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8화
잠시 뒤, 안으로 들려오는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침대 옆에서 멈췄던 소리는 잠시 머물러 있는가 싶더니 금세 밖으로 향했다. 뒤이어 물소리가 나는 걸 보니, 세안을 하는 모양이다. 백천범은 천천히 몸의 힘을 빼며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 뒤, 다시금 침대로 다가온 그가 옷을 벗는지 부스럭거렸다. 곧이어 침대에 눕는 가벼운 진동이 느껴졌다.
백천범은 그를 등진 채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숨이 막힐 듯한 침묵이 두 사람을 감쌌다. 그때, 베개를 옆으로 옮기는 소리가 나더니 자세를 고쳐 누운 그가 고른 숨소리를 냈다.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을 작정인 듯했다. 흥, 그래! 하고 싶은 대로 하라지. 누가 이기는지 해 보자고!
그러나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얼마 지나지 않아 평온한 목소리가 침묵을 깨트렸다.
“천범, 잠들었소?”
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 잠든 척했다.
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안 자는 거 알고 있소. 잠시 얘기 좀 하는 게 어떻겠소?”
커다란 손이 이불 속으로 들어오더니 그녀의 허리를 짚었다. 그녀가 성가시다는 듯 손을 밀쳐냈다.
“하지 마세요. 잠들었어요.”
“잠이 들었는데 어찌 말을 할 수 있단 말이오?”
그가 소리 없이 웃더니 곧장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천범, 화났소?”
그녀는 그의 품을 벗어나려 몸에 힘을 주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등에 뜨거운 숯이 달라붙은 듯 홧홧한 느낌이 났다.
“더워요.”
그녀가 그의 손을 밀어냈다.
“왕야께서 이러시면 제가 어떻게 잘 수 있겠어요?”
“나를 보고 누우면 놓아 주겠소.”
백천범은 입을 삐죽 내밀고 아무 말 없이 그를 향해 돌아누웠다. 보지 못할 건 또 뭐가 있을까!
“말해 보시오. 화났소?”
그가 그녀의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 넘겼다.
“불만이 있거든 말해 보시오. 오늘 밤을 넘기지 말고 지금 따져 봅시다.”
비로소 그녀가 시선을 올려 그를 마주했다. 그래,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마음에 담아 둔 울분을 털어놓으면 한결 편안해지지 않겠는가.
“주아 언니의 선물을 준비해 놓고 왜 말씀해 주지 않으신 거예요? 우리가 어떻게 보였겠어요? 게다가 제가 도착했을 때 제대로 맞아 주지도 않으시고… 내내 세 분만 얘기하셨잖아요. 밥 먹을 땐 옆에 앉으란 말도 안 해줘서 멀리 떨어져서 앉아야 했고요.”
그녀가 손짓까지 해 보이며 씩씩거렸다.
“그리고 주아 언니가 뭘 좋아하는지 기억하시고 음식까지 덜어 주었잖아요, 전 신경도 안 쓰셨으면서.”
그때 묵용감이 끼어들었다.
“그건 조금 억울하군. 그대에게 먼저 음식을 덜어 주지 않았소.”
그녀가 코웃음을 쳤다.
“아이가 걱정돼서 주신 거였잖아요! 그것뿐이에요? 제가 왕야의 기분을 풀어 드리려고 손을 잡으려 했더니 그것도 피하셨죠.”
말할수록 화가 더 솟구치는 듯해, 그녀의 숨이 거칠어졌다.
“제가 골동품을 잘 모르는 걸 알면서도 체면을 구기는 걸 지켜만 보고, 미꾸라지 잡는 얘기를 꺼냈을 때도 게를 잡는 얘기만 하셨잖아요. 주아 언니가 좋아하는 꽃을 계속 기르고 언니가 좋아하는 간식도 기억하고……. 역시 왕야는 언니를 잊지 못했던…….”
묵용감이 재차 그녀의 말을 끊었다.
“돌아올 땐 오히려 그대가 내 손을 피하지 않았소. 그러니 내게 갚아 준 것 아니오?”
묵용감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흘렀다.
“그 애에 대해 아는 건 그게 전부요. 하지만 그대가 좋아하는 건 모두 알고, 더 많이 알아갈 것이오. 도자기 이야기를 할 땐 자기에 관심이 있는 줄 알았소. 주아에게 배우려 청화의 이름을 계속 물은 게 아니오? 게다가 주아의 생일이었으니 겉치레라도 체면은 살려 줘야 하지 않겠소.”
