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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395)화 (394/1,192)

제395화

의원은 성난 눈빛으로 묵용감을 노려보고는 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를 막는 이는 아무도 없었고 흉포한 사내도 자신의 부인만 신경 쓰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다다르자 ‘쉭’하고 칼을 뽑는 소리가 들리더니 목에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하얗게 빛나는 검 두 자루가 의원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그제야 입구에 서 있던 두 사람이 다르게 보였다. 이들은 저 사내와 부인을 호위하는 무사가 분명했다. 평범한 푸른색 도포를 입고 있었지만 하나같이 예리한 눈매에 위엄 있는 기개가 느껴졌다. 전문 훈련을 받은 이들이리라.

간담이 서늘해진 의원이 발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아 세웠다. 아까는 환자만 살피느라 자세히 보지 못했는데 생각해 보니…….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의 수많은 경험으로 볼 때, 침대 옆에 앉아 있는 사내는 절대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느껴지는 기백에서 까마득히 높은 왕이 절로 떠올랐다.

주위 사람들 역시 심상치 않아 보였다. 창가 옆에 서 있는 사내는 고귀하고 기품이 넘쳐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화려한 차림새의 여인은 한눈에 봐도 높은 집안의 규수같이 단아했다. 조금 수수한 옷차림의 세 여인은 자신들을 ‘소인’이라고 칭하는 걸로 봐선 시녀가 틀림없었다.

그러나 빼어난 외모에 정갈한 옷매무새만 보면 셋 다 시녀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여기에 섬찟한 얼굴의 무사까지 있는 걸 보면…….

의원은 덜컥 겁이 났다. 대체 이들은 누구란 말인가?

의원이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데, 바깥에서 시끄러운 발소리가 다가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다들 아는 얼굴이었다. 성에서 이름난 의원들이 줄지어 들어오는데, 죄다 불편한 안색이었다. 그들의 뒤로 무사처럼 보이는 이들이 따라 들어왔다.

맨 앞에 서 있던 자는 얼굴이 동그란 청년이었는데 밝은 하늘색 도포를 걸치고 있었다. 그가 성큼성큼 다가와 우렁찬 목소리로 고했다.

“나리, 성에서 명망이 두터운 의원들을 전부 모셔 왔습니다.”

침대 옆에 앉아 있던 사내가 대꾸했다.

“그래, 한 명씩 들어와 맥을 짚으라고 하여라. 진료를 잘 보는 이에게는 상을, 그렇지 않은 이에게는… 하, 목이 베이지 않게 조심해야 할 것이다!”

그 말에 가동이 곧바로 의원들에게 호통쳤다.

“뭘 꾸물거립니까, 어서 부인의 맥을 짚으십시오!”

사실 말만 모셔온 것이지 무력을 써서 억지로 데려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몇몇 의원들은 다른 환자의 진맥을 보던 와중에 끌려온 터라,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문 앞에 칼을 찬 무사들이 호랑이처럼 늘어서 있으니 문약한 의원들은 저항 한번 못 해 보고 따라나설 수밖에.

한편 백천범은 늘어선 의원들을 보자 작은 희망의 불씨를 가진 듯했다. 이들 중 누군가는 아이를 지킬 방법을 생각해 내지 않겠는가.

백천범은 서둘러 의원들에게 예를 갖춰 사정했다.

“의원님, 힘드시겠지만 부디 제 아이 좀 지켜 주세요.”

어린 부인만큼은 깍듯이 예를 갖추자 먼저 나선 의원이 진지하게 맥을 짚으며 그녀를 진찰했다. 그러나 그의 결론도 처음 진료를 본 의원과 똑같았다. 게를 먹은 뒤에 흔히 나타나는 유산 증세라고 하지 않는가. 지금은 소량의 피만 비쳤지만, 조금씩 많은 양을 흘리다 아이를 잃게 되리라고 확언했다.

