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8화
위중청은 초왕비의 태아를 지키는 일로 의술을 마음껏 뽐냈다. 위중청이 처방해 준 약 세 첩을 먹고 나자 초왕비는 기력을 회복했다. 건강을 되찾은 그녀는 언제 누웠냐는 듯 침대를 벗어나 활발하게 움직였다.
이번 일로, 초왕은 위중청의 의술을 높게 평가했다. 내친김에 그의 앞날까지 약속했다.
“자네가 사직을 청하지 않는 이상, 내 수행 의관은 늘 위 의원일세.”
그간 위중청이 얼마나 바라고 바라던 말인가. 유랑 생활을 해 오며 온갖 고생을 겪었던 그는 비빌 언덕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이제 그는 더 이상 거리를 헤매며 연고를 팔 필요도, 돈 몇 푼 때문에 언성을 높이며 싸울 일도 없었다.
이제 그는 녹봉을 받고 정해진 곳에서 머무는 관직자였다. 더욱이 초왕의 수행 의관이다. 언젠가 좋은 아내도 얻고 통통한 아들도 하나 낳으면 남부러울 것 없이 평안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리라. 위중청은 앞으로 펼쳐질 비단길 같은 인생을 상상하며 기쁨에 잠겼다.
부와 명예를 가져다줄 자리였건만, 단 하나 걸리는 게 있었다. 초왕은… 유독 젊은 인재들을 꺼렸다. 그들이 자신의 어여쁜 부인을 빼앗아갈까 봐 늘 불안해하고 있었다.
사실 위중청은 초왕을 이해 못 하는 게 아니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외모가 워낙 점잖고 풍채가 뛰어나지 않은가. 거리를 거닐면 뭇 여인들의 시선이 그에게 들러붙곤 했다. 타고난 외모를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가 좀 더 자중하는 수밖에.
훗날 초왕이 안면을 몰수하고 말을 바꿀지도 몰랐기에 그는 약속을 보증해 줄 장치가 필요했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초왕비에게 알리는 것이다.
그날, 초왕비의 진맥을 마친 그가 웃으며 말했다.
“아기씨께서는 아주 건강하십니다. 심장 박동이 힘찬 걸 보니 분명 튼튼한 세자 아기씨일 겁니다!”
백천범이 배를 어루만지며 활짝 웃었다.
“위 의원이 이렇게 정성껏 보살펴 주니 저와 왕야는 늘 안심이에요.”
“마땅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 마마. 왕야께서 소관이 사직을 청하지 않는 한, 수행 의관을 바꾸지 않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세자 아기씨의 평안뿐만 아니라 왕야, 왕비 마마의 건강도 소관의 책임입니다.”
백천범은 기쁨을 숨기지 않으며 묵용감을 바라보았다.
“정말요? 위 의원이랑 앞으로도 함께 지낼 수 있는 거예요?”
묵용감이 미묘한 표정으로 위중청을 잠시 바라보더니 답했다.
“본왕의 말은 아이들 장난이 아니오. 의관은 본래 오 년에 한 번씩 바꾸지만, 위 의원의 의술과 인품을 믿으니 앞으로도 계속 위 의원에게 맡기겠소.”
백천범이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위 의원, 걱정하지 마세요. 왕야는 한번 말씀하신 건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니까요. 이제 관청에서 지내실 테니 나중에 좋은 신붓감도 구해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왕비 마마!”
위중청은 서둘러 허리를 숙였다.
“왕야, 별다른 일이 없으시다면 소관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위중청이 인사를 올리자 묵용감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본왕도 관청에 볼일이 있으니 함께 가세.”
저와 함께 관청으로 간다는 초왕의 말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함께 바깥으로 나온 후 위중청은 줄곧 고개를 숙이고 초왕의 뒤를 따랐다. 한참 걸었을까? 초왕이 힐끔 그를 바라보았다.
“어찌, 본왕이 말을 바꿀까 봐 걱정이라도 된 건가? 굳이 왕비에게 확인을 받으려고?”
위중청은 초왕이 자신의 속내를 단번에 파악할 줄은 몰랐다. 그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소관이 감히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왕야의 말씀은 중천금인데 바꾸시다니요. 소관은 그저 충심을 표했을 뿐입니다.”
“내 앞에선 어물쩍 넘어갈 수 없네.”
초왕은 뒷짐을 지더니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다른 건 몰라도, 내가 금기시하는 것은 자네도 잘 알고 있겠지.”