“전부 변명이잖아요!”
백천범이 이를 바득바득 갈며 말했다.
“일부러 그러신 거잖아요. 다 알아요.”
“내가 왜 일부러 그런 짓을 했겠소?”
그녀가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겨우 말을 꺼냈다.
“어젯밤 일 때문에 화가 나셔서, 역시 저와 사 장군을…….”
그가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
“내가 주아와 몇 마디 나누기만 해도 화가 나오? 정작 그대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사장풍과 단둘이 방에 있었소. 내가 무슨 생각을 했겠소? 온종일 비를 맞으며 일하다 한밤중에 돌아왔는데, 돌아오자마자 본 거라곤 사장풍이 그대 어깨에 기대 미끄러지는 모습이었소.
그대는 나의 잘못을 이야기하지만, 난 그 애와 손끝 한 번 맞닿지 않은 걸 기억하시오. 그대는 어찌하였소? 그자를 보고도 소리를 지르기는커녕 그가 도망칠 수 있도록 도와주려 했소.”
백천범이 억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이 커질까 봐 그런 거예요. 왕야께서 아시면 분명 화를 낼 테니까요.”
“그게 더 화가 난단 말이오. 내가 화를 낼까 봐 걱정했다곤 하지만, 내가 그자에게 해를 가할까 봐 겁이 났겠지. 그대는 그자를 걱정했던 것이오. 안 그렇소?”
백천범은 입술을 달싹였지만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말대로였다. 당시엔 정말 그렇게 생각했었다.
“오늘 그리 대한 건, 그대도 직접 그 감정을 느껴 보길 바랐기 때문이기도 하오. 다만 전부 그대가 보는 앞에서 행했소. 그대가 보아도 부끄러울 게 없었으니까. 그대는 어찌했소? 내게 보일까 봐 두려워하지 않았소.
…그대의 마음이 편치 않으면, 내 마음에는 더욱 괴롭다오. 천범. 나도 한 사내에 불과하오. 사장풍이 그대를 바라보기만 해도 참을 수 없는데, 그런 일을 어찌 참고 넘기겠소? 이제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이해하오?”
그에게 오늘 일을 따지려고 했는데, 역으로 당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백천범은 한데 뒤엉켜 종잡을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그의 말을 들으며 생각해 보면, 꼭 그녀의 잘못이 더욱 큰 것 같았다.
“그, 그는…….”
그녀가 입술을 달싹일 뿐,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곧장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아직도 그자가 궁금한 것이오?”
“아뇨.”
그녀가 급히 고개를 저으며 해명했다.
“제 말은… 어쨌든 왕야의 부하니까 앞으로도 마주칠 수밖에 없잖아요. 차라리 다른 곳으로 보내시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요.”
그가 그녀의 손을 살며시 움켜쥐었다.
“그 일은 그대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되오. 천범, 앞으로는 상관도 없는 사람들 때문에 오해하는 일 없도록 합시다. 그게 사장풍이든, 주아든 말이오.”
“네.”
그녀가 그의 허리에 손을 두르더니 턱에 입을 맞춰 왔다.
“앞으로는 계속 사이좋게 지내요. 다시는 싸우지 말고요.”
* * *
“제대로 보았느냐?”
황보주아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왕비가 문을 잠가 버렸다고?”
“예. 소인이 똑똑히 보았습니다. 학 어르신이 문을 열라고 소리치는데도 열지 않으셨습니다.”
채봉이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이었다.
“결국 왕야께서 어르신과 월규를 물리셨지요. 앞뜰로 가시려는 듯해 들키지 않도록 얼른 돌아왔습니다.”
황보주아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셋째 오라버니는 그리 몰아붙이면 더 화를 내는 분이시다. 다른 이도 아니고, 무려 초왕야가 집에서 쫓겨났다는 소문이 퍼지면 웃을 이가 한둘이 아니겠구나.”
황보주아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어제는 사장풍과 밀회를 갖더니 오늘은 문전박대를 하시겠다. 이번만큼은 셋째 오라버니라도 참지 못하시겠구나.”
채봉은 제 주인이 신이 난 걸 알고 얼른 말을 보탰다.
