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7화
초왕은 그에게 줄곧 눈짓을 보내고 있었다. 뒤늦게 의도를 파악한 위중청이 목청을 가다듬었다.
“왕야의 말씀이 맞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왕비 마마. 소관이 반드시 아기씨를 지켜 드리겠습니다.”
그가 평소와 같이 말을 이었다.
“곧은 자세로 편히 누우시고, 힘을 빼십시오. 감정이 격해지셔도 안 되니 평정심을 유지하십시오. 소관이 방금 맥을 짚었는데, 태상이 불안하긴 해도 심장이 뛰고 있었습니다.
아기씨께서 살아 계시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오늘 무엇을 드셨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그래야 약을 제대로 처방할 수 있습니다.”
백천범이 잠시 생각하더니 하나하나 읊기 시작했다.
“밤이 들어간 꿩 요리랑 고기완자, 메추리구이, 뱅어 볶음, 그리고…….”
그녀가 잠시 머뭇거리자 묵용감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기억하고 있으니 위 의원에게 대신 말해 주겠소. 그대는 한숨 더 자고 푹 쉬시오.”
말을 마친 그가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묵용감이 걸음을 옮기자 곧바로 세 명의 시녀가 침대 옆으로 다가왔다.
묵용감은 위중청을 데리고 밖으로 향하면서 나머지 의원들을 불렀다.
“다들 이리 와서 위 의원과 처방을 상의해 보시오.”
의원들은 황송해하며 서둘러 뒤를 따랐다.
다들 밖으로 떠나니 방 안에 휑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기홍과 녹하, 월규는 침대 옆에 서서 한시도 백천범에게 눈을 떼지 않았다.
위중청이 왔다는 소식에, 자신의 방에서 쉬던 태자도 묵용감을 찾아왔다. 그는 모사 제갈겸유를 대동한 채였다.
황태자가 밤을 새우며 자신을 돕고 있으니 묵용감은 조금 감격스러웠다.
“둘째 형님, 가서 주무십시오. 이렇게 의원들이 많은데…….”
태자가 그의 말을 끊었다.
“한 명이라도 더 자리를 지키면 그만큼 잘 풀릴 가능성이 있지 않겠느냐.”
이내 태자가 제갈겸유를 가리켰다.
“제갈 선생이 의원은 아니지만 워낙 식견이 넓으니,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태자의 말이 맞았다. 묵용감은 예를 갖춰 두 사람에게 앉으라고 청했다.
일찍이 옥춘당의 주인장부터 점원까지 전부 객잔으로 데려온 터였다. 백천범이 잠들었을 때 묵용감이 그들을 심문했지만, 모두 억울함을 호소할 뿐이었다. 그들이 무엇 하러 독을 타겠는가.
더욱이 상에 올라온 음식은 백천범이 기억한 음식이 전부였다. 꿩 요리와 고기완자, 메추리구이, 뱅어 볶음과 계화즙.
몇 가지 음식을 두고 의원들이 잠시 토론했지만 원인이라 확신할 수 없었다. 이것들은 옥당춘에서도 내로라하는 대표 음식이었다. 매일 수많은 손님이 옥당춘에서 주문하는 데다가 서로 상극도 아니었다. 음식을 주문하는 이들 중에는 임산부도 많았지만, 초왕비처럼 유산기를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주루를 봉쇄하라는 명을 내릴 때, 태자는 모든 식재료도 살피도록 지시했다. 다들 식재료는 물론이고 남은 음식이 버려진 물독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이상한 점은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문제였단 말인가?
다들 골머리를 앓을 뿐, 좀처럼 방법을 떠올리지 못했다. 그때, 줄곧 침묵을 지키던 제갈겸유가 입을 열었다.
“음식에 문제가 없었다면 범위를 더 넓히는 게 어떻습니까? 국화 꽃밭에 가셨을 땐 별다른 문제가 없으셨습니까?”
그의 말에 다들 꿈에서 깨기라도 한 듯 눈을 번뜩였다. 의원들이 앞다투어 소견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국화는 초본 식물이라 간을 맑게 하고 눈을 밝히는 효능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적절히 사용했을 때의 얘기였다. 자칫 잘못하면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는 약재였다!
묵용감은 국화 꽃밭에 있는 내내 백천범과 함께했으니 누구보다도 그때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특별한 점은 없었다. 그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데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왕야.”
제갈겸유가 넌지시 말했다.
“자세히 떠올려 보시지요. 왕비께서 어떤 꽃을 보셨습니까? 색이 화려하고 희귀한 품종일수록 더 의심을 해 봐야 합니다.”