“예, 예. 소관도 알고 있습니다.”
당연히 초왕비가 아닌가. 예쁜 얼굴에 성격도 좋은 초왕비를 누구나 좋아했다. 그러나 그 옆을 군신이 떡하니 지키고 있는데, 누가 감히 초왕비를 넘본단 말인가?
위중청은 최대한 초왕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도록 허리를 공손히 숙였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초왕이 별안간 걸음을 멈추더니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 지난번 자네가 가져온 화첩 말일세…….”
“아, 그 화첩 말씀이십니까.”
그제야 위중청은 초왕의 의도를 깨달았다. 바로 그 화첩 때문에 함께 나왔으리라!
“다음 편도 있으니 소관이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초왕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되었네. 그만 가보게.”
위중청은 인사를 올린 뒤, 빠르게 앞뜰로 향했다. 반월문을 막 나서려는데 월규와 녹하를 맞닥뜨렸다. 녹하는 토끼가 들어 있는 대바구니를 꽉 쥐고 있었다. 두 사람은 토끼를 데리고 산책을 다녀온 듯했다.
월규가 위중청에게 공손히 인사를 건넸다.
“위 의원님, 안녕하세요. 왕비 마마의 진맥을 마치고 돌아오시는 길입니까?”
“예. 아가씨들께서는 토끼를 데리고 산책을 다녀오십니까?”
“예. 왕비 마마께서 앞뜰에 풀이 많이 자랐다고 하셔서요. 토끼들에게 배불리 먹이고 오는 길입니다.”
녹하가 그의 안색을 유심히 살피다 물었다.
“위 의원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습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별일 아닙니다.”
위중청이 짐짓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왕야께서 계속 절 이곳에 남기시겠다고…….”
“와, 정말 잘되었습니다.”
녹하가 웃으며 말했다.
“종실 왕부의 의관은 오 년마다 바뀌지 않습니까? 왕야께서 위 의원님을 계속 곁에 두겠다고 하셨으니, 그만큼 의원님을 신임하신다는 뜻이지요. 왕야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셔야겠습니다.”
“물론이지요.”
위중청이 문득 호기심 어린 눈으로 녹하를 보았다.
“왕야께서 북쪽에 계실 때도 오 년마다 의관을 바꾸셨습니까?”
“그땐 저택에 의관이 없었습니다. 누군가 아프면 밖에서 의원을 모셔왔지요.”
“어째서 의관을 두지 않으셨습니까?”
초왕을 오랫동안 모셔 왔으니, 녹하가 그 이유를 모를 리가 없었다.
“왕비 마마께서 저택에 들어오시기 전엔 왕야께서 뭐든 간소하게 처리하셨습니다. 하인들도 다른 왕야의 저택에 비해 훨씬 적었지요. 집안의 대소사는 학평관 어르신께 다 맡겼고, 그때 왕야께서는 고독한 군주보다 훨씬 더…….”
녹하는 자신의 말이 길어진다는 생각이 들자 황급히 말을 끊었다.
“바쁘실 텐데 이만 볼일 보십시오, 위 의원님. 왕비 마마께서 걱정하실지도 모르니 저희는 돌아가 보겠습니다.”
위중청은 두 손을 맞잡아 두 시녀에게 예를 표했다. 그리곤 멀어지는 두 시녀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녹하의 말을 끝까지 듣진 못했어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초왕이 고독한 군주보다 훨씬 더 고독했었다는 말이리라. 그 당시엔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초왕은… 그가 입을 씰룩거리며 웃었다. 조금 전 뻔뻔하게 화첩을 달라고 했던 모습만 보면 고독한 군주와는 너무나도 멀어 보였다.
월규와 함께 걷던 녹하가 슬쩍 운을 떼었다.
“네가 보기엔 위 의원은 어떤 것 같아?”
“의술이 뛰어나지요.”
“아니, 내 말은, 됨됨이가 어떤 것 같냐고.”
월규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괜찮은 것 같습니다. 그건 왜 물으십니까?”
녹하가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중매를 서려고 그러지. 이제 왕야의 총애를 받는 사람이 되었으니 출세할지도 모르잖아. 사람의 앞일은 헤아릴 수 없는 법이니까…….”
그녀의 말에 월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누구한테 중매를 서 주시려고요?”
녹하는 피식 웃으며 월규를 바라보았다.
