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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391)화 (390/1,192)

제391화

“이대로 누워 계세요. 약을 달여 올게요.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절 부르세요.”

사장풍은 묵묵히 그녀를 지켜보았다. 그녀는 곧장 부엌으로 향했다. 그의 침소와 부엌은 나란히 이어져 있어 누운 채로 그녀의 모습을 볼 수도, 부를 수도 있었다.

사실 그녀도 이제 열여섯이 된 어린 여인이 아닌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니 늘 화려한 차림이었지만, 교만하거나 콧대 높은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아궁이에 불을 떼고 약을 달이는 솜씨가 능숙하기까지 했다.

생각할수록 정말 이상한 여인이다. 그는 물끄러미 사앵앵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라면, 어떤 환경에서도 씩씩하게 잘 지내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백천범과도 닮은 듯했다. 백천범을 떠올린 순간 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가 이렇게 큰 소란을 피웠으니, 초왕의 분노가 그녀에게 향하진 않았을까 걱정이었다.

* * *

사성성은 이제 견딜 수가 없었다. 여전히 그의 명성은 높았고, 만나는 사람마다 ‘사 주인장’이라며 그를 공손하게 대했다.

이토록 힘겹게 쌓아 올린 명성인데, 지금은 못난 딸 때문에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시집도 가지 않은 여인이 제 발로 사내의 집에 눌러살다니. 게다가 집 안의 좋은 물건이란 물건은 모두 쓸어다 그 사내에게 가져다주었다.

처음엔 그도 사장풍을 꽤 훌륭한 사윗감이라 여겼다. 위풍당당한 외모와 건장한 체격은 말할 것도 없고, 젊은 나이에 우원 장군에 오른 인재였으므로. 무엇보다 초왕이 직접 중매를 서주었다는 영광을, 다른 이들이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초왕이 준 영광이었으니 그가 무너뜨리는 것도 식은 죽 먹기였다. 사장풍이 초왕에게 두들겨 맞아 실려 왔다는 사실은 오수진에서 딱히 비밀도 아니었다. 초왕에게 미움을 샀다면 죽음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살려서 보내 주었으니 오수진의 백성들은 초왕의 너그러운 마음을 칭송했고, 사장풍에겐 비난을 퍼부었다.

처음엔 출세를 노리고 어떻게든 혼인을 올리려 했지만, 이젠 아니었다. 사장풍은 초왕의 총애를 잃은 것도 모자라 장군의 지위까지 잃게 될지도 몰랐다. 숨을 헐떡이며 방에 누워 있는 사장풍의 모습이 그의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당당한 대장부는커녕, 처량하기 짝이 없는 환자의 모습이 아니던가.

가문을 빛내는 건 고사하고 제대로 나을지도 장담할 수 없었다. 설령 회복한다고 해도 반 불구가 된다면 딸의 여생은 어찌 되겠는가?

그는 노파심에 사앵앵을 타일렀지만, 그녀는 단 한 글자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오히려 이치에 맞는 말을 청산유수로 늘어놓으며 그를 소인배로 몰아세웠다.

“아버지, 그러시는 거 아니에요.”

사앵앵이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사 장군님이 곤란한 처지가 되었는데 어떻게 우리가 외면하겠어요? 마땅히 도움을 주어야죠.”

사성성이 자신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네가 도와준다 치자, 그다음엔 어쩔 건데?”

“어쩌긴 뭘 어쩌겠어요?”

사앵앵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보였다.

“부부는 응당 어려움을 함께 나누어야죠. 사 장군님을 잘 보살펴서 함께 가업을 이으면 되잖아요!”

아직 혼사도 치르지 않았는데 부부는 무슨 부부! 사성성은 듬성듬성한 턱수염이 흩날릴 정도로 치를 떨었다. 게다가 언제 그가 사장풍에게 재산을 넘겨주겠다고 했단 말인가!

사앵앵은 그 틈에 점원에게 소리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닭이 잘 고아지고 있는지 확인 좀 해 줘. 얼른 가져가야 하니까.”

점원이 웃으며 답했다.

“거의 다 되었습니다. 닭을 삶느라 다른 손님들까지 기다리고 있는걸요.”

사성성은 그런 딸의 모습이 한스럽기만 했다.

“네 꼴 좀 봐라. 대체 이게 뭐냐? 좋은 것들은 전부 다 갖다 바치니 이래서 어찌 장사를 하겠느냐?”

