게 모진 말을 쏟아냈다.

“내가 다시는 도와주러 오나 봐라. 그럴 바에는 사장풍 너희 사씨로 성을 갈고 말지!”

한참 후에야 사장풍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의자에 앉았다. 움직일 수 있게 됐으니 몸을 천천히 풀어주는 편이 나았다. 사실 오래전부터 자신의 몸이 거의 회복됐다는 생각은 들었다.

다만 매일 사앵앵과 지내다 보니 그녀를 당연하게 의지해 왔다. 그녀가 부축해 줄 때마다 그는 뼈가 없는 사람처럼 그녀에게 온전히 기대지 않았던가. 그 때문일까, 이렇게나 기력을 회복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는 다시 한번 발을 구르며 감격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사람다운 모습으로 돌아왔다! 두 달간 사앵앵에게 시달린 걸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렸다. 평생 당할 창피를 두 달 만에 전부 겪은 듯했다. 이제 몸도 나아졌고 그녀도 떠났으니 완벽히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이 피어 올랐다.

사장풍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머리가 팽 돌았다. 뒤늦게 배고픔이 밀려왔다. 평소 그의 끼니는 전부 취선루에서 가져다주었다. 그리곤 설거지 할 필요 없이 취선루에서 빈 그릇을 전부 다 가져가기도 했다.

취선루에서 오늘 아침으로 찐빵과 두유를 전해 주었다. 그것들은 입맛이 좋아 아침에 이미 남김없이 먹어 치웠고, 점심은 아직 오기 전이었다. 아마도… 다시는 가져다주지 않겠지.

슬그머니 죄책감과 같은 감정이 고개를 들려 하자, 사장풍은 의도적으로 흩어 버렸다. 그가 부뚜막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말했다.

“산 입에 거미줄이야 칠까? 손발이 없는 것도 아닌데, 입에 풀칠은 할 수 있겠지!”

일단 끼니를 해결하기 전에 목욕부터 하기로 했다. 몸을 다친 이후로 씻을 때마다 전쟁을 치르다시피 했다. 사앵앵이 매번 안으로 들어오겠다고 소리치는 통에 그는 바지를 입고 몸을 씻곤 했다. 그녀가 언제 짐승으로 돌변해 그를 어찌할까 봐 무서웠기 때문이다.

이곳엔 목욕간이 따로 없으니, 부엌에서 씻는 수밖에. 그는 데운 물을 욕통에 붓고 몸을 푹 담갔다. 뜨끈한 물에 들어가니 온몸이 풀어지는 듯 노곤함이 밀려왔다. 피부가 벌게질 만큼 따뜻한 물에 몸을 불리자 때가 후드득 떨어졌다. 이렇게 개운할 수가!

몸을 여기저기 문지르느라 여념이 없을 때… 갑작스레 문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 집 안으로 들어온 듯했다. 몸이 나아졌으니 좀도둑 한 명쯤이야 쉽게 해결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옷을 홀딱 벗고 있다. 이대로 마주치기라도 하면 얼마나 난감하겠는가!

생각해 보면 집 안에 훔쳐 갈 만한 물건은 없었다. 그는 신경 쓰기도 성가셔, 아예 눈을 감고 욕통에 몸을 기댔다. 젖은 수건으로 얼굴을 덮은 채, 좀도둑이 알아서 돌아가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발소리는 점점 그를 향해 다가왔다. 이상한 낌새에 황급히 수건을 걷은 그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두 손으로 가슴을 가리고 욕통 안에 몸을 움츠렸다.

“어, 어째서 돌아왔습니까?”

사앵앵이 태연하게 손에 든 찬합을 흔들었다.

“밥 갖다주러 왔죠!”

“다, 당신은 내, 내가, 아, 아니, 다, 당신…….”

“다, 당신, 내, 내가, 거리지 말고 얼른 나와서 밥 먹어요.”

사앵앵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부뚜막 위에 찬합을 올려놓고, 음식을 꺼내 놓기 시작했다.

