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9화
백천범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침 일찍 무슨 일로 찾아온 거지?”
월규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코웃음을 쳤다.
“좋은 마음으로 찾아온 게 아닐 겁니다. 어제 마마를 깎아내느라 혈안이었잖습니까. 다른 사람이었다면 창피해했겠지만 하필 마마께 그리했으니… 바위로 제 발등을 찍는 일이나 다름없지요. 참나, 원.”
백천범이 월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솔직히 내뱉었다.
“사실 나도 좀 창피했어.”
“그러셨습니까?”
월규가 의아한 표정으로 눈을 깜박였다.
“소인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하나하나 이치에 맞는 말만 하셨는걸요.”
“…….”
저게 칭찬하는 말인가? 도통 분간이 가질 않았다.
어쨌든 손님을 무작정 기다리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백천범이 머리를 빗고 밖으로 나가보니 황보주아가 단정하게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주아 언니, 아침은 드셨어요?”
백천범이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아직 안 드셨으면 같이 먹어요.”
“아뇨.”
어제저녁 그녀가 음식을 마구 먹어 치우던 모습이 아직도 황보주아의 눈에 선연했다. 만약 밥을 먹다 또 딸꾹질이라도 한다면……. 그녀가 급히 고개를 저었다.
“저는 이미 먹었습니다.”
백천범도 더는 청하지 않았다.
“그럼 왕야랑 같이 먹을게요.”
황보주아가 문득 의아해진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셋째 오라버니께서도 안에 계십니까?”
분명 일찍 관청으로 향했다고 들었건만, 어떻게 그와 식사를 한다는 거지? 황보주아는 이런 일에 의문을 숨기지 않았다.
“관청에 가셨어요.”
백천범은 서스럼없이 대꾸하며 시녀들에게 분부를 내렸다.
“아침은 찬합에 담아 줘. 관청에 가서 왕야랑 먹을 거야.”
그때 황보주아가 불쑥 끼어들었다.
“지금쯤이면 셋째 오라버니도 드시지 않았을까요.”
“괜찮아요. 언제든 제가 찾아가면 왕야께서는 저희 모자와 함께 식사하시거든요.”
“…….”
모자라… 아직 아이를 낳지도 않았는데 어찌 저리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딸을 낳으면 어찌하려고. 아니, 어쩌면 낳지 못할 수도…….
“아, 그렇지. 언니, 아침부터 무슨 일로 찾아온 거예요?”
“셋째 오라버니께 이걸 드리려고요.”
황보주아가 소매에서 얇은 서첩을 꺼내 보였다.
“어제 셋째 오라버니께서 황염경의 서첩을 주셨는데, 마침 제게 막도자莫道子의 서첩이 있는 게 생각나서 가져왔습니다. 오라버니께서 막도자의 광초狂草(심하게 흘려 쓰는 초서체)를 좋아하시거든요. 용이 춤을 추듯 거침이 없고 강한 기세가 느껴지는지라…….”
서첩을 훑어보던 백천범이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이게 무슨 글자예요? 용도 뱀도 아니고, 구불구불해서 징그럽네요.”
“…….”
옆에 있던 월규가 웃으며 그녀를 감쌌다.
“왕비 마마, 저게 광초입니다. 왕야께서 자주 연습하셨는데 최근엔 통 보지 못했습니다.”
백천범이 뻔뻔하리만큼 당당하게 답했다.
“내가 돌아왔는데 붓글씨를 쓸 마음이 생기시겠어?”
월규가 얼른 한술 더 떴다.
“마마께서 안 계실 땐 더했을걸요? 녹하 언니에게 들으니 마마께서 안 계실 때, 왕야께서는 늘 멍하니 앉아 계시고 제대로 주무시지도 못했답니다. 당연히 붓글씨는 쓰실 마음이 없으셨겠지요.”
백천범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내가 무척 보고 싶으셨을 테니까.”
참으로 죽이 잘 맞는 주인과 시녀의 모습에 황보주아의 눈빛은 서릿발보다 차가워졌다. 어찌나 부아가 치미는지 소매 아래로 힘껏 주먹을 움켜쥐어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화를 가라앉히고, 스스로를 다스려야 할 때였다.
