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2화
태자는 계속 기다리라고 했지만, 황보주아는 그처럼 여유를 부릴 수 없었다.
석 달이 지난 탓에 백천범의 배는 숨을 불어넣은 듯 볼록해져 있었다. 그녀는 배를 감싸 안은 채 정원을 거닐곤 했다. 한 손으로는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고 한 손으로는 초왕의 부축을 받는 그녀의 얼굴엔 당장이라도 아이를 낳을 것처럼 뿌듯한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누각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황보주아는 토악질이 날 것 같았다. 백천범이 아니었다면 묵용감의 여인은 바로 그녀 자신이었을 텐데. 어느새 그녀는 백천범을 보는 것조차 진절머리가 났다.
그녀에게 무엇보다 끔찍한 사실은, 백천범이 묵용감의 아이를 가졌다는 점이었다. 아이를 낳게 되면 묵용감과 백천범 사이에는 절대 끊을 수 없는 연이 맺히게 된다. 부부는 갈라질 수 있어도, 가족을 어찌 갈라놓을 수 있을까. 이대로 세 식구가 되면 그녀가 비집고 들어갈 자리는 영영 사라지고 말 터였다.
절망감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어느새 그녀는 얼굴마저 무섭게 일그러졌다. 백천범이 아이를 낳아선 안 된다는 생각이 더욱더 확고하게 그녀의 안에 자리 잡았다. 이 세상에서 묵용감의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사람은 그녀밖에 없었고, 그녀여야만 했다!
* * *
백천범은 볼록 튀어나온 배를 어루만지며 만족스러운 탄식을 내뱉었다.
“얼른 아기를 보고 싶어. 자그마한 걸 품에 꼭 껴안고 ‘어머니’라는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얼마나 좋을까. 좋아서 죽을지도 몰라.”
“그런!”
월규가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회임한 몸이십니다. 제발 말씀 좀 주의하십시오.”
백천범이 히히 웃으며 장난을 던졌다.
“괜찮아. 내 배 속에는 용의 자식이 있으니 그런 금기는 걱정 안 해도 돼.”
그녀는 높다란 의자에 앉아 손수건을 비비 꼬며 두 발을 앞뒤로 흔들었다. 볼록한 배만 아니었다면 영락없이 명랑한 소녀의 모습이었다.
“요즘 날씨가 좋네.”
그녀가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밖에 나가서 바람 좀 쐬면 정말 좋을 텐데.”
월규 역시 밖을 바라보았다.
“지난번에 태자 전하께서 국화도 구경하고, 게도 먹으러 금릉에 가자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천고마비의 계절이 되었으니 지금 금릉에 가면 딱 좋겠지요.”
그때 일이 기억난 백천범이 활짝 웃어 보였다.
“맞아, 맞아. 금릉에 게를 먹으러 가자고 하셨어. 어릴 때 언니들이 게를 먹으면서 시도 읊고 국화주까지 마시는 걸 봤거든. 그땐 구경만 했지만 어찌나 부럽던지. 이번엔 무슨 일이 있어도 잔뜩 먹을 테야.”
신이 난 월규도 손뼉을 쳤다.
“금릉에 가면 국화도 감상할 수 있다고 하셨지요. 왕야께서 녹색 국화가…….”
‘녹색 국화’ 이야기에 백천범의 얼굴이 굳어졌다.
“녹색 국화 얘기는 왜 꺼내는 거야.”
실언을 했음을 깨달은 월규가 곧바로 그녀를 달랬다.
“그럼 성만 둘러보고 오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백천범의 표정은 쉬이 풀리지 않았다.
“다 지난 일이잖습니까. 왕야께는 왕비 마마밖에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마마께서 무슨 꽃을 좋아하시는지 왕야께 알려 드리십시오. 분명 왕야께서도 그 꽃만 좋아하실 겁니다.”
그 말에 백천범은 창 아래 활짝 핀 월계화를 바라보았다. 아이 주먹만 한 꽃송이가 바람에 살랑살랑 나부꼈다. 활짝 핀 하얀색, 분홍색, 빨간색 꽃송이는 요염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숨을 한번 깊게 들이마시며 은은한 향을 맡았다.
“나는 월계화가 좋아.”
“왕야께서는 마마와 관련된 것이라면 뭐든 다 좋아하십니다. 분명 월계화도 좋아하시게 될 겁니다.”
