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6화
백천범은 눈을 깜박거리며 되물었다.
“무슨 요라고요?”
완전히 비슷하게 생겼건만, 청요가 아니라니.
“상급 청요는 많이 받아야 은자 만 냥 정도지만, 여요는 다릅니다.”
황보주아가 뽐내듯 말했다.
“여요는 북녕北寧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비가 그치니 하늘이 맑게 개었네, 천봉千峰의 취색이 푸른 물결을 만드는구나’ 이런 시구 들어 보셨습니까? 이 시구는 여요를 두고 하는 말이지요. 지금은 그 수가 극히 적어 태자 오라버니께서도 아주 어렵게 구하셨답니다.”
백천범이 물러서지 않고 태연히 말했다.
“이거 말하는 거예요? 제가 말한 건 저건데요.”
황보주아가 눈을 크게 뜨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느 자기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천청화초문아경병天青花草紋鵝頸瓶이요? 아니면 누공고좌쌍이병鏤孔高座雙耳瓶이요?”
“…….”
왜 또 저리 복잡한 이름이란 말인가…….
두 병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백천범은 부아가 치미는 걸 느꼈다. 묵용감을 곁눈질하니 금방이라도 웃음을 터트릴 듯한 얼굴이었다. 결국 그녀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왕야, 배고파요.”
“…….”
그들의 대화를 듣던 태자가 웃음을 참지 못하며 말했다.
“왕비, 어찌 그리 빨리 배가 고픈 겁니까? 조금 전에 식사를 하지 않았습니까.”
반면 묵용감은 바로 하인을 불렀다.
“왕비가 들 다과를 준비해 오너라.”
평소처럼 자신을 챙겨주는 모습에 백천범은 가슴이 젖어드는 기쁨을 느꼈다. 팔짱을 끼고 싶었지만, 어느새 묵용감은 몸을 돌아 세우고 탁자로 자리를 옮겼다.
그를 따라가려는데 황보주아가 그녀를 끈질기게 붙잡았다.
“왕비께서 말씀하신 병이 어느 것인지 아직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백천범이 그녀의 손을 가볍게 뿌리쳤다.
“제가 언제 저거랬어요? 그리고 다른 사람 물건을 무엇 하러 그리 자세히 물어보는 거예요?”
꼭 그녀가 망신당하는 꼴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것처럼 굴지 않는가. 백천범이 고운 눈썹을 찌푸렸다.
“…비가 그치니 하늘이 옥처럼 맑아졌네. 꽃은 물빛을 머금은 채 구슬처럼 굳었구나. 녹색과 붉은색, 다양한 색이 조화를 이루니 화신畵神이 붓을 든 것이리라. 사실 다른 하나는 균요鈞窯입니다…….”
황보주아의 시구를 듣는 것도 지긋지긋했다. 백천범은 이 대화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를 부렸다.
“화제를 좀 바꾸는 게 좋겠어요. 미꾸라지 잡는 얘긴 어때요?”
황보주아에게 자리를 빼앗길까 봐 백천범은 잽싸게 자신의 부군 옆에 앉았다. 그리곤 고상하고 지루한 말장난이 오가기 전에 다시 재빨리 말을 이었다.
“미꾸라지 잡아 본 적 있으세요? 정말 재미있거든요. 오수진에 있었을 때…….”
태자의 옆자리에 앉은 황보주아가 그녀의 말을 자르며 웃었다.
“우리는 어릴 때 게를 잡곤 했지요.”
태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
“그랬지. 동궁에 있던 취호翠湖였구나. 가을만 되면 게를 낚는 낚싯대를 들고 누가 많이 잡는지 시합을 하지 않았느냐.”
“셋째 오라버니께서 늘 이기시지 않았습니까.”
황보주아가 웃으며 추억을 이어갔다.
“한번은 문우 오라버니가 기이한 생각을 해내서 게에게 술을 먹이고 취醉게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습니까? 그 게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바람에 환관들이 게를 잡느라 고생을 했지요. 집게에 손이 물린 이들은 소리를 지르고 난리였지 않습니까.”
태자가 그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주아 너는 게를 너무 많이 먹어 배탈이 나지 않았느냐. 결국 대학사한테 다들 혼쭐이 났지.”
황보주아도 아득해진 눈빛으로 말했다.
“집게에는 여린 옥이, 붉은 껍질에는 향이 가득 담겨 있구나……. 국화주를 곁들여 게를 먹던 날들이 정말 그립습니다.”
“…….”
주아 언니는 시를 읊지 않으면 말을 할 수 없단 말인가…….
백천범이 속으로 푸념할 때, 태자가 말했다.
“어려운 일도 아니지. 사실 북쪽의 게는 남쪽만 못하다. 금릉에서 멀지 않은 곳에 징양호澄陽湖라는 호수가 있다. 그곳의 게가 살이 꽉 차고 맛있기로 유명하더구나. 등껍질은 푸르스름하고 배 쪽은 하얀데 다리는 금빛이다.
