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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393)화 (392/1,192)

제393화

초왕의 모습에 괜스레 가동이 용기를 얻었다. 그는 슬며시 녹하에게 다가가 그녀를 툭 건드렸다. 기홍과 팔짱을 낀 채 걷고 있던 녹하는 뒤늦게 가동을 알아차리고 그의 손을 찰싹 소리가 나도록 때려 주었다.

그녀의 매운 손맛에 가동은 입만 삐죽거렸다. 속이 상해도 어쩌랴.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것을.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영구는 웃음을 삼키며 기홍에게 시선을 옮겼다. 시선을 알아차린 기홍의 얼굴이 불그스름하게 물들었다. 그녀가 발걸음을 살짝 늦추었지만, 야속하게도 녹하의 재촉만이 돌아왔다.

“어서 가자. 왕비 마마와 왕야는 벌써 저 앞까지 가셨잖아.”

기홍이 미적거리다 겨우 입을 열었다.

“월규랑 먼저 가. 신발에 모래가 들어간 것 같아.”

녹하가 아무렇지 않게 길가를 가리켰다.

“그럼 저기 앉아서 신발 좀 털고 가면 되지.”

“아냐, 됐어.”

기홍이 주저하며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다른 사람들 앞에서 신발을 벗어.”

“왜, 양말도 신었잖아?”

결국 영구가 헛기침을 한 번 했다. 그제야 기홍의 의도를 알아차린 녹하는 웃음을 참으며 먼저 앞으로 향했다.

이렇게 여행을 오는 일은 매우 드물었기에, 초왕은 은혜를 베풀어 가동과 영구에게 휴가를 주었다. 당직을 설 필요도 없었고, 사랑하는 여인이 곁에 있으니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영구마저도 마음이 조금씩 술렁이기 시작했다.

녹하가 앞서 가자 그는 기홍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가 긴 소맷자락을 가림막으로 삼아 기홍의 손을 잡았다.

기홍은 얼굴만 붉힐 뿐, 그를 바라보지 못했다.

영구는 기홍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발걸음을 늦췄다. 동월국은 개방적인 풍습을 가진 국가인 만큼 소맷단 밑에서 몰래 손을 잡는 이들 정도는 많은 편이었다. 초왕처럼 대담한 사람은 극히 드물긴 했지만.

예쁜 꽃송이가 나부끼는 거리를 젊은 남녀가 함께 거닐고, 그들의 모습을 밝은 달이 환하게 비추었다. ‘예쁜 꽃과 둥근 달’이라는 표현에 꼭 들어맞는 모습이었다.

주변을 살핀 가동은 사탕을 달라고 떼쓰는 아이처럼 녹하를 졸랐다.

“봐봐, 영구마저도 기홍이랑 손을 잡고 가는데 우리는…….”

녹하가 눈을 부릅떴다. 이런 얼간이 같으니,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저딴 말을 할 수 있을까!

월규가 입을 가리고 웃으며 자리를 비켜 주었다. 가동이 그런 그녀를 보며 헤벌쭉 웃었다.

“역시, 눈치가 있다니까.”

녹하는 한사코 가동의 소매를 잡으려 하지 않았다. 위아래, 왼쪽, 오른쪽 요리조리 피했지만 가동은 끈질기게 맞섰고, 마침내 녹하의 손을 붙잡을 수 있었다. 신이 난 그가 녹하의 손등에 힘껏 입을 맞췄다.

“착하지, 도망갈 생각 하지 마.”

누군가 두 사람을 보고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녹하는 부끄러움을 못 이겨 손을 뿌리치고 싶었지만, 가동이 더욱더 힘주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두 사람은 결국 손을 왔다 갔다 움직이며 함께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 모든 광경이, 황보주아에게 씁쓸함을 안겨다주었다. 백천범이야 그렇다 쳐도, 어찌 그녀의 시중을 드는 이들마저 저리… 질투 나게 한단 말인가…….

그녀는 묵용감과 태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녀는 두 사람에게 마음을 주었지만, 한 사내는 이제 아리따운 아내를 끌어안고 있었다. 또 다른 사내는 무엇보다 권력을 원했다. 그는 자신의 모사인 제갈 선생과 함께 걸으며 조용히 담소만 나누었다.

황보주아는 그저 암담할 따름이었다. 예쁜 꽃과 둥근 달이 다 무엇이란 말인가. 그녀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을. 아름다운 색채로 물든 거리에서 그녀의 눈은 잿빛 세상만을 비추었다. 태자의 약속은 요원하기만 했고, 그녀를 향한 묵용감의 정은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그녀는 이제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 * *

징양호에서 게를 잡는 광경을 지켜보던 백천범은 잠시 회상에 잠겼다. 오수진에서 미꾸라지를 잡던 것처럼, 게를 직접 잡아보고 싶었다. 그러자 묵용감이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어찌나 품 안에서 움직이는지, 그가 끌어안지 않았다면 그녀는 미꾸라지처럼 쏙 빠져나가 강으로 뛰어들었을지도 몰랐다.