“누구긴 누구겠어, 너지! 다 짝이 있는데 너만 없잖아. 내가 보기엔 꽤 괜찮은 사람 같아. 인물도 훤하고 점잖은 데다 직업도 번듯하잖아. 나와 기홍이는 호위 무사에게 시집을 가지 않니.
아무리 왕야의 신임을 받는다고 해도 칼날에 피를 묻히는 직업이라고. 임무를 수행할 때마다 우리가 마음을 얼마나 졸이는데. 하지만 의관이라면 밖에서 고생할 일도 없고 체면도 살고… 얼마나 좋아?”
월규가 입을 삐죽거렸다.
“위 의원은 너무 거만합니다. 늘 다른 사람들을 내려다보지 않습니까? 관저에 들어오기 전엔 엉터리 연고를 팔며 거리를 떠돌았다면서, 이제는 의관이 되었다고 거드름을 피우지 않습니까? 사람을 부리려는 말투도 그렇고, 전 그런 사람 딱 질색입니다.”
녹하가 콧방귀를 뀌었다.
“아이고, 싫다면서 그렇게 훤히 꿰고 있는 거야? 무엇보다 거드름을 피우는 게 아니라 자기 재능을 아니까 조금 오만한 거 아니겠어? 듣자니 대대로 뛰어난 의술을 자랑하는 집안 출신이라며.
그러다 어려운 상황이 닥쳐 떠돌아 다닌 거고. 고생을 하지 않았다면 네가 어떻게 위 의원을 만났겠니?”
월규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듯하게 말씀하셔도 저는 싫습니다.”
녹하가 월규를 돌아보더니 킥킥거렸다.
“나도 한번 해 본 말이야. 그쪽에서 싫다고 할지도 모르지, 뭐.”
“…….”
* * *
중추가 지나며 날이 점차 서늘해졌다.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었다. 사앵앵은 쌀쌀한 날씨에 오가는 수고를 덜 겸 아예 사장풍의 집에 눌러앉았다.
계절이 바뀌도록 단둘이 살았으니 남들이 쑥덕거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곧 혼사를 올리게 될 테니, 매일 오고 갈 일 없이 함께 있는 편이 나았다.
반면 사장풍은 자포자기한 상태였다. 어차피 그녀를 이길 수도 없기에 그녀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두고 있었다.
그날 홧김에 말을 내뱉은 사성성은 그 후로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그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사앵앵은 집에도 들어오지 않고 사장풍과 살기 시작했다! 참 꼴 좋은 일이다.
그는 온종일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사장풍 옆에 딱 붙어 있는 딸이 못마땅했지만, 그래도 귀한 딸이 굶기라도 할까 봐 하루에 세 번씩 식사를 보내 주었다.
이렇게 해서 사앵앵은 사장풍과 살림을 차렸다. 한 침대에서 잠을 청하진 않아도, 그들의 생활은 평범한 부부들과 다를 게 없었다.
환자를 돌보는 일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돈을 왕창 떼인 것처럼 시종일관 굳은 얼굴인 사내라면 더욱더 그러했다. 그러나 사앵앵이 누구인가. 그녀는 고통 속에서도 즐거움을 찾는 낙천적인 성격이었다. 그녀는 조금씩, 그녀만의 요령을 터득할 수 있었다.
사장풍이 머리끝까지 화가 나면 그녀는 기뻐하며 깡충깡충 날뛰었다. ‘네가 날 싫어해서 어쩔 건데?’ 하는 뻔뻔한 얼굴로 말이다.
어느새 그녀는 사장풍에게 장난을 치지 않으면 온몸이 찌뿌둥해질 정도였다.
볕이 좋은 김에 그녀는 의자를 문밖에 가져다 놓고 사장풍을 부축해 나왔다. 입구를 지나자마자 그녀는 손을 놓으며 장난을 쳤다.
“꽉 잡아요. 넘어지면 내 책임 아니에요.”
사장풍이 코웃음을 쳤다.
“부끄러움을 좀 아시오!”
화가 난 사앵앵이 손으로 그를 찔렀다.
“누가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거예요? 누가 부끄러움을 모른다고…….”
그녀는 분명 사장풍이 휘청거리다 넘어질 줄 알았다.
그러나 성이 난 사장풍이 그녀의 손을 뿌리치자, 오히려 그녀가 ‘콰당’ 소리와 함께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얼마나 세게 밀었는지 엉덩이가 산산이 조각나는 느낌이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그녀가 경악하며 사장풍을 올려다보았다. 당황한 사장풍도 자신의 손만 바라보았다. 그녀를 밀쳤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눈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