묵용감은 기억력이 좋았다. 꽃밭에서의 일을 자세히 곱씹던 그는 백천범이 본 꽃의 이름을 모두 생각해냈다. 그의 입에서 ‘봉미접鳳尾蝶’이라는 이름이 나온 순간, 위중청이 무릎을 내리쳤다.
“바로 그겁니다.”
제갈겸유가 수염을 훑으며 말했다.
“노부의 생각도 같습니다. 이 국화는 유난히 화려하고 아름다운 데다, 봉황의 꼬리를 닮았다 하여 봉미접이라 부르지요. 그 자체로는 문제가 없지만 계화 꽃가루와 섞이면 혈액의 순환을 촉진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어혈이 풀려 임부에게는 좋지 않습니다.”
“선생의 말씀이 맞습니다.”
위중청이 그의 말을 거들었다.
“왕비 마마께서 꽃을 구경하실 때, 가까이에서 향을 맡진 않으셨는지요? 꽃가루를 들이켜신 상태에서 계화즙을 드셨다면 두 성분이 뒤섞여 증세를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묵용감이 어느새 초조해진 안색으로 물었다.
“해결할 방도는 있는가?”
“만약 원인이 두 꽃이라면 그리 위험한 상태는 아닙니다. 소관이 맥을 짚었을 때 아기씨의 맥이 끊기다 이어지길 반복했을 뿐, 완전히 멈추지는 않았습니다. 왕비 마마의 혈흔도 옅은 붉은색이었고 그 양도 적었으니 소관, 반드시 왕비 마마와 아기씨를 지켜 드리겠습니다.”
그의 말에 묵용감은 겨우 한시름 덜 수 있었다.
“위 의원, 어서 처방전을 써 주게. 약재를 구할 사람을 바로 보내겠네.”
위중청은 확실히 실력이 대단한 의원이었다. 진즉 셈을 마친 그가 붓을 들고 빠르게 글씨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의 겉모습을 보고 실력을 의심했던 의원들도 하나둘 생각을 고쳐먹었다.
곰곰이 따져 보면 어렵지 않게 생각해 낼 수 있는 약재들이기는 했으나, 위 의원처럼 빠른 반응을 보이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조금의 오차도 없는 정확한 양과 배합을 적어 낸 처방전에 다들 감탄을 내뱉었다.
몇몇 의원들은 개인 약방을 두고 진료를 보기도 하는 터라, 한 의원이 입을 열었다.
“밤이 늦어 약방이 문을 닫았을 것입니다. 소인의 약방은 아직 열어 두었으니 소인의 약방으로 사람을 보내시지요.”
한 사람이 입을 열자 다른 의원들도 앞다투어 충심을 내비쳤다. 초왕이 손을 내저었다.
“시간이 없으니 한 집에서 가져와야 하오. 이 약재들을 모두 갖춘 약방을 확인하고 그곳에서 약재를 가져올 것이오.”
결국 동이 틀 무렵이 되어서야 약재를 가지러 갈 사람을 보냈고, 다른 의원들도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묵용감이 자리에서 일어나 제갈겸유에게 허리를 숙였다.
“역시 뛰어나십니다. 선생의 조언이 아니었다면 아직도 방법을 찾지 못했을 것입니다.”
제갈겸유가 웃으며 맞절을 올렸다.
“왕야, 이리 예를 갖추시다니요. 지극히 사소한 도움이었을 뿐입니다. 더욱이 세자 아기씨를 위한 일에 노부가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묵용감은 태자에게도 고마움을 전했다. 태자가 웃으며 답했다.
“한식구끼리 마땅한 일이 아니더냐? 네 자식이지만 내 조카이기도 하거늘. 어쨌든 해결될 실마리가 보이니 안심했다. 그보다 한숨도 자지 못했더니 피곤하구나. 먼저 들어가 쉬어야겠다.”
그는 제갈겸유와 함께 방으로 돌아갔다.
묵용감은 위중청에게도 휴식을 권했지만, 위중청은 약재를 직접 확인해 봐야 마음이 놓일 거라며 극구 사양했다. 그로서는 제대로 충심을 보일 기회가 코앞에 다가왔으니 절대 놓칠 수 없었다.
관청에 들어 온 지 얼마 되진 않았지만, 그는 초왕의 마음을 꿰뚫고 있었다. 초왕비와 관련된 일에 전심전력으로 나서면 초왕에게 상을 받을 수 있었다.
