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387)화 (386/1,192)

제387화

초왕비의 딸꾹질이 멈추지 않는 탓에 자리에 있는 이들은 대화를 이어 갈 수가 없었다. 세 사람은 이만 연회를 마치기로 결정했다. 초왕은 딸꾹질을 멈추지 않는 초왕비를 데리고 안채로 걸음을 옮겼다.

초왕비는 딸꾹질 소리에 박자라도 맞추듯 역동적으로 걸어갔다. 초왕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녀와 발을 맞췄다. 커다란 그의 손이 천천히 그녀에게 향했다. 지금쯤이면 그녀도 그의 기분을 충분히 알았으리라. 그러니 이쯤에서 그만하는 편이 좋았다. 아무리 화가 나도 그녀의 기분이 완전히 상하는 일은 그도 원치 않았다.

그러나 내민 손은 허공을 매만질 뿐이었다. 곁눈질로 힐끔 바라보니 초왕비는 손을 번쩍 올려 자신의 머리를 정돈하고 있었다.

초왕은 조금 민망한 기분에 뒷짐을 지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천범…….”

“딸꾹!”

“혹…….”

“딸꾹, 딸꾹!”

아무리 말을 붙여도 소용없다면, 행동으로 옮기는 편이 나았다. 곁눈질로 살핀 그녀는 어느새 양손을 내려놓고 앞뒤로 살짝 흔들며 걷고 있었다.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다가간 초왕은 다시 한번 손을 뻗었다…….

그때, 백천범이 갑작스레 기지개를 켜며 손을 위로 들어 올렸다.

“딸꾹, 아이 배불러.”

초왕은 허공을 움켜쥔 자신의 손을 멍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정말이지 이렇게 난처한 기분도 처음이라, 어찌할 줄을 몰랐다.

뒤에서 등불을 들고 오던 월규는 웃음을 참느라 곤욕을 치러야 했다. 초왕을 이렇게나 난처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왕비가 유일하리라.

“천범.”

“딸꾹!”

“그만하시오.”

“딸꾹, 딸꾹!”

“일부러 하는 것 다 아오. 계속 딸꾹질을 하면 본인도 힘들 것 아니오?”

“딸꾹, 딸꾹, 딸꾹!”

“그러지 말고 말을 좀 해 보시오.”

문 앞에 다다르자 백천범은 쌩하니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묵용감의 눈앞에서 문이 쾅 닫히더니, 빗장이 걸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어찌…….”

묵용감이 황망하게 문을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문을 세게 두드리려고 했지만, 소란을 피우고 싶진 않았다. 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 자리에 어두운 안색으로 서 있었다.

뒤에 서 있던 월규가 동정 섞인 눈빛을 보냈다. 등불 아래로 비친 그의 흐릿한 위태롭게 흔들렸다. 곧 마음을 다잡은 묵용감이 목소리를 낮게 깔고 호통을 쳤다.

“이 고약한, 어서 문 여시오!”

예전의 모습이 얼마나 기세등등했든, 지금 월규의 눈에 비친 묵용감은 이빨 빠진 호랑이나 다름없었다.

그때,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학평관이 다가와 예를 갖추고 인사를 올렸다.

“왕야, 다녀오셨습니까.”

그가 고개를 돌려 문을 바라보았다.

“아이고, 문이 어찌 잠겼단 말입니까?”

그는 사실 멀찍이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자신까지 나서서 초왕을 난처하게 하고 싶진 않았지만, 그래도 주인을 계속 밖에 세워 놓을 순 없는 노릇이다.

학평관이 문을 두드리며 살가운 목소리를 내었다.

“왕비 마마, 어서 문을 열어 주십시오. 왕야께서 아직 들어가지 않으셨습니다. 이만 열어 주십시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무반응이었다. 어느새 짙은 침묵이 깔렸다.

학평관이 한숨을 한 번 내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왕비 마마, 밤이라 바람이 찹니다. 왕야께서 감기라도 걸리시면 큰일입니다. 마마께서는 누구보다 따뜻하신 분이 아니십니까? 어서 문을 열어 주십시오. 시간이 늦었으니 무슨 일이 있으시거든 내일 다시 얘기하심이 어떻습니까? 마마, 이만 문 좀 열어 주시지요.”