황보주아는 못 들은 척 무던한 표정을 내보였다. 그래, 잠시나마 우쭐해 보라지. 누가 최후의 승자가 될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 아닌가!
그때, 기홍이 찬합을 들고 들어왔다.
“왕비 마마, 지금 가시겠습니까? 소인이 관청까지 들어드리겠습니다.”
“언니는 아침부터 바쁘셨으니 잠시 쉬세요. 월규랑 가면 돼요.”
그제야 황보주아를 발견한 기홍이 서둘러 허리를 숙이고 인사를 올렸다. 이곳의 시녀들 중 기홍이 가장 예의가 바르기에, 황보주아도 자연스레 예를 갖추고 미소를 지었다.
“솜씨가 정말 훌륭하더군요, 기홍 아가씨. 지난번에 가져다준 죽 잘 먹었습니다.”
그 말에 백천범이 뭔가를 떠올린 듯 불쑥 물었다.
“주아 언니의 식사는 저희 쪽에서 챙겨요? 아니면 둘째 아주버님 쪽에서 챙겨요? 요즘 제가 먹는 양이 많이 늘어서 기홍 언니가 매우 바쁘거든요. 제대로 못 챙길 수도 있으니까 되도록…….”
황보주아가 그녀의 말을 단호히 잘랐다.
“제 식사는 태자 오라버니가 계신 곳에서 가져옵니다.”
그녀는 자존심이 센 사람이었다. 태자에게 자신을 떠넘기려는 백천범의 말을 가만히 들어 줄 생각은 없었다.
백천범이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날 채비를 했다.
“그럼 전 왕야한테 가볼게요. 참, 서첩도 제가 가져다드릴게요.”
“아닙니다, 제가 직접 드리겠습니다.”
황보주아가 서첩을 얼른 집어 단단히 쥐었다.
“날이 화창하니 저도 좀 걷고 싶군요.”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황보주아는 묵용감이 백천범을 냉대할 때 그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이참에 그와 마음을 제대로 쌓고 싶었다.
그녀는 늘 묵용감이 그리 무정한 사람은 아니라고 믿었다. 예전엔 그녀에게 따뜻하게 웃어 주고, 손도 잡아 주고, 업어 주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다른 이들에게 아무리 냉랭하게 굴어도 그녀만큼은 조금 다르게 대했다.
그의 따뜻했던 눈빛이 아직도 그녀의 기억에 선연했다. 당시 그가 진심이었다는 건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앞뜰 관청에 다다르자 그들을 발견한 보초병들이 공손히 물러났다. 모두와 사이좋게 지내는 성격인 백천범은 활짝 웃으며 말을 걸었다.
“왕야는 안에 계시죠?”
“예.”
한 보초병이 선뜻 답했다.
“왕야께서는 한 장군님과 대화 중이십니다.”
백천범은 여전히 활짝 웃는 얼굴을 보였다.
“아침은 먹었어요?”
“소인들은 이미 먹었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왕비 마마.”
황보주아는 차가운 표정으로 그들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백천범과는 달랐다. 그녀처럼 고귀한 존재가 하찮은 보초병들과 어찌 말을 섞는단 말인가. 허물없이 말을 건네는 백천범을 지켜볼수록, 그녀의 마음에 드리운 경멸이 짙어지고 있었다.
혹여 초왕이 군주가 된다면, 백천범 같은 사람이 어찌 황후가 될 수 있을까? 지금의 초왕비도 가당치 않은 자리인데. 아랫것들도 몰래 왕비를 비웃고 있을 게 분명했다.
마침 창가에 앉아 있던 묵용감은 시야에 백천범이 들어오자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매일 보는 사람이라면 익숙해지기 마련인데, 그녀를 볼 때마다 용암처럼 솟구치는 기쁨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그 마음은 표정에 고스란히 다 떠오르고 있었다.
그의 변화에 한통이 흠칫 놀랐다가 초왕비가 오는 걸 확인하고는 웃음을 삼켰다. 초왕은 평소 얼굴에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건만, 초왕비는 그의 굳은 얼굴을 간단히 무너뜨렸다. 오직 초왕비만이, 가능한 일이리라.