“어서요. 다 식는단 말이에요.”

사장풍은 난처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태였다. 부엌이 조금 어둡긴 해도 사앵앵의 음흉한 두 눈빛이 모든 걸 꿰뚫어 보는 것만 같았다.

“우선 나가십시오. 옷부터 입고…….”

“뭘 그리 부끄러워하세요.”

사앵앵이 그를 비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못 본 곳이 어디 있다고. 지금 안 나올 건가요? 그럼 나 먼저 먹을게요.”

그녀는 밥그릇과 젓가락을 집어 들더니 아예 부뚜막 옆에 서서 밥을 먹기 시작했다.

아까 그녀를 밀친 일로 죄책감을 느꼈던 그는… 지금 완전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왜 살짝 밀쳤는지 후회가 막심했다.

그는 수건을 어깨에 걸치고 두 손을 교차해 몸을 가렸다. 그리곤 투덜대며 그녀를 등졌다.

사앵앵은 그럴듯한 복수를 한 듯해 기분이 좋아졌다.

‘흥, 이 사앵앵과 싸우려면 사장풍 넌 한참 멀었다고!’

그녀는 보란 듯이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욕통 안에서 그녀를 피해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야 했다. 그 탓에 욕통 밖으로 물이 계속 넘쳐흘렀다. 그는 이를 바득 갈며 눈을 감았다. 차라리 자신이 그녀를 안 보는 게 마음이 편할 듯했다.

한술 더 떠, 사앵앵은 닭고기 한 점을 집어 그의 코 밑에 가져다 댔다.

“맛있겠죠?”

그때 사장풍이 슬쩍 입을 벌렸다. 공연히 먹을 기회를 놓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입안으로 젓가락이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그가 힘껏 음식을 깨문 순간, 이가 온통 저릿했다. 정작 그가 깨문 건 닭고기가 아닌 젓가락이었다.

미간을 찌푸리는 그를 보고 사앵앵이 몸을 들썩거리며 웃었다.

정성을 다해 두 달간 보살핀 탓일까? 요즘 들어 사앵앵은 사장풍이 꼭 아들처럼 느껴졌다. 말다툼하고 소란을 피우다가도 지나고 나면 또다시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사장풍이 그녀를 밀쳤을 때, 그녀는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스스로 모진 말을 퍼부으며 돌아가긴 했지만, 막상 주루에 도착하니 화가 조금씩 가라앉았다. 이내 그녀는 한 식구 사이에 원수가 어디 있냐며 스스로를 달랬다. 그리곤 직접 찬합을 싸서 그에게 돌아왔다.

다만 그가 목욕 중일 줄은 몰랐다. 사앵앵은 회심의 미소를 머금었다. 이런 좋은 기회에 복수하지 않으면 언제 한단 말인가?

욕통 속에서 분을 삭이는 그를 보자 그녀는 더할 나위 없이 상쾌해졌다. 문득 물이 차가워진 걸 알아차리자, 그가 감기라도 들까 싶었다. 그녀는 음식을 덜어 놓고 괜히 사나운 말투로 말했다.

“금방 올 테니까 얼른 갈아입어요.”

말을 마친 그녀가 깔깔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사장풍은 그녀를 있는 힘껏 꼬집어 주고 싶었다. 그녀의 뒷모습을 매섭게 노려보던 그는 혼자 남게 되자마자 곧바로 욕통을 뛰쳐나와 몸을 씻었다. 일단은 도포라도 걸치고 볼 일이었다.

옷으로 몸을 가리니 드디어 마음이 놓였다. 그는 그제야 천천히 바지를 입을 수 있었다. 막 바짓가랑이에 다리를 끼워 넣었는데 사앵앵이 안으로 들어왔다.

“아이고, 아직도 바지를 입는 거예요?”

도포를 걸치긴 했지만 안에는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 꼭 뭔가를 본 듯한 사앵앵의 눈빛에 그는 난처하기 짝이 없었다. 빨리 옷을 입으려 허둥거리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지만, 곧바로 사앵앵이 팔을 잡아 부축했다.

