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390)화 (389/1,192)

제390화

여전히 서첩을 들고 서 있는 황보주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그제야 그녀를 알아차린 백천범이 입을 열었다.

“맞다, 왕야. 주아 언니가 특별히 서첩을 드리러 왔대요.”

묵용감은 이제야 황보주아를 본 것처럼 물었다.

“무슨 서첩?”

황보주아는 기회를 놓칠세라 다시 서첩을 내밀었다.

“방금 말씀드렸는데, 못 들으셨지요. 막도자의 서첩입니다. 오라버니께서 막도자의 글씨를 좋아하셨던 게 생각났습니다. 용이 춤을 추는 듯한 서체가 좋으시다고…….”

묵용감의 그녀의 말을 뚝 잘랐다.

“막도자의 서책이라?”

황보주아는 그가 관심을 보이는 줄 알고 기쁜 표정으로 답했다.

“예. 예전에 막도자의 서체를 따라 쓰시고는 선황께 칭찬을 듣지 않으셨습니까? 오라버니께서 문무에 모두 능하다시며 얻기 힘든 귀중한…….”

묵용감이 담담한 표정으로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이더냐, 지나간 일이거늘.”

서첩을 받아든 그는 대충 훑어보고는 백천범의 안색을 살폈다.

백천범은 두 사람에게는 관심도 없었다. 그녀는 찬합에서 음식을 꺼내 작은 탁자에 차리느라 분주했다. 어느새 먹음직스러운 향이 코끝을 스쳤다.

묵용감이 서첩을 한통에게 넘기며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보였다.

“요즘 막도자의 서체를 연습하지 않더냐. 가지거라.”

“…….”

한통은 할 말을 잃었다. 검술이면 몰라도 어찌 자신이 서체를 연습한단 말인가……?

“…오라버니.”

“막도자의 서체는 연습을 안 한 지 오래다. 내가 가지고 있어도 소용없으니 한 장군에게 더 쓸모가 있지 않겠느냐.”

그가 이렇게 말하는데 황보주아가 뭐라 더 말할 수 있을까. 울상이 된 그녀가 서첩을 바라보았다. 제법 비싼 값을 치르고 산 만큼 유용하게 쓰일 줄 알았더니,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줄이야.

얼떨결에 서첩을 받아든 한통이 감사를 표했다. 용이 날고 봉황이 춤을 추듯 유려한 서체가 담겨 있었지만, 그는 단 한 글자도 알아볼 수 없었다.

두 사람이 멀뚱멀뚱 서 있자, 묵용감이 먼저 입을 열었다.

“별일 없거든 둘 다 나가 보거라. 왕비와 아침을 들겠다.”

한통은 곧장 예를 갖추고 인사를 올렸지만, 황보주아는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꾸물대며 밖으로 나오긴 했지만,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서첩에 머물러 있었다.

한통이 그녀의 기색을 알아차리고 말했다.

“황보 아가씨께서 아끼던 물건이라면 다시 가져가시지요.”

어차피 그에겐 쓸모없는 물건이었다. 끽해야 코를 푸는 데나 쓰지 않겠는가?

황보주아는 억지로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아닙니다. 셋째 오라버니께서 상으로 내리셨으니 이제 한 장군님의 것입니다.”

몇 걸음 나아가던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다른 이에게 넘기십시오. 은자 만 냥 정도면 제법 값을 잘 받으실 겁니다.”

한통은 자신도 모르게 서첩을 꽉 움켜쥐며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제게는 황금을 주더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귀중한 것입니다. 다른 이에게 넘기다니요? 날마다 이 서첩을 보고 붓글씨를 연습하겠습니다!”

한편, 방 안에서는 백천범이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주아 언니가 왕야께 주고 싶어 하던 서첩인데, 어째서 한 장군님한테 주신 거예요?”

묵용감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다른 이의 선물을 받으면 그대가 싫어하지 않겠소?”

백천범이 더욱더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왜 싫어하겠어요? 그 서첩은 비싸 보이던데 가지고 있으면 언젠간 쓸모가 있을 거 아니에요.”

묵용감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주 돈벌레가 따로 없소.”