의원의 말이 끝나자 묵용감은 곧바로 다음 의원을 불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의원들은 다들 똑같은 결론을 내렸다. 백천범의 희망은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마지막 의원마저 같은 말을 내놓은 순간, 그녀의 눈동자는 완전히 빛을 잃고 말았다.

묵용감의 마음도 무너져 내렸다. 정말 아무런 희망도 없단 말인가? 어렵사리 찾아온 아이를 이대로 잃어야만 하는가? 아이가 찾아왔을 때, 그는 너무 이르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백천범이 초기 증세로 고통스러워할 때는 아이를 원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가 떠날지도 모르는 지금, 그의 슬픔은 백천범보다 옅지 않았다. 아이는 그의 혈육이자 그의 첫째 아이였다. 백천범의 배가 불러오며 그의 시선이 가장 먼저 닿는 곳은 그녀의 배가 아니었던가. 그런 아이가 이대로 그들의 품을 떠난다면, 그는…….

누군가가 가슴을 강하게 틀어쥔 듯했다. 목은 바짝 마르고 입 안 가득 쓴맛만 퍼져 갔다. 그러나 그의 슬픔이 얼마나 크든, 슬퍼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를 잠식하는 비통함을 억누르고 백천범을 위로해야 한다. 그녀가 짓눌리지 않도록, 무너져 내리는 그녀의 하늘을 떠받쳐야만 했다.

“천범, 제발 이러지 마시오.”

그가 그녀의 차디찬 손가락에 입을 맞췄다.

“아이를 위해서라도 포기해선 안 되오. 아직은 희망이 있소.”

백천범이 한껏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희망이 어디에 있는데요?”

그때, 그의 머릿속에 누군가 스쳤다.

“위 의원, 내가 위 의원을 데려오라고 분부하겠소. 그대의 몸은 위 의원이 돌봐왔으니 그가 무슨 수를 생각해 낼 것이오.”

그 말에 영구가 다가오더니 조용히 고했다.

“소인이 위 의원을 데려오겠습니다. 자시 전엔 반드시 데려오겠습니다.”

묵용감이 고개를 끄덕였다.

“늦어지면 안 된다. 어서 가거라.”

영구는 맞잡은 손을 들어 올리고 재빨리 자리를 떴다.

기홍이 그를 배웅하러 문밖으로 나갔다. 그녀 역시 굳은 얼굴로 신신당부했다.

“빨리 돌아오셔야 해요. 한시도 지체되어선 안 됩니다.”

“그리하겠습니다.”

영구가 갑작스레 손을 뻗어 그녀를 품에 안았다.

“이곳에서 기다리고 계십시오.”

기홍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그는 이미 계단 입구로 사라져 버렸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백천범의 중얼거림만 울려 퍼졌다.

“게를 안 먹었는데 어째서 이런 일이 생긴 거예요. 정말 안 먹었어요. 위 의원이 먹지 말라고 신신당부해서 전 안 먹었어요…….”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있던 황보주아가 동정 어린 눈길을 보냈다.

“아무도 마마를 탓하지 않습니다. 회임을 하였으니 입맛이 좋은 건 당연한 일이지요. 음식을 밝히는 것도 정상적인 일입니다. 다만 지금은 그런 것보다 아이를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고민해야 합니다. 만약 게 때문에 아이를 잃게 된다면 참으로 큰 죄악이 아닙니까.”

묵용감이 차가운 눈빛으로 황보주아를 훑더니 낮게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하거라.”

“안 먹었어요.”

백천범이 서둘러 해명하며 고개를 저었다.

“전 정말 안 먹었어요…….”

황보주아가 말을 이었다.

“안 드신 건 저도 압니다. 그래도 월규는 먹지 않았습니까? 옆에서 시중을 들다 실수로 수저 같은 곳에 게의 비릿한 맛이 묻기라도 했다면…….”

그녀의 말에 백천범의 얼굴이 별안간 하얗게 질렸다. 그녀의 멍한 시선이 월규에게 향했다.

월규는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백천범의 눈빛을 마주했다.

“어찌 저를 보십니까……?”