“소인이 보기에도 무척 화가 나신 듯했습니다. 식사를 하실 때에도 왕비 마마를 거들떠보지도 않으셨잖습니까. 그러고 보면 초왕비의 낯짝도 참 두껍습니다. 그리 푸대접을 받고도 아무 일 없는 사람처럼 많이도 드시더군요.”
황보주아가 그 우스운 꼴을 떠올리며 혀를 찼다.
“화가 나서 그리했겠지. 셋째 오라버니께서 나만 신경 쓰고 왕비는 신경 쓰지 않으니 당연한 일이다. 나와 셋째 오라버니는 함께 자란 사이니, 지금은 담담히 대하신다 해도 어쨌든 정은 남아 있는 것이지.”
“그럼요. 아가씨와 왕야 사이의 정이 얼마나 깊습니까. 그저 지금은 배 속의 아이 때문에 왕비 마마를 신경 써 주실 뿐이지요.”
채봉이 잠시 생각하더니 슬쩍 운을 떼었다.
“아가씨, 소인이 보기엔 지금이 좋은 기회입니다. 왕비께서 회임을 하셨으니 왕야께서 계속 억누르시기에는…….”
황보주아의 얼굴이 굳어지더니 냉랭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건방지구나!”
“소인이 쓸데없이 말이 많았습니다.”
채봉은 얼른 고개를 숙이고 얌전히 한쪽으로 물러났다.
황보주아는 구리거울에 자신을 비춰 보았다. 생일이 지났으니 그녀도 스물다섯이었다. 시절은 한번 흘러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더니, 눈빛마저 예전보다 경직된 듯했다.
반면 백천범은 찌푸리든 웃든 언제나 혈색이 넘쳐흘렀다. 망신을 당했다 해도 웃어넘길 수 있었다. 그녀가 가진 젊음은 그런 힘이 있었다. 뭐든 혈기로, 청춘과 어리숙함으로 둘러댈 수 있었다.
다만 오늘 묵용감이 그녀를 대하는 태도는 제법 만족스러웠다. 묵용감과 백천범이 아무리 가까울지언정, 아무런 허물도 없는 사이는 아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건드려선 안 되는 몇 가지 금기가 존재했다. 사장풍이나, 과거의 그녀와 묵용감과의 관계가 있지 않은가.
세월은 사람을 늙게 하지만 무언가를 축적하기도 했다. 백천범은 가지려 해도 절대 가질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시간은 되돌릴 수 없으니, 오직 그녀와 그만의 것이 마음속에 담겨 있었다. 제각기 다른 형태를 띠지만, 하나의 이름을 가진 그것을, 백천범이 어찌 범접할 수 있을까?
그녀는 가벼운 미소를 머금은 채 머리 장신구를 떼기 시작했다.
“이리 와서 이것 좀 떼 보거라.”
* * *
이튿날, 백천범은 천천히 눈을 떴다. 장막 아래로 옅은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녀는 얼른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그녀의 얼굴이 기쁨으로 가득했다. 연이어 비가 내리더니 마침내 하늘이 맑게 개었다!
인기척을 알아차린 월규가 장막을 걷고 안으로 들어왔다.
“왕비 마마, 밤새 평안히 주무셨습니까?”
“응, 아주 잘 잤어.”
그녀는 활짝 웃으며 기지개를 켰다.
“왕야는 관청에 가신 거야?”
“예. 왕비 마마께서 일어나시면 함께 아침 식사를 하시려 했습니다만, 아침 일찍 한 장군께서 오시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나가셨습니다.”
월규가 문득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어찌 화를 내지 않으십니까?”
부끄러워진 백천범이 시치미를 뗐다.
“내가 언제 화를 냈다고 그래?”
“발뺌하시긴요. 어젯밤에는 왕야를 문전 박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정말 마마뿐일 겁니다. 제가 왕야였다면 한바탕 혼쭐을 내 주었을 텐데요.”
백천범이 실없이 웃어 보였다.
“날 어떻게 혼쭐을 내시겠어. 배 속에 이렇게 아이도 있는데.”
“아이는 핑계지요.”
월규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왕야께서는 그저 마마께 약하신 겁니다. 그러니 혼내지도 못하시지요. 정말로, 마마는 왕야께 대적하기 위해 태어나신 분 같습니다.”
두 사람이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무수리가 안으로 들어와 고했다.
“왕비 마마, 황보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