“빨리 입어요. 여인보다 손이 더 많이 간다니깐, 정말.”

이제 익숙해진 터라, 그는 그녀의 손에 붙들린 채로 바지를 추켜올렸다. 그래도 허리 매듭을 묶을 땐 그녀를 피해 슬쩍 옆으로 돌아섰다.

옷매무시를 가다듬은 그는 성큼성큼 부뚜막 앞으로 가서 밥을 먹었다. 두 달간 함께 보낸 덕분에 사앵앵은 그가 무얼 좋아하는지 훤히 꿰고 있었다. 그녀는 늘 그가 좋아하는 음식을 빠트리지 않았다. 처음엔 그녀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무얼 하든 밀어내기 바빴지만, 그도 점점 생각을 바꾸었다.

‘젠장, 저자 때문에 매일 고생만 하는데 왜 음식까지 마다한단 말인가.’

그는 이런 마음으로 사앵앵이 가져오는 각종 귀한 음식을 전부 배 속으로 집어넣었다. 한편으로는 이 고생을 하는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가 조용히 밥을 먹고 있으니 사앵앵이 의자를 가져와 맞은편에 앉았다.

“사 장군님은 정말 배은망덕한 사람입니다.”

시선을 올려 그녀를 바라보던 사장풍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이렇게 오랜 시간 간호를 해 줬는데… 겨우 이런 식으로 보답하십니까?”

그제야 사장풍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고의는 아니었습니다.”

무뚝뚝한 대답이었지만 사앵앵은 내심 만족스러웠다.

“그럼 왜 쫓아오지 않았는데요?”

“…….”

그간 어떻게 해도 쫓아낼 수 없던 사람이 제 발로 걸어 나갔는데… 무엇 하러 쫓아간단 말인가? 사장풍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겨우 삼켰다.

“돌아가면서 혼자 맹세를 했습니다. 뭔지 아십니까?”

“…….”

“한 번만 더 사 장군님을 도와주면 사 장군님의 성씨로 성을 간다고요.”

“좋은 맹세네요.”

사장풍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찬성했다.

“잘 생각했습니다.”

사앵앵이 그의 말에 활짝 웃으며 말했다.

“사 장군님도 동의하시는 거예요?”

“…….”

아무래도 무언가 잘못된 듯했다…….

“저도 좋아요.”

사앵앵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돌아왔어요. 사 장군님의 성씨를 따를 수 있게 준비할게요.”

사장풍이 코웃음을 쳤다.

“그러십시오. 안타깝지만 전 이렇게 큰 딸을 키울 여력이 되지 않습니다.”

“무슨 딸이에요!”

사앵앵이 답답한 듯 가슴을 콩콩 치며 설명했다.

“당연히 혼인을 치르고 사 장군님의 성을 따르는 거죠.”

“…….”

사장풍은 순간 아무 맛도 느낄 수 없었다.

“아버지가 그러셨어요. 사 장군님이 혼자서 침대를 걸어 내려올 수 있으면 혼사를 올리라고요.”

“세상에 이토록 무지막지한 부녀는 또 없을 겁니다!”

사장풍이 그릇과 젓가락을 부뚜막에 있는 힘껏 내려놓았다.

“뭐가 무지막지하다는 거예요?”

사앵앵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람이 양심이라는 게 있어야죠. 사 장군님이 절 넘어뜨렸지만, 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한가족이니까 시시콜콜 따지기 싫어서요. 사 장군님이야말로 어떻게 안면 몰수할 수가 있어요? 몸이 다 나았다고 조강지처를 버리려는 건가요? 그럼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사장풍이 코웃음을 쳤다.

“제게 조강지처가 어디 있습니까? 혼인도 안 했는데 조강지처는 무슨?”

“맞아요. 전 혼인도 안 했는데 사 장군님을 보살폈어요. 어디에서 이렇게 마음씨 좋은 여인을 찾겠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