“아버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버지 사위예요. 그리 쩨쩨하게 굴지 마셔요.”

결국 사성성이 버럭 화를 냈다.

“이렇게 다 갖다 바치는 꼴은 못 본다!”

“이게 어떻게 갖다 바치는 거예요? 사 장군님은 데릴사위라고요. 한가족이잖아요!”

사성성이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거듭 타일렀다.

“앵앵아, 사 장군이 중상을 입지 않았느냐. 상처는 낫는다고 해도 기력이 쇠해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할 수 있다.”

사앵앵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게 주인이 될 건데 무슨 힘을 써요?”

사성성이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을 했다.

“에헴, 그게… 그래도… 아이는… 하나 있어야 하지 않겠냐?”

“괜찮아요. 의원 말로는 아이를 낳는 데는 아무 지장 없대요.”

“쿨럭, 쿨럭. 아비의 말은 그러니까… 그, 힘을…….”

“괜찮아요. 제가 하면 돼요.”

사성성은 순간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사앵앵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는 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었지만, 들을 때마다 기가 차고 힘이 풀렸다.

여인의 몸으로 태어났다지만 사앵앵의 성격은 사내대장부 못지않았다. 예전에는 그가 숨겨 둔 춘화春畫첩을 몰래 보기도 했다. 그녀는 화첩 속의 준수한 공자를 유독 좋아했는데, 전범에게 푹 빠졌던 것도 그 영향이리라.

“앵앵아, 넌 예쁘장하고 준수한 사내를 좋아하지 않느냐? 아비가 전범보다 더 잘생긴 사람을 아는데, 뽀얀 얼굴에 성격도 온순하고…….”

그때 사앵앵이 검지를 쭉 뻗어 흔들며 말했다.

“아버지, 그런 사내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요. 연약해서는 힘도 못 쓴다니까요. 자고로 사 장군처럼 영민하고 무공에 능해야 대장부라고 할 수 있죠!”

“…예전엔 예쁜 공자들만 좋다더니 지금은 네 꼴 좀 봐라. 이번도 마찬가지다. 지금 사 장군이 좋아도 나중엔 싫을 수도 있다. 그러니 아비 말 듣고 좀 더 기다렸다가…….”

사앵앵이 그의 말을 자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예전엔 미소년을 좋아했어요. 하지만 제가 틀렸다는 걸 깨달았잖아요. 제가 기댈 사람이 못 되었어요. 만날 거라면, 한번 은애하는 사람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 장군 같은 분을 만나야죠. 사 장군님이 괜히 저런 꼴이 되었겠어요?”

그녀의 말에 담긴 정보가 너무나 많다. 사성성이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네 말은 사 장군이 초왕야에게 저리 얻어맞은 이유가…….”

“아버지, 초왕야와 관련된 일이니 함부로 말씀하지 마세요. 아버지까지 화를 입으실 수도 있다고요. 사장풍은 건장한 청년이니 목숨은 구했지만 아버지는… 힘들지도 몰라요.”

사성성은 황급히 입을 닫았다.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아무래도 그는 엄청난 사실을 알고 만 듯했다.

사앵앵도 손사래를 치며 그의 입을 막았다.

“저도 아버지가 절 위해서 그러시는 거 알아요. 그렇다고 절 인정머리 없는 사람으로 만들진 마세요.”

그의 딸은 더없이 단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사 장군님을 따를 거예요. 사 장군님 아니면 이번 생에 절대 혼인하지 않을 거라고요!”

사성성은 주먹으로 제 가슴을 쳤다. 답답해서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그건 혼인한 뒤의 일이다. 지금은 남들한테 시답잖은 말만 산단 말이다.”

사앵앵이 눈을 희번덕거렸다.

“지금 돌봐 주지 않으면요? 죽은 다음에 돌봐 주라고요?”

그녀가 고개를 홱 돌려 점원을 불렀다.

“닭은 다 곤 거야? 반찬도 많이 담아 줘. 아, 죽에 대추 넣는 것도 잊지 말고. 보혈에 좋으니까.”

“예, 예.”

멀리 있던 점원이 목청을 높여 대꾸했다.

“막 담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금방 됩니다.”

그녀는 더는 할 이야기가 없다는 듯 곧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알겠어. 아버지, 저 갈게요. 내일 봬요.”

