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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396)화 (395/1,192)

제396화

의원들은 서로 겁에 질려 눈빛만 교환했다. 이들이 대체 누구이기에 관청의 허락도 없이 사람을 마구 잡아들인단 말인가?

황보주아는 잠시 고민하다 운을 떼었다.

“셋째 오라버니, 일을 크게 만들면 좋지 않습니다. 품위가…….”

묵용감이 서늘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내 아이를 잃게 생겼는데 품위는 무슨 품위!”

차디찬 목소리에 황보주아는 흠칫 놀랐다. 이렇게 아이를 중시할 줄이야. 한편으로는 잘된 일이었다. 그토록 중시하는 아이를 잃을지도 모르니, 백천범에게도 실망이 크지 않겠는가?

묵용감이 백천범을 눕히며 나직하게 말했다.

“고민하지 말고 푹 쉬시오. 아이를 꼭 지키겠다고 내가 약속하오.”

백천범은 이미 넋이 나간 듯했다. 쉬라는 말에 그녀가 천천히 눈꺼풀을 내리자 맺힌 눈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창백한 얼굴에 길게 난 눈물길만이 그녀의 감정을 말해 주는 듯했다.

초기 증세가 나은 뒤로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묵용감은 가슴이 미어지다 못해 모든 감정이 뒤섞여 알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그저 자신이 의술을 모른다는 사실이 한탄스러웠다. 이런 일을 마주하고도 속수무책이지 않은가. 그가 그녀의 눈물길을 조심스레 쓸어내렸다.

그때, 한 의원이 용기를 내어 고했다.

“대인, 부인께서 이미 피를 흘리셨으니 태아를 지키긴 어려우리라 봅니다. 사망한 태아를 배출하지 않으면 부인마저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묵용감의 손끝이 흠칫 떨렸다. 그가 미처 입을 떼기도 전에 백천범이 황급히 눈을 떴다.

“안 돼요. 죽지 않았어요. 제 배 속에 잘 있다고요.”

아이를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니, 이 무슨 청천벽력이란 말인가? 그녀는 깊게 고민할 겨를도 없이 묵용감에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왕야, 우리 아이를 가져가지 못하게 해 주세요. 제발요!”

그 호칭을 듣는 순간 의원들의 안색이 급변했다. 남쪽에 초왕 말고 또 다른 왕이 누가 있을까! 어쩐지… 더는 의심할 것도 없이 의원들이 우르르 무릎을 꿇었다.

“초왕야를 뵈옵니다.”

저분이 초왕이라면 둘째 형님이라 불린 이분은 태자가 분명했다. 의원들은 태자 쪽으로도 몸을 돌려 다시 절을 올렸다.

“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일어들 나게. 그리 예를 차릴 것 없네.”

태자가 손을 휘휘 내젓고 말을 이었다.

“어찌해야 세자를 살릴 수 있는지 상의 좀 해 보게나.”

세자 아기씨라는데 누가 감히 다시 배출하라는 말을 할까. 최후의 순간이 오기 전까지 누구도 포기할 수 없었다.

묵용감은 직접 옥당춘의 인부들을 심문하려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녀 곁을 떠날 수는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백천범을 끌어안고 조용히 타일렀다.

“그럴 일 없소. 아무도 아이를 가져가지 않을 것이오. 우리 아이에겐 아무 일도 없으니, 겁내지 마시오. 나도 아이도 그대 곁을 지킬 것이오. 울면 그대의 몸에도, 아이의 몸에도 좋지 않소.

그대는 어머니가 아니오? 더 용기를 가지시오. 아이에게 좋은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하지 않겠소?”

그의 조용한 위로에 백천범의 희미한 흐느낌마저 잦아들었다. 그의 말대로였다. 그녀가 용기와 희망을 가져야만 아이도 힘을 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녀가 옷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제 울지 않고 위 의원을 기다릴게요. 분명 위 의원은 아이를 지켜줄 거예요.”

고작 한나절 만에 그녀의 얼굴은 안쓰러울 정도로 수척해져 있었다. 국화 꽃밭을 누비며 천진하게 웃던 모습을 떠올릴 수조차 없었다. 묵용감이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이마를 살며시 맞댔다.

그의 찢긴 마음과 그녀의 무너지는 세상이 닿는 것만으로도, 두 사람은 조금 더 버틸 수 있었다. 오직 두 사람만이 서로에게 엄청난 힘이 되어 주었다.