역시나, 초왕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위 의원이 이 일에 공이 크니 본왕이 상을 내리겠네. 말해 보게, 원하는 게 무엇인가?”
“왕야의 근심을 더는 일이 소관의 본분입니다. 소관은 그저 왕비 마마께서 난관을 잘 이겨내시길 바랄 뿐입니다. 그러니 상은 바라지 않습니다.”
“그래, 알겠네.”
묵용감은 그의 어깨를 몇 차례 토닥인 후 바로 방을 나섰다. 이미 그의 머릿속은 백천범을 보러 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
‘그저 예의 상 한 말이라는 것도 모른단 말인가…….’
묵용감은 서둘러 이 기쁜 소식을 백천범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한달음에 방까지 걸어가는데 문 앞에서 백천범의 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흠칫 놀란 그가 걸음을 멈추고 방 안의 소리를 엿들었다.
“큰 재난에서 목숨을 구하면 큰 복이 온다던데, 우리 아기는 비범한 사람이 되려나 봐요.”
곧 웃음기 어린 녹하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그럼요. 마마 같은 어머니가 계시는데 평범하시겠습니까?”
기홍 역시 나긋한 음성으로 말했다.
“큰일을 하시는 분들은 대개 어릴 때 한 번씩 고난을 겪으시지 않습니까. 약재가 오면 소인이 곧바로 약을 달여 올리겠습니다. 드시고 나면 아무 문제 없을 것입니다.”
어쩐지 웃음소리가 나더라니, 이미 전해 들은 모양이다. 직접 기쁜 소식을 전하지 못해 아쉽긴 했지만, 그녀가 일찌감치 시름을 덜었으니 그에게도 기쁜 일이었다.
그가 방 안으로 들어서자 눈치 빠른 월규가 그를 발견하고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왕야.”
묵용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들 밤새 왕비 곁을 지켰으니 그만 돌아가 쉬거라.”
그들이 쉬면 약은 누가 달인단 말인가? 그래도 두 사람 사이를 방해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시녀들은 얼른 대답을 올린 뒤 방을 빠져나갔다.
묵용감은 침대 옆에 앉았다. 그와 그녀 모두 혼이 나간 듯한 모습이었다. 마치 재난을 함께 이겨낸 듯 감격스러운 감정이 밀려왔다. 어제 오후부터 지금까지 채 하루도 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두 사람은 전쟁을 치른 듯이 심신이 고달팠다.
“이제 괜찮소.”
그가 그녀의 얼굴을 가볍게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다 괜찮아질 것이오.”
침대에 누운 그녀가 그와 손바닥을 맞대고 깍지를 꼈다. 그녀가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왕야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반드시 하시는 분이잖아요. 아이를 지켜 주실 거라더니, 정말 그렇게 하셨네요.”
“내가 언제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 봤소?”
그가 허리를 숙이고 그녀를 안으려 했다.
백천범이 서둘러 그를 밀어냈다.
“왕야, 위 의원이 꼿꼿한 자세로 누워 있으라고 했어요. 움직이면 안 돼요.”
“알겠소.”
왠지 헛헛한 마음에 그는 아예 침대 옆에 엎드렸다. 그가 그녀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맞대었다.
“천범, 많이 놀랐소?”
“네.”
그녀가 그의 목덜미를 팔로 감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정말 무서웠어요. 어렵사리 온 아이인데 어떻게 잃을 수 있겠어요. 그건 저더러 죽으라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허튼소리, 그대의 목숨은 내 것이니 아무도 가져갈 수 없소.”
그가 불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어렵사리 찾아왔다고 할 순 없구려. 정식으로 합방을 하고 곧장 찾아오지 않았소?”
백천범이 그의 목덜미를 가볍게 꼬집으며 웃었다.
“맞아요. 초왕야께서는 정말 대단하시다니까요. 예전에 왕야와 씨름을 하면 제가 이길 거라고 장담했는데, 결국엔 제가 매번 지고 말았네요.”
“아니, 진 건 나요.”
묵용감이 그녀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진지한 표정을 보였다.
“그대를 너무나도 은애해서 이 마음을 억누를 수 없소. 천범, 내 언젠가 그대의 손에 죽는 날이 올 것이오.”
“허튼소리.”
그녀가 그의 말을 따라 했다.
“왕야의 목숨은 제 거예요. 아무도 가져갈 수 없는걸요.”
“알겠소. 약속한 것이오.”
그가 그녀의 손을 다정하게 움켜쥐며 말했다.
“우리 목숨은 서로의 것이오. 아무도 가져갈 수 없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