인사를 건넨 사앵앵은 찬합을 챙겨 밖으로 향했다.

사성성은 시큰하게 젖어든 눈으로 자신의 딸을 바라볼 뿐이었다.

딸이 말을 듣지 않으니 이제는 사장풍을 찾아가는 수밖에 없다. 그는 부디 사장풍이 사앵앵을 떼어 놓을 수 있기만을 바랐다.

* * *

얼마 후, 그는 사앵앵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사장풍을 찾아갔다. 못 본 사이 사장풍의 안색은 훨씬 핼쑥해져 있었다. 사장풍은 그를 보자마자 애원하듯 말했다.

“부디 따님을 데려가 주십시오. 두 번 다시 이곳을 찾지 않게 해 주신다면 이 사장풍, 평생 그 은혜를 잊지 않고 보답하며 살겠습니다.”

사성성은 순간 자신이 귀신도 꺼릴 만한 딸을 낳은 건 아닌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사장풍처럼 명성도 잃고 반쯤 죽어가는 사내까지 자신의 딸을 마다한단 말인가?

한편으로는 부아가 치밀었다. 이런 망할 놈을 보았나! 남들이 뭐라고 하든 금이야 옥이야 키운 귀한 딸이었다. 그런 딸이 소처럼 시중을 드느라 애를 먹는데 제까짓 게 감히 싫다니!

화가 치민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머리끝까지 화가 나니 할 말도 없었다. 문을 나서려는데 마침 안으로 들어오던 사앵앵과 마주치고 말았다. 그녀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 사위를 보러 오신 거예요?”

몸을 돌려 사장풍을 가리킨 사성성이 이를 악물었다.

“잘 보살펴서 제 발로 땅을 디딜 수 있거든, 그때 혼사를 올리거라.”

사앵앵의 눈이 커지더니 놀란 얼굴로 말했다.

“아버지, 그럼 저희 혼인을 허락하신 거예요?”

“…….”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고 있었다…….

* * *

황보주아는 미칠 지경이었다. 그날 밤 백천범을 냉대하는 묵용감의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돌아간 후에는 문전박대까지 당했다고 들었으니, 당연히 화가 더 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어째서 예전 모습으로 돌아갔단 말인가?

초왕과 초왕비는 관저에서 각종 애정 행각을 벌였다. 잠시라도 보지 못하면 큰일이 난다는 듯이, 초왕이 후원에 찾아가거나 초왕비가 음식을 들고 초왕을 찾아오는 식이었다.

지켜볼 수만은 없던 그녀는 태자를 찾아가 고충을 토로했다.

“태자 오라버니, 저도 할 만큼 했습니다. 셋째 오라버니는 절 보려 하지도 않는데, 제가 어찌해야 한단 말입니까?”

백옥 같은 손가락으로 흑옥 바둑알을 쥔 태자가 천천히 바둑알을 내려놓았다.

“애써 판을 만들었지만 사장풍이 벌인 일도 참는 아이다. 지금 당장 무슨 수로 두 사람을 떨어뜨리겠느냐?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여전히 기다리라는 것뿐이다.”

“하지만.”

황보주아가 서둘러 자신의 바둑알을 내려놓았다.

“곧 백천범의 배가 불러올 텐데, 조금 더 기다렸다간 아이가 태어나고 말 것입니다.”

태자가 그녀를 흘겨보았다.

“셋째도 어린 나이가 아닌데 자식이 있어야지. 설마 셋째가 자식을 낳는 게 싫은 것이냐?”

황보주아가 억지로 미소를 띠었다.

“셋째 오라버니를 생각하면 기쁘지요. 하지만 태자 오라버니의 대업은 어찌 이룬단 말입니까?”

바둑알을 집어든 태자가 판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가 ‘탁’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바둑알을 놓았다.

“네가 졌구나.”

황보주아는 서둘러 바둑판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그가 내려놓은 바둑알이 모든 퇴로를 막아 버렸다. 역시, 그녀의 패배였다.

그녀는 울상이 된 얼굴로 바둑알을 함에 넣었다. 태자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누구든 부담이 클수록 느리게 걷는 법이지. 셋째를 빠르게 움직이고 싶다면, 그 애의 부담을 없애 주면 되지 않겠느냐.”

황보주아가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태자 오라버니의 말씀은…….”

“기다리래도.”

태자가 그녀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둥글게 말아 올렸다.

“좀 더 기다리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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