역시나 침묵만이 되돌아왔다.

학평관은 점점 조급해졌다. 그래도 왕비가 자신의 체면을 어느 정도는 봐주리라 생각했는데, 이렇게까지 깜깜무소식일 줄이야!

그가 고개를 돌려 묵용감을 힐끔 바라보았다.

‘대체 마마께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리도 문전박대를 당하시는 건가.’

결국 학평관은 옆에 서 있는 월규에게 손짓했다.

“월규 네가 한번 해 보거라.”

등불을 든 월규는 그 자리에 꼿꼿이 선 채 난처한 표정을 보였다.

“어르신께서도 열지 못하시는데, 어찌 소인이 열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묵용감은 조용히 서 있었다. 사실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 더 화가 나야 하는 쪽은 그가 아니던가? 어찌 이토록 제멋대로 군단 말인가? 태자의 처소에서 그녀를 푸대접했기 때문에?

이제껏 말다툼을 해 본 적이 거의 없는 두 사람이다. 그렇기에 그는 그녀의 화를 풀어 주는 방법을 잘 알지 못했다. 무엇보다 지금은 그녀의 화를 풀어 줄 입장이 아니다. 자신이 뭘 그리 잘못했다고 그녀를 달래 줘야 한단 말인가? 정작 그녀는 그의 마음을 풀어 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데.

다소 깎여 나가긴 했어도, 초왕은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굳은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

“됐다, 그만하거라. 오늘은 곁채에서 묵을 테니 부를 필요 없다.”

학평관이 우물쭈물하다 겨우 답했다.

“그것이, 곁채에서 주무셔도 우선은 안으로 들어가셔야 합니다.”

“…….”

그들이 재회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백천범이 각방을 제안했다. 그녀로서는 매일 밤 달아오르는 그의 열기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각방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는 하인들을 시켜 침소와 가장 가까운 곁방에 자그마한 침대 하나를 몰래 남겨 두었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면 정말 이곳에선 묵을 장소가 없었다.

슬슬 부아가 치민 묵용감이 문을 걷어차려는데, 학평관이 필사적으로 말리고 들었다.

“왕야, 아니 되옵니다. 마마께서는 강압적인 태도에 반발하시는 분이지 않습니까. 발로 문을 걷어차시면 더욱 화를 내실 게 분명합니다. 소인도 왕야께서 어떤 기분이실지 잘 압니다.

하지만 마마께서는 회임을 하신 몸이 아닙니까. 아직 증세가 낫지 않았다 생각하시고 조금만 더 이해해 주십시오. 금방 괜찮아지실 겁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왕야.”

한편, 차마 밖으로 나갈 수 없었던 녹하와 기홍은 문발 뒤에 숨어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녹하가 입을 가리고 웃으며 속삭였다.

“왕야께서는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예상이나 하셨을까? 이렇게 대단한 왕비 마마를 맞으실 줄이야.”

기홍이 고개를 내저었다.

“왕야께서 대체 어찌하셨길래 마마께서 화가 나신 거지?”

“내가 볼 땐 왕야께서 버릇을 잘못 들이신 거야. 예전에 마마께서 저렇게 나오시지도 못했잖아. 어젯밤에 그런 사달이 났는데 말이야. 왕야께서 분명 화를 내다 너무 과하게 표현하신 나머지 마마의 성미를 건드리셨겠지. 내일 월규한테 한번 물어봐야겠어.”

“이럴 때는 원수지간이 따로 없으시다니까.”

기홍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렇게 소란을 피우셔도 얼마 못 가 다시 꼭 붙어 다니실 거야. 왕비 마마는 마음이 여리시고, 왕야께서는 그런 마마를 끔찍이 아껴 주시니까. 두 분을 보다 보면 절로 부러워.”

“누가 아니래.”

녹하도 부러움을 숨기지 않았다.

“두 분만큼 서로를 은애하는 연인은 본 적이 없어. 자고로 부부는 저렇게 아옹다옹하면서 정이 더 깊어지는 법이지. 어쨌든 우리가 나설 일이 아니니까 두 분이 알아서 해결하시라고 하자.”

“그래, 너도 그만 봐. 왕야께서 아직 침소에 못 드셨으니까 조금 더 기다려 보자.”

기홍이 녹하를 문 앞에서 끌어냈다.