* * *

사장풍은 이렇게 견디기 힘들었던 적이 없었다. 화를 잔뜩 실어 사앵앵의 손을 뿌리쳤지만, 그의 힘은 그녀에게 느껴지지도 않는 수준으로 약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그의 몸을 이끌고 변기통으로 향하며 재촉했다.

“좀 더 빨리 움직일 순 없어요? 또 바지에 쌌다간 안 씻겨 줄 거예요.”

신은 어찌 이리 자신에게만 불공평하단 말인가? 사장풍은 차라리 초왕의 손에 맞아 죽길 바랐다. 이 여인에게 온종일 능욕을 당하는 게 더 치욕스러웠다. 사앵앵과 함께 지낸 며칠 동안, 그녀의 무서움을 치가 떨리도록 알게 되었다.

다 큰 여인이 그의 바지를 벗기겠다며 다가오지 않는가. 안 그래도 힘이 없던 그는 경악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바지를 벗기지 못하게 하려고 발버둥 친 것인데 결국……. 너무 오래 저항하느라 참지 못하고 실수를 하고 말았다. 그 순간, 그는 할 수만 있다면 벽에 머리를 박고 자결하고 싶었다.

안타깝게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었다. 바로 그녀의 비아냥을 묵묵히 듣는 것.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말은 ‘사 장군님이 바지에 실수한 걸 알면, 백천범이 어떻게 생각할까?’였다.

그건 상상만으로도… 죽느니만 못했다.

사앵앵과 함께 지내는 동안 그는 단 두 가지만을 생각했다. 몸이 당장 낫든가, 곧바로 죽어 버리든가. 물론 어느 쪽이든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이었다.

사앵앵은 작고 연약해 보여도 힘은 장사였다. 어릴 때부터 짐 옮기는 일을 자주 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힘이 세졌다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그의 허리를 감싸 안고 있는 힘껏 들어 올리더니 변기통 앞으로 옮겼다.

“눠요.”

누라니 뭘 누란 말인가, 설마 지금? 이런 소리를 태연하게 하는 여인이 있단 말인가? 그는 그녀가 사실 남자가 아닌지 의심도 했다. 외모는 아리땁기 그지없는데 그보다 대범하고 털털했다. 그녀의 호탕함은 그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어서요.”

그녀가 연신 독촉하며 사장풍을 올려다보았다.

“무겁단 말이에요. 제가 바닥에 고꾸라지면 어쩌려고요? 또 바지에 쌀 거라고요.”

결국 그가 버럭 소리쳤다.

“바지에 싼다는 소리 좀 그만할 수 없습니까?”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바지에 싼 걸 쌌다고 하는데, 그 말도 못 한다는 거예요?”

사장풍은 가까스로 심호흡을 했다. 부아가 치밀어 오장육부가 다 틀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는 참고, 참고, 또 참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몸만 나으면, 너 죽고 나 죽자는 심정으로 그녀와 끝장을 내고 말리라!

“눌 거예요, 안 눌 거예요? 정말 무겁다고요. 견딜 힘도 없어요. 아니면 제가 벗겨 줘요?”

“감히……!”

보기 좋게 소리까지 쳤지만, 소리를 지르는 데 모든 힘을 다 쓴 것 같았다. 맥이 쭉 빠져 버린 그가 한껏 누그러진 목소리로 애원하듯 말했다.

“…건드리기만 해 보십시오.”

사앵앵은 기가 찼다. 대체 뭐가 그리 부끄럽단 말인가? 어쨌든 두 사람은 곧 혼사를 치를 사이인데, 그녀가 돌봐 주지 않으면 누가 돌봐 주겠는가. 그는 불온한 마음을 먹은 대가로 초주검이 되어 돌아왔다. 그녀니까 도와주는 것이지, 이런 그를 누가 거들떠본다고. 그런데도 내내 불쾌해하다니, 정말 사리 분별도 못 하는 사내였다.

“안 건드릴 테니 혼자 하세요.”

그녀는 눈을 가리는 척 손을 들어 올리고 중얼거렸다.