백천범이 절망적인 한숨을 뱉어냈다. 방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월, 월규의 숟가락을 한번 핥았어요…….”

“…….”

묵용감과 월규의 눈이 커지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틈을 타 황보주아가 입을 열었다.

“그것 보십시오. 의원들의 말이 맞았군요. 게 때문에 이리되었네요.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먹어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어찌 그런 짓을 하셨습니까? 어머니가 될 사람이 늘 아이처럼 소란을 피우더니, 이 꼴을 보십시오. 아이까지 잃다니요.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마마는 젊으니 아이는 다시 가질 수 있습니다. 몸조리만 잘하면 여러 명 낳는 일도 문제없을 테지요.”

그녀의 말은 흠잡을 데가 없이 이치에 딱 들어맞았다. 원망 섞인 말을 하다가 위로를 하니 꼭 큰언니처럼 보였다. 미간을 찌푸리며 듣고 있던 녹하가 이유 모를 찜찜함을 느꼈다. 본래 선입견을 품고 있었다지만, 이번에는 그녀가 나쁜 마음을 먹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끈적하게 들러붙었다.

일렬로 서 있던 의원들은 그들의 대화를 듣고 의아한 표정을 보였다. 고작 숟가락을 핥아 맛을 본 것만으로 유산이 될 리가 없었다. 분명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게를 많이 먹은 게 분명했다. 그러나 위압적인 분위기에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황보주아만이 곁눈질로 묵용감의 안색을 살폈다. 그녀가 한 말에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백천범을 품에 안고 있었지만 그는 더 이상 그녀를 달래 주지 않았고, 그저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사장풍은 그냥 넘어갔지만, 아이는? 아이도 저대로 넘어갈 수 있을까. 어쨌든 자신의 핏줄이니 마음이 동요될 터였다.

이번 건으로 분명해질 것이었다. 이토록 무책임한 여인이 어찌 왕비 자리를 지킬 수 있겠는가. 음식을 밝히다 멀쩡한 아이를 잃게 되었으니 마땅히 혼쭐을 내고 내쫓아야 했다.

설령 그렇게까진 못하더라도 분명 그의 가슴에 응어리가 맺히리라. 둘 사이에 한 번 틈이 생기면 예전처럼 견고한 관계로 지낼 수 없다. 이젠 아이까지 사라졌으니 그녀도 자신의 체면을 되찾을 기회가 오리라 믿었다.

무심코 고개를 돌려보니 태자가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모든 걸 꿰뚫어 보는 듯한 눈동자가 그녀의 얼굴을 훑었다. 이내 시선을 거둔 그의 얼굴이 깊은 생각으로 빠져드는 듯했다.

등줄기가 서늘해졌지만, 그녀는 애써 태연한 척 다시 고개를 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태자가 의원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다른 음식을 먹었는데도 게를 먹었을 때와 유사한 증상이 나타날 수 있소?”

황보주아는 소매에 가려진 손을 저도 모르게 꽉 움켜쥐었다. 덩달아 그녀의 얼굴도 약간이나마 창백한 빛을 띠었다. 대체… 왜…….

눈치만 보던 의원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조심스레 말했다.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만물은 필시 상극이 생기는 법이니까요. 다만 저희는 부인께서 무얼 드셨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니…….”

의원이 말끝을 흐린 순간, 태자가 목청을 높여 분부를 내렸다.

“옥당춘을 봉쇄하고 그곳의 모든 인부를 데려오너라. 심문을 시작하겠다. 객잔 주인장에게 위층을 전부 쓸 것이니 당장 정돈하라 이르거라. 이 일과 상관없는 자들은 절대 올려 보내지 말거라.”

태자가 재빨리 분부를 내리자 묵용감은 조금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태자를 바라보았다.

“감사합니다, 둘째 형님.”

만약 이 일이 누군가의 계략이라면, 묵용감은 누가 되었든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문밖에 있던 그의 부하가 우렁찬 목소리로 답했다.

“소인, 명 받잡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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