그가 짐짓 엄한 목소리를 내었다.

“얌전히 있으시오. 이러다 물에 빠지겠소.”

백천범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빠져도 괜찮아요. 왕야께서 수영을 할 줄 아시니까요.”

정말 능글맞은 여인이 아닌가. 그의 총애를 등에 업은 그녀는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늘 곁에 초왕이 있는데, 무엇이 걱정일까! 그 또한 그녀가 자신을 의지하는 게 좋았다. 그녀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 해 주고 싶으니, 그녀가 필요로 하는 건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입추가 되었으니 물이 차가울 것이오. 물에 빠지면 병이 날 수도 있을뿐더러, 그댄 아이를 가진 몸이잖소. 내가 늘 그대를 보고 있다고 해도 미처 눈에 닿지 않는 순간이 있기 마련이오. 그러니 그대도 언제나 조심해야 하오.”

노파처럼 잔소리를 늘어놓긴 했지만, 그녀는 얌전히 그의 품에 안겼다. 이렇게 그가 보듬어 줄 때면 태양에 안긴 듯 따뜻한 기분이었다.

베에 듬성듬성 매달린 등불이 배의 움직임을 따라 호수를 부유했다. 꼭 호수에 별을 뿌려놓은 것 같았다. 이따금 어부들의 환호성이 울려 퍼지며, 호숫가에 있는 이들에게도 수확의 기쁨을 전했다.

이튿날은 금릉에서 가장 큰 국화밭에 갈 예정이었다. 묵용감은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가지 않겠다고 했다. 백천범이 과연 그의 깊은 뜻을 모를까. 그녀가 태연하게 말했다.

“안 가긴 왜 안 가세요. 꽃밭에 설마 녹색 국화만 있겠어요? 지금껏 꽃구경이라고는 지난번에 한 매화 구경이 전부예요. 게다가 왕야께서 도중에 절 내팽개치셨잖아요. 저도 꽃을 엄청나게 좋아한다고요.”

그녀의 말에 묵용감은 옅은 멋쩍음을 느꼈다. 그간 벼르고 있다가 제대로 따져 묻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는 차마 더 버틸 수 없었다.

“알겠소. 그대가 가고 싶다면 데려가겠소. 도중에 그대를 내팽개칠 일도 절대 없을 것이오.”

백천범이 배를 쓰다듬으며 당당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왕야의 아이가 제 배 속에 있는데, 어찌 절 내팽개칠 수 있으시겠어요.”

묵용감은 그녀를 자신의 다리 위에 앉히고 가볍게 몸을 흔들었다.

“그대가 아이보다 중요하오. 그대를 잃는 일은 내 목숨을 잃는 일과 같소.”

백천범이 수줍게 웃으며 그의 턱에 얼굴을 비볐다.

“왕야, 입에 꿀이라도 바르신 거예요? 너무 듣기 좋은 말이네요.”

어쩐지 믿지 않는 듯한 말투에, 그가 서둘러 맹세했다.

“전부 가슴에서 우러나서 한 말이오. 진심이오. 천범, 내 마음을 꺼내 보여 줘야만 믿을 것이오?”

“믿어요.”

그녀가 입술을 오므리더니 그에게 입을 맞췄다.

“왕야가 하시는 말은 전부 다 믿어요.”

그녀가 먼저 입을 맞춰오니, 그는 또다시 가슴이 설렜다. 그가 몇 배는 더 큰 열정으로 응하며 그녀를 꼭 안았다. 어느 틈에 그녀의 옷 사이로 커다란 손이 스쳤다.

백천범이 서둘러 그와 거리를 두더니 눈을 치켜떴다.

“하지 마세요. 힘들어요.”

묵용감이 괜스레 헛기침을 했다.

“그럼 침대에 가서 조용히 서책을 보는 건 어떻소?”

“좋아요. 화본話本이요?”

“그렇소. 화본畵本.

예전에 묵용감은 하인을 시켜 백천범이 좋아하는 화본을 잔뜩 사 왔다. 그녀가 편안히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 읽기 위해서였다. 화본은 전부 그의 서재에 꽂아 두었는데, 그가 밤에 업무를 보는 동안 그녀는 푹신한 평상에 기대 조용히 화본을 읽곤 했다.

백천범에게도 평화로운 시간이었지만, 그에게도 충만한 시간이었다. 곁에 그녀가 있으니 아무리 단조로운 일을 해도 질리지 않았다.