아가야, 겁내지 말거라. 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널 살릴 방법을 반드시 찾을 테니!

서로를 온전히 의지하는 모습 앞에서, 황보주아의 마음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녀로서는 차마 눈 뜨고 보기가 힘들었다. 그녀는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분명 묵용감은 백천범을 내버려 두고 자리를 떠나려 했다. 하지만 울음을 터트린 것만으로 그리 쉽게 무너진단 말인가? 호되게 혼을 내도 모자랄 판에……. 게 한 번 먹겠다고 아이를 잃었으니, 엄청난 죄를 저지른 게 아닌가. 한데도 묵용감은 어찌 그리 그녀에게만 관대한 것일까.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내쉬었다. 백천범에게 무슨 마성이라도 있단 말인가? 한 사람을 이토록 뒤바꿀 힘이, 백천범에게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다시 눈을 뜬 그녀의 시선이 한 남자와 맞닿았다. 그의 미묘한 표정 앞에서, 황보주아는 가슴을 움켜쥐고 말았다. 어찌나 놀랐는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태자 오라버니, 어찌 기척도 없이 들어오십니까?”

그녀의 반응에 태자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더니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보아하니 뒤가 켕기는 것 같구나.”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주아야. 이 세상에서 널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나다.”

태자가 뒷짐을 진 채 방 안을 잠시 서성였다. 어느새 그의 얼굴은 조각상처럼 굳어 있었다.

“말하지 않았더냐, 경거망동해선 안 된다고. 그 아이는 반드시 태어나야 한다. 어째서 말을 듣지 않는 것이냐?”

황보주아는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부인했다.

“태자 오라버니. 설마 절 의심하십니까? 하늘을 걸고 맹세하건대, 저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태자가 나직하게 웃어 보였다.

“네가 그렇다고 하면, 초왕더러 직접 물어보라고 해야겠구나.”

어느새 다가온 태자가 그녀의 두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초왕은 한번 의심을 품으면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네 입을 열려고 할 터. 군신이라는 말만 들어도 다들 벌벌 떠는 이유를 모르겠느냐?”

황보주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태자 오라버니…….”

“겁내지 말거라.”

태자가 나긋한 목소리로 달랬다.

“주아야, 너와 난 끝까지 한 편이다. 하지만 이 아이는 아무 탈 없이 태어나야 한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황보주아의 얼굴에 조금씩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전부 말씀드리면, 셋째 오라버니가 절 의심하지 않게 해 주시겠습니까?”

“물론이지.”

태자가 그녀를 자리에 앉히며 다독였다.

“낱낱이 말해 보거라. 내가 처리하마.”

* * *

위중청은 귀신도 영구를 보면 기겁해서 도망치리라 생각했다.

초왕비가 피를 흘렸다는 소식을 듣고, 위중청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의 상태는 뒤로하고, 서둘러 떠날 채비를 했다. 다만 그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길을 나서게 되었다.

그는 마차를 타고 갈 줄 알았다. 설령 빠르게 달리는 마차 안에서 오장육부가 뒤틀린다 해도 충분히 견딜 자신이 있었다. 무엇보다 초왕비의 상태를 확인하는 게 급했기에, 단 일각도 지체할 수 없었으므로.

역시나 그의 예상처럼 온몸이 뒤틀리다시피 흔들리긴 했다. 다만… 어찌 이토록 기괴한 방식으로 그를 데려간단 말인가? 영구는 마치 여인을 품에 끌어안듯 그를 안장 앞쪽에 앉혔다. 체격이 비슷한 위중청이 시야를 가리자 영구는 강제로 그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었다.

위중청은 이 이상야릇한 모양새에…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러나 모양새는 둘째 치고, 이번엔 배가 난리였다. 몸이 요동치니 구토를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지만, 배탈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결국 그는 잠시 내려 볼일을 보겠다고 청했고, 영구는 묵묵히 고삐를 틀어쥐었다. 말은 갑작스럽게 머리가 당겨지자 앞발을 높게 들어 올리며 멈춰 섰다.

어느새 사방에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위중청은 눈을 가늘게 뜨고 길을 찾아 헤맸다. 은밀한 장소를 찾기 위해 절룩거리며 나아가는데, 별안간 누군가 그의 허리춤을 잡아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이내 쉭쉭거리는 바람 소리만 귓가를 스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수풀 한가운데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어찌나 놀랐는지, 그는 다리에 힘이 풀려 고꾸라질 뻔했다. 그때, 차가운 영구의 목소리가 그의 정신을 일깨웠다.