백천범이 제 손을 꼼지락거리다 말했다.
“월계화는 조금 평범한데, 그래도 좋아하실까?”
“내 얘길 하고 있었소?”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묵용감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백천범의 얼굴이 월계화보다 화사하게 피어났다. 그녀는 곧장 의자에서 뛰어내려 그의 품에 안겼다.
묵용감은 그윽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감쌌다.
“이런, 이런. 그대가 어딜 봐서 곧 어머니가 될 여인이란 말이오? 다음부턴 이러면 안 되오. 아이도 있는데 조심해야 하잖소.”
“저도 알아요.”
백천범이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오늘 아침에 위 의원이 아이는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댔어요. 아무 문제 없대요.”
묵용감이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으면서도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예전에는 시름에 잠겨 걸을 엄두도 내지 못하더니, 지금은 쏜살같이 뛰어다니는군. 정상적인 모습은 볼 수 없는 것이오?”
백천범이 태연하게 말했다.
“저는 평소에도 이랬으니까 아주 정상적인 거죠.”
묵용감은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래도 아이를 가졌으니 늘 조심해야 하오.”
잔소리를 늘어놓는 묵용감의 모습이 꼭 나이 많은 아낙 같아, 월규는 애써 웃음을 꾹 참았다. 그녀가 백천범에게 슬며시 눈짓을 보냈다.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린 백천범이 창가에 핀 월계화를 가리켰다.
“예뻐요?”
“그런대로 괜찮소.”
백천범이 다시 그에게 물었다.
“마음에 들어요?”
“그런대로 괜찮소.”
그녀가 풋풋한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전 월계화가 좋아요.”
“…….”
“왕야는 안 좋으세요?”
그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겨우 대답을 내놓았다.
“…좋소.”
“전 진심이라고요.”
백천범은 조금 부끄러운 기색을 드러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앞으로 녹색 국화는 좋아하지 마세요. 너무 귀하고 키우기도 까다롭잖아요. 하지만 월계화는 향도 곱고 꽃이 피는 시기도 길어서 좋은 점이 얼마나 많은데요…….”
묵용감은 소리 없이 웃고 말았다. 그녀는 아직 녹색 국화 일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이럴 때면 영락없는 어린아이였다. 한번 마음을 쓰면 그가 완전히 자신의 것이길 바라고, 예전의 흔적을 가리려 온갖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 마음을 어찌 모를까. 그도 마찬가지인 것을.
그가 그녀의 손을 움켜쥐고 진지한 표정을 보였다.
“이제부터 녹색 국화가 아닌 월계화를 좋아하겠소. 그대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나도 좋소.”
신이 난 백천범이 월규를 돌아보았다. 월규 역시 뿌듯한 마음에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사실 그녀에게 눈짓한 건 금릉에 가는 일을 꺼내 보라는 뜻이었는데, 월계화 이야기가 나올 줄이야. 하지만 잘 풀린 듯했다.
“아, 그대에게 줄 게 있소.”
묵용감이 그녀를 문 앞에 데려가더니 바닥에 놓인 광주리를 가리켰다.
광주리 안을 들여다본 백천범이 깜짝 놀라며 그를 돌아보았다.
“와, 미꾸라지네요! 어디서 나신 거예요?”
“시장에서 사 왔소.”
그 말에 그녀가 지은 표정이란! 묵용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이 간지럽고, 들떴다.
“위 의원이 임부에게 미꾸라지가 좋다더군. 해서 특별히 사 왔소.”
“왕야께서 직접 사 오셨다고요?”
“그렇소. 가동과 영구도 데려가지 않았다오.”
그는 평범한 백성들처럼 아내에게 미꾸라지를 사다 주려 시장을 찾았다. 가게를 세 곳이나 둘러보며 직접 물건을 고르는 일은 난생처음이었다. 부끄럽거나 낯선 기분은 들지 않았다. 그에게는 무엇보다 자연스러웠고, 기분 좋은 일이었다.
* * *
백천범이 원하는 일을 묵용감이 승낙하지 않을 리 없었다. 두 사람은 포근하고 화창한 날을 골라 금릉으로 향했다.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다녀오려 했지만, 태자가 함께 가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결국 엄청난 무리를 이끌어야 했다. 앞뒤로 수많은 호위병을 대동한 마차 네 대가 함께 길을 떠났다.