생각해 보면 감격스러운 일이 아닌가. 어떤 이는 평생 배필을 만나지 못했지만, 어떤 이는 배필을 위해 평생을 다 바쳤다. 그 기저에 깔린 연정을 떠올려 보면, 참으로 기묘할 따름이었다.
한통은 초왕비보다 황보주아를 더 많이 마주쳤다. 거의 반년 동안 전쟁을 치르면서 늘 황보주아가 초왕의 곁을 지켰다. 예전엔 정혼자였으니 초왕비가 없는 동안 그녀에게 진한 위로를 받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초왕도 여느 사내들과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한통의 착각에 불과했다. 초왕은 애당초 그런 짓을 생각하지도 않았고, 한결같이 초왕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 정이 많은 사람일 줄이야. 늘 초왕을 우러러봤던 한통에게 지금의 초왕은 더욱더 대단하게 비쳤다.
뒤이어 들어온 황보주아를 알아차린 묵용감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가 곧바로 평온한 표정을 보였다.
사실, 한통은 사장풍의 일로 초왕을 찾아온 터였다. 사장풍이 제대로 털어놓지 않아도, 그의 예리한 통찰력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사장풍과 초왕비 사이에 떳떳하지 못한 무언가가 있는 듯했다. 이번에는 초왕에게 죽기 직전까지 얻어맞고 실려 오지 않았던가.
그 후 어떠한 지시도 내려오지 않으니, 도무지 초왕의 의중을 알 길이 없었다. 하여 직접 내막을 알아볼 생각이었다.
사장풍은 전투에 능한 인재지만, 초왕에게 잘못을 저지른다면 죽음 말고는 다른 길이 없었다. 줄곧 한통이 궁금하게 여겼던 게 그 부분이었다. 사장풍을 죽이는 게 더 간단한 방법이 아닌가. 그러나 초왕은 사장풍을 죽이기는커녕 치료까지 해 주었다.
고민한 끝에 한통이 내린 결론은 초왕비의 체면이었다. 초왕은 그녀의 체면을 생각해 사장풍을 봐주고 있는 게 확실했다.
초왕비를 만난 참에 그는 유심히 그녀를 살펴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사내 둘을 부릴 만한 여인으로 보이진 않았다. 특히나 그 두 사내는 누군가에게 쉽게 굽힐 자들도 아니었다. 한통은 더욱더 아리송했다. 아직도 어린 티가 나는 풋풋한 소녀가 어찌 그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한 장군님, 안녕하세요!”
맑고 낭랑한 목소리가 그의 정신을 일깨웠다.
넋을 놓고 있던 탓에 초왕비에게 먼저 인사를 받고 말았다. 그는 초왕에게 혼쭐이 나기 전에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가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말장, 왕비 마마를 뵈옵니다.”
“그리 예를 차리지 마셔요.”
백천범은 월규를 시켜 찬합을 탁자에 올려놓았다.
“한 장군님, 식사는 하셨어요?”
“말장은 이미 먹었습니다. 마마께서 그리 관심을 가져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한편, 황보주아는 묵용감에게 다가가 섬섬옥수로 서첩을 건넸다.
“셋째 오라버니, 오라버니께서 막도자의 서체를 좋아하시는 게 생각나서 어젯밤 책장을 뒤져보니…….”
그러나 묵용감의 정신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는 줄곧 백천범과 한통을 힐끔거리며 미간을 찌푸리느라, 황보주아가 내민 서첩은 받지도 않은 채였다.
마침 백천범이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왕야, 아침 드셨어요?”
그가 무심결에 대답했다.
“먹었소…….”
그녀의 얼굴에 내려앉은 옅은 실망을 알아차린 그가 얼른 덧붙였다.
“아주 조금 먹어서 배가 다시 고파진 참이오.”
역시나 백천범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활짝 웃었다.
“잘되었네요. 제가 함께 먹어 드릴게요.”
묵용감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응당 자신이 해야 할 말이 그녀의 입에서 나오다니. 어쨌든 두 사람이 함께하면 그만이니,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