녹하는 까치발을 들고 걸어가면서도 고개를 돌려 상황을 몰래 살폈다.

“아이고, 이렇게 보니 왕야도 가여우시네. 한밤중에 문전박대를 당하시고 말이야.”

“우리는 모른 척해야지. 왕야께서 얼마나 부끄러워하시겠어? 왜, 지난번에 마마를 끌어안고 우시는 걸 본 뒤로, 왕야께서 한동안 우릴 어색하게 대하셨잖아.”

녹하는 웃으며 화장대에 놓인 연지와 분첩을 정리하러 갔다.

잠긴 문을 열고 들어가는 일쯤은 초왕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소 체면이 구겨지겠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겨를이 없었다. 사실 그는 밖에서 밤을 지새워도 상관없었다. 다만 그의 걱정은 백천범을 향하고 있었다.

혹여나 그녀가 제대로 잠을 청하지 못한다면? 아이까지 가진 몸이니 제대로 안정을 취해야 했다. 그녀도 아이도 좋지 않을 상황을 그가 버틸 수 있을까.

결국 초왕이 손을 내저어 학평관과 월규를 물렸다. 아무리 초왕이라도 하인들이 보는 앞에서 문을 몰래 열고 들어가기는 조금 부끄러웠다. 혼자 남게 되자, 그는 허리춤에서 작은 칼을 꺼내 문틈에 찔러 넣고 빗장을 풀기 시작했다. 역시나 몇 번 휘적거리니 빗장이 풀렸다. 초왕 같은 숙련가에게는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칼을 집어넣고 옷매무시를 가다듬은 초왕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당당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 * *

백천범은 화장대에 앉아 머리를 풀고 얼굴을 대충 닦은 뒤, 침대 옆에 앉아 바깥의 소리를 들었다.

사실 그녀도 그가 이리 나오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어젯밤 일 때문이지 않은가. 그 때문에 최대한 그의 비위를 맞춰 주려 노력했고,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그 결과가 어떠했는가?

그녀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는 받아 주기는커녕 그녀의 마음을 찔러 대기까지 했다. 덕분에 그녀의 마음은 괴로움의 밑바닥까지 가라앉았고, 그를 향한 미움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어느새 그가 미워서 치가 떨릴 지경이 되니, 절대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함께 마주 앉아 대화를 하면 될 일 아니던가. 꼭 이렇게 화를 돋우고 그녀의 체면을 구기려 하다니. 백천범이 아무리 무던하고 소탈한 사람이라고 해도, 오늘의 일은 참기 힘들었다.

두 사람이 부부로서 제대로 싸우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저택에 있었을 땐, 그녀는 자신의 처지 때문에 감히 그에게 대들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두 사람은 제대로 합방을 치른 정식 부부인 데다 그녀는 아이까지 가졌다. 이렇게 성질을 부려서라도 그녀가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려 주어야 했다.

그의 화난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녀는 입을 삐죽거렸다. 참나, 아직도 제멋대로 굴다니! 밤새 밖에 있고 싶단 말인가?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어느새 멀어지는 발소리만 들려 왔다. 그녀는 가슴이 서늘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아무래도 그가 자리를 뜬 모양이다. 분명 앞뜰로 향했겠지. 앞뜰의 당직실에는 여분의 침대가 있으니까. 그는 태자와 달리 잠자리를 따지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백천범도 잘 알았다.

그녀의 마음은 그를 향한 원망으로 물들었다. 어찌 저리 참을성이 없을까? 조금만 더 애원하고, 조금만 더 그녀를 구슬려 주었다면 문을 열어 주었을 텐데. 평소 그녀를 달래 주던 참을성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녀가 무얼 해도 화를 내지 않겠다더니… 죄다 거짓말이었다. 역시 결정적인 순간에 그 사람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법이었다.

그때, 갑작스레 작은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꼭 새끼 쥐가 힘이 없어 제대로 울지 못하는 듯 ‘찍, 찍’거리는 소리였다.

그녀는 곧바로 숨을 죽이고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이건 빗장을 여는 소리였다. 그녀도 해 본 적이 있으니 어찌 모를까! 그녀는 서둘러 신발을 벗고 침대 위로 올라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어둠 속에서 심장 소리가 쿵쿵 울리는 듯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