“눈에 띄지 않는 곳이니 서두르십시오. 왕비 마마께서 위 의원을 기다리십니다.”

말을 마친 그는 빠르게 시야에서 사라졌다. 밤에 보니 그의 뒷모습은 날개를 펼친 커다란 새처럼 보이기도 했다.

위중청은 또 한 번 눈물이 앞을 가렸다. 나오려던 것도 다시 쏙 들어간 기분이었다. 하지만 더는 지체할 수 없었기에 서둘러 대답하고는 바지춤을 풀고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이렇게 길을 재촉한 끝에, 자시가 되기 전에 금릉에 다다를 수 있었다. 다만 객잔에 들어선 위중청은 이미 방향을 분간할 수 없는 상태였고, 영구가 그를 들다시피 해 위층으로 올렸다. 초왕비의 침대 앞까지 위중청을 부축한 영구는 그가 주저앉으려 하자 서둘러 의자를 끌어와 엉덩이 밑에 대 주었다.

위중청은 드디어 두 발로 땅을 디뎠다는 생각에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묵용감의 어두운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울렸다.

“오느라 고생했네, 위 의원. 어서 왕비의 맥을 좀 봐 주게.”

서둘러 백천범의 손목에 손가락을 댄 그가 숨을 죽이고 맥을 짚었다.

벽 쪽에는 의원들이 일렬로 앉아 있었다. 어진 마음씨를 가진 태자가 의원들을 배려해 의자를 준비해 주었다. 그간 초왕과 초왕비의 입에서 위 의원이라는 이름이 끊임없이 오르내린 덕분에, 다른 의원들도 은근한 기대를 품고 있었다. 초왕과 초왕비의 마음에 든 걸 보면 명의가 틀림없을 테니, 직접 만나보고 싶었던 터였다.

정작 급히 달려온 위 의원이라는 자는 스물 언저리쯤 되어 보이는 어린 청년이었다. 준수하고 고상한 외모를 지니긴 했지만, 워낙 기진맥진해서 들어온 탓에 그리 특출난 이로 보이지 않았다.

한참 후, 위중청이 손을 거두고 묵용감에게 물었다.

“혹시 마마께서 게를 드셨습니까?”

묵용감이 잠시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

“게살을 담았던 숟가락을 한번 핥았네. 그것도 먹었다고 볼 수 있는가?”

“…….”

그럼 그렇지. 왕비의 성격을 떠올리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그 정도라면 상관없습니다. 게를 먹어 유산이 되는 경우는 한 접시 가득 담긴 양을 먹어야 일어나는 일입니다.”

한 접시에 게살을 가득 채우려면 적어도 커다란 게가 세 마리는 들어간다. 위중청의 말에 묵용감은 확신을 가졌다. 백천범은 결코 게를 먹지 않았다. 그가 그녀의 얼굴에 어지러이 붙은 잔머리를 떼어주며 나직하게 말했다.

“왕비는 위 의원의 말을 들어야 한다며 게에는 절대 손을 대지 않았네.”

위중청은 잠시 혈흔을 보겠다고 청했다. 감히 백천범을 건드릴 수 없었기에 그녀는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고, 자연히 혈흔도 속바지에 고스란히 남은 터였다.

다만 지금은 격식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묵용감이 직접 장막을 걷고 위중청에게 혈흔을 보여 주었다.

그 기척에 잠에서 깬 백천범이 위중청을 알아보았다. 그녀가 그의 손을 덥석 잡으며 안쓰러운 외침을 내뱉었다.

“위 의원님, 오셨군요. 제발 우리 아기 좀 살려 주세요!”

위중청은 다급히 손을 빼내려 했다.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라도 난처해지는 일은 사양하고 싶었다. 심지어 옆에서 초왕이 빤히 바라보고 있는데!

그러나 백천범이 얼마나 힘을 주는지, 손을 빼낼 수가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묵용감이 그를 구했다.

“그럴 것이오. 위 의원이 아이를 지켜 줄 테니, 그만 마음 놓으시오.”

위중청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라고 해도 자신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해도 분명…….

게를 먹지 않았는데도 유산 증상을 보였다면, 초왕비가 다른 음식을 먹었다는 걸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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