초왕과 왕비가 탄 마차와 월규, 기홍, 녹하가 탄 마차, 황보주아와 은옥, 채봉이 탄 마차, 태자와 그의 모사 제갈겸유가 탄 마차, 이렇게 네 대였다. 기세등등한 행렬은 금릉을 향해 곧장 나아갔다.
원래는 위중청도 함께할 예정이었다. 초왕비가 회임을 했으니 수행 의관이 응당 따라나서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떠나기 직전 음식을 잘못 먹었는지 위중청은 구토에 배탈까지 일으켰고, 어쩔 수 없이 침대 신세를 지게 되었다. 본인이 의원인지라 직접 약을 처방해 많이 회복하긴 했지만, 금릉에 갈 상태가 아니었다.
징양호에서 게를 먹을 거라는 예정을 듣고, 위중청은 백천범에게 게를 먹지 말라고 거듭 당부했다. 게는 성질이 차고 혈액의 흐름을 촉진하여 태아에게 그리 좋지 않았다. 백천범은 생각할 여지도 없이 그리하겠다고 답했다. 아무리 아쉬워도 아이에게 좋지 않은 건 절대 가까이할 생각이 없었다.
아침 일찍 출발한 초왕 일행은 자그마한 가게에서 요기를 했고, 저녁 무렵에야 징양호에 도착했다. 징양호가 있는 마을은 호수 이름을 따서 징양진이라고 불렸다. 가을이 되어 과실이 무르익는 계절이 되면 징양진은 많은 여행객으로 성황을 이루었다. 특히 밤에는 붉은 등롱을 매단 배가 호수 위를 유유히 오가며 은은한 불빛을 더했다.
밤이 되어야 수면 위로 나오는 게들의 습성 덕분이었다. 어민들이 게를 잡는 모습이 워낙 장관이라, 여행객들이 늘 호수 주변을 에워쌌다.
백천범은 얼른 그 광경을 구경하고 싶었다. 객잔에서 저녁을 들면서도 그녀의 신경은 온통 징양호에 쏠려 있었다.
식사 후 잠시 휴식을 취한 초왕 일행은 호숫가로 출발했다.
휘영청 밝은 달빛 아래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어왔다. 두봉斗篷(소매가 없는 망토형 외투)을 걸친 백천범은 묵용감의 손을 꼭 잡고 인파에 섞여 나아갔다. 거리 양쪽은 전부 객잔과 주루였다. 가게마다 매달린 붉고 노란 등롱들이 은은한 빛을 내뿜었다. 마치 옅은 색의 안개가 낀 듯 정취가 어린 풍경이었다.
백천범은 문득 고개를 들어 묵용감을 바라보았다. 불빛에 비친 그의 얼굴은 평소와 달리 부드러운 윤곽을 그리고 있었다. 편안한 눈매와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고상하고 점잖은 느낌을 주었다. 지금의 그는 군대를 이끄는 대장군이 아니라 시회詩會에 나가는 뛰어난 시인처럼 보였다.
월규는 늘 태자의 모습이 기품있다고 했지만, 백천범의 눈에는 묵용감도 못지않았다. 그녀는 늘 속으로 생각해 왔다. 그녀의 지아비가 군주 될 마음이 없어서 그렇지, 그럴 마음이 있었다면 충분히 제위에 올라 위엄과 기품을 드러낼 인물이었다.
묵용감은 자신을 향한 시선을 느끼고 속으로 웃음을 흘렸다. 그녀가 홀린 듯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두봉을 걷어 올려 백천범을 슬쩍 가리고는 거리에서 입을 맞췄다.
백천범이 눈을 크게 떴다. 사방이 사람들로 가득했다. 모르는 사람은 그나마 상관없다 해도, 전부 익숙한 사람들뿐이었다. 그가 두봉으로 가려 주었지만, 안에서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이가 없으리라.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노점에서 파는 과실주처럼 불그스름하게 물들어 있었다. 버둥거리면 이목을 끌까 봐 가만히 품에 안긴 모습이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묵용감은 참지 못하고 그녀의 얼굴에 한 번 더 입을 맞추었다.
몇몇 시녀들은 이제 놀라지도 않았다. 태자는 웃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뒤에서 걸어오던 황보주아만이 있는 힘껏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깊이 찔렀지만, 아픔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새하얀 분노가 머릿속을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