업무를 보다 피곤해지면 그도 백천범의 옆에 앉아 함께 책을 읽었다. 그러다 재미있는 부분이 나오면 두 사람은 토론을 벌이며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곤 했다.

백천범은 묵용감의 도움을 받아 목욕을 마친 후, 화본을 읽기 위해 침대에서 얌전히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묵용감이 그녀 옆에서 화본을 펼쳤다. 그 순간, 그녀는 제 눈을 의심하며 소리쳤다.

“왕야, 화본이 이걸 말씀하신 거였어요?”

“그렇소.”

묵용감이 어딘가 부끄러워하는 듯이 웃었다.

“위 의원이 준 이 그림 서책이 매우 좋더군. 새로 알게 된 내용이 많았소. 해서 부인과 한번 탐구를 해 보고 싶소만…….”

백천범이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왕야, 어찌 점점 더 뻔뻔해지시는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오.”

묵용감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단호히 말했다.

“날마다 참고 견디는 게 쉬운 줄 아시오? 어렵사리 밖에 나왔으니 흥을 깨지 말아 주시오. 장소가 바뀌었으니 느낌이 다를 수도 있는데, 그대는 궁금하지 않소?”

백천범의 얼굴이 불붙은 장작처럼 발갛게 달아올랐다.

“…아이가 보고 있잖아요. 전 정말 부끄럽다고요.”

그러나 묵용감에겐 통하지 않는 말이었다. 그는 여전히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아이는 아직 손가락 굵기만큼도 자라지 않았을 텐데, 알긴 뭘 알겠소? 어서 이리 오시오. 지난번에 어디까지 봤었더라…….”

백천범이 어깨를 움츠리며 그를 흘겨보았다.

“그럼 보기만 하세요. 절 조몰락거리거나 치댈 생각은 하지 마시고요.”

묵용감이 넉살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반죽을 잘해야 좀 더 편치 않겠소.”

* * *

금릉의 성문은 높이 솟았고, 즐비하게 늘어선 가게는 많은 사람으로 북적였다. 고도였던 만큼 번화한 거리의 풍경은 임안성과 견주어도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였다.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던 묵용감과 백천범은 일반 백성처럼 꾸미고 가자고 제안했다. 최근 백성들과 거리를 좁히던 태자도 동의했지만, 황보주아는 조금 언짢음을 느꼈다.

그녀의 눈에 일반 백성들은 지저분한 촌뜨기에 불과했다. 더럽고 예의도 없는 그들과 함께 꽃 구경을 하다니, 이리도 품위가 떨어지는 일이 어딨을까. 그러나 홀로 반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황보주아는 시무룩한 얼굴로 따라나섰다.

평범한 옷을 입고 인파에 섞인 호위병들이 남몰래 일행을 호위했다. 국화꽃이 만개한 만큼 날씨도 좋았다. 꽃밭에는 사람이 너무 많은 통에 몸을 틀어야 겨우 지나갈 수 있었다.

묵용감은 백천범을 품에 안고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꽃을 구경하느라 여기저기 내다보았지만, 그의 눈은 그녀만을 향했다. 어차피 그가 보기엔 어느 꽃도 자신의 부인만 못 했다.

한편 백천범은 그야말로 별천지에 떨어진 듯했다. 녹색 국화가 가장 예쁜 줄만 알았더니, 어두운 자줏빛 국화인 묵국墨菊부터 연지점설脂胭點雪, 요대옥봉瑤臺玉鳳, 향상추봉香山雛鳳, 녹수추파綠水秋波까지…….

이름만 들어도 예쁜 국화가 넘쳐났다. 예쁜 이름만큼이나 멋진 자태를 뽐내는 꽃들이 사방에 만개했다. 마치 국화의 바다를 여유롭게 헤치고 나아가는 기분이었다. 처음의 충격이 가시고 나자, 그녀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꽃 구경에 흠뻑 빠져들었다.

그녀는 꼭 봄나들이를 나온 어린아이 같았다. 이따금 그녀의 신이 난 목소리가 묵용감의 귓가를 간질였다.

“왕야, 저 꽃송이 좀 보세요. 새하얀 게 예전에 기르던 설구를 닮지 않았어요?”

“와, 저 꽃이 더 예뻐요. 꽃잎이 머리카락만큼 가늘어요. 밑으로 늘어뜨린 모습이 꼭 절세가인 같지 않아요?”

그녀는 커다란 꽃밭을 반이나 돌았는데도 힘든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얼마나 신이 난 걸까. 그러나 묵용감은 그녀가 더 무리할까 싶어 작은 가마를 가져오게 했다. 백천범은 그의 말을 순순히 따르며 마차에 올라 꽃밭을 구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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