“부끄러울 게 뭐 있어요. 혼인을 해도 안 보여 주실 거예요?”

“…….”

누가 승낙이라도 했단 말인가? 저런 맹목적인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오랜 시간 참은 터라 그도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아무리 몸이 불편할지언정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일단 급한 불을 끌 생각으로 바지 매듭을 풀었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녀는 장사꾼의 딸인 데다, 이미 아버지를 능가하는 수준이 아닌가?

“돌아서십시오.”

사앵앵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누구는 뭐 보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아세요?”

그러면서도 사앵앵은 그의 허리를 받치고 서 있었다.

“어서요. 정말 못 버티겠어요.”

여인의 앞에서 소변을 보다니. 사장풍은 난생처음 겪는 일에 말로 표현할 수도 없는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얼굴은 화끈거렸고, 등줄기에서는 자꾸만 땀이 흘렀다. 그는 황급히 바지를 벗고 숨을 죽이며 아주 천천히 볼일을 보았다. 최소한 그녀가 소리라도 듣지 않아야 했다.

그러나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데 어찌 조용할 수 있을까? 그가 아무리 조절하려 해도 쪼르륵거리는 소리는 시종일관 두 사람의 귓가를 맴돌았다.

문득 장난기가 치민 사앵앵이 고개를 돌려 그에게 말했다.

“하, 다 봤네요.”

사장풍은 무의식적으로 몸을 움츠렸고, 손이 흠칫 떨렸다. 결국 바짓가랑이에 아주 조금 묻고 말았다.

사실 사앵앵은 줄곧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도 나름대로 조신한 여인이었다. 말은 그리해도, 어찌 막무가내로 남의 몸을 보겠는가. 그저 살짝 장난을 쳤을 뿐인데, 이상한 침묵이 흘렀다. 살짝 눈을 뜬 그녀가 곧바로 소리치고 말았다.

“아이! 어찌 또……!”

고개를 들어 보니 사장풍이 살기등등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얼른 말을 바꾸었다.

“제 탓이에요, 제 탓. 놀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옷은 빨아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사장풍은 이젠 거의 자포자기한 상태였다. 이미 그의 체면은 구겨질 대로 구겨져, 더는 세울 것도 없었다.

“여기서 갈아입겠습니다. 침대에서 갈아입는 게 더 불편할 테니.”

그의 온순한 태도에 사앵앵은 조금 의아했지만, 서둘러 깨끗한 바지를 가져왔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넓은 바짓단만 바라보며 밑으로 내려갔고, 그가 그녀의 등을 짚을 수 있도록 웅크려 앉았다.

“다리 좀 들어 보세요.”

사장풍은 묵묵히 그녀가 바지를 벗기기 쉽게 발을 들어 올렸다.

그녀가 깨끗한 바지를 그의 발에 꿰고 바짓단을 올렸다. 그는 무릎 부근에서 직접 바지를 올려 끈을 묶었다. 이어 그녀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침대에 누웠다.

그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어느새 분위기는 침묵을 머금고 가라앉았다. 사앵앵이 그에게 이불을 잘 덮어준 뒤 몸을 돌려세웠다. 사장풍은 그제야 흠뻑 젖은 그녀의 등을 알아차렸다. 얇은 여름 옷감이 몸에 달라붙으니 안에 입은 옷과 그 끈까지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다.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던 그가 어느덧 생각에 잠겼다. 어째서 이 순간 가슴이 쿵쿵 울린단 말인가?

알 수 없는 술렁임에 그가 몸을 뒤척였다. 사앵앵이 곧장 다가와 그를 살펴보았다.

“왜 그래요, 어디 불편한 데라도 있어요?”

“아뇨.”

사장풍이 잠시 할 말을 고르다 말을 이었다.

“조금 더워서 그렇습니다.”

그녀가 그의 이불을 조금 걷어 주었다.

“밖에 비가 오니까 가만히 있으면 그리 덥진 않을 거예요.”

어느새 그의 이마는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결국 그녀가 물을 떠 오더니 수건을 적셔 이마에 맺힌 땀을, 뒤이어 목과 손까지 꼼꼼하게 닦아 주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