제철이 되면 최상품이 팔백 리를 달려 궁으로 진상되는데 늘 중추 연회 상에 올라오곤 했었다. 곧 있으면 입추니 함께 징양호에 가서 싱싱한 게를 맛보는 게 어떻겠느냐?”
황보주아가 깜짝 놀란 듯 곧장 대꾸했다.
“정말이요? 전 아직 금릉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그때 조용히 앉아 있던 묵용감이 말했다.
“내년에 궁이 완공되면 금릉에서 지내야 하니, 올해 미리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그의 시선이 어느새 황보주아를 향하고 있었다.
“금릉은 국화도 유명한 곳이다. 특히 녹색 국화가 유명하지.”
백천범이 이 기회를 놓칠세라 불쑥 끼어들었다.
“예전에 저택에서 기르던 초록색 국화요? 정말 예뻤는데 말이에요.”
태자가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어릴 때 주아가 네게 주지 않았느냐? 그걸 지금껏 기르고 있었구나.”
그 순간, 백천범은 손끝이 차갑게 저려오는 기분을 느꼈다.
“…주아 언니가 준 것이었군요.”
묵용감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그녀를 힐끔 바라보았다.
“주아가 준 것은 진작에 죽었고 그 후에 새로 길렀소.”
그러나 백천범의 표정은 더욱더 싸늘해지기만 했다.
“…아, 그래서 다시 기르신 거였군요.”
“…….”
“꽃을 싫어하더니, 녹국만큼은 참을성 있게 기르는구나.”
태자가 웃으며 백천범에게 말했다.
“셋째처럼 차가운 성격은 꽃을 기르며 정신수양을 하면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그때, 시녀들이 다과를 가져왔다. 여섯 개의 작은 옥 접시에 튀긴 만두와 찹쌀떡, 장미 과자, 편도 과자, 설탕에 절인 매실, 대추 떡이 담겨 있었다. 하나같이 정교하게 만든 다과였다.
한 접시당 네 조각만 내어왔는데 담은 모양은 물론 꽃 형상의 접시도 아름다웠다. 작은 화로에서 뿜어내는 불빛이 옥 접시를 은은히 비추니 안 그래도 예쁜 다과에 윤기가 흘렀다.
태자는 역시 태자였다. 그가 가진 것 중 어느 하나 정교하지 않은 게 없었다. 설령 사소한 다과라 할지라도 그림에나 나올 법한 수준이었다.
평소였다면 진작에 손을 뻗었을 백천범이었지만, 지금은 다과를 바라보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배가 고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태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왕비, 어째서 들지 않습니까?”
백천범이 우물쭈물하다 입을 열었다.
“매우 예쁘게 담겨 있어서, 모양을 흩트리고 싶지가 않습니다.”
“하하, 먹으라고 내왔는데, 그게 무슨 말입니까.”
태자가 친절한 표정으로 재차 권했다.
“그간 기홍의 솜씨에 익숙해졌겠지만, 이곳 부엌 시녀들의 솜씨도 맛보십시오.”
태자가 작은 옥 접시를 그녀 앞에 놓아 주었다.
“먹어 보세요. 이곳에서 처음으로 함께하는 식사인데 배가 고프면 제가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그때, 백천범의 눈에 황보주아에게 다과 접시를 건네는 묵용감이 보였다.
“어릴 때 장미 과자를 좋아하지 않았느냐, 예전 그 맛 그대로인지 한번 먹어 보너라.”
황보주아는 그의 말대로 과자 한 조각을 집어 천천히 씹기 시작했다.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천천히 맛을 음미했다.
“맞습니다. 이 맛입니다. 태자 오라버니의 요리사는 동궁전에서 함께 나온 사람이니 예전의 그 맛이 날 수밖에요.”
묵용감이 옅게 웃어 보였다.
“둘째 형님께서도 대단하십니다. 떠날 때 요리사도 잊지 않고 데려가시다니요. 저는 병사들과 전쟁터를 누비며 들에서 들쥐를 구워 먹었습니다. 고기 부스러기만으로도 얼마나 맛있었는지 모릅니다.”
다들 웃음을 터뜨렸지만, 백천범만은 무표정하게 앉아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태자가 건넨 옥 접시에서 과자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사실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몇 번 씹다 보면 목구멍으로 넘어갈 뿐이었다.
다시 하나를 집어 입에 넣고… 또다시 하나를 넣고… 또 하나를……. 접시를 비운 그녀는 다른 접시를 가져와 계속 먹기 시작했다…….
태자는 그녀에게 음식을 권하고, 그녀의 부군은 다른 여인에게 계속 음식을 권한다. 그녀가 보고 있는데도. 그러나 지금 화를 내며 돌아갈 순 없었다. 그래서야 너무 속이 좁아 보이지 않겠는가.
옛날 일만 들추거나, 고상한 얘기를 하거나, 까닭 없이 시를 읊는 건 그녀와는 전혀 상관없는 세상이었다. 이미 그녀는 흥미를 완전히 잃고 속으로 무거운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지금부터 복잡하고 어려운 작품이나 시를 외운다고 한들 절대 저들의 실력을 따라잡을 수 없으리라.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 좋을 대로 하라지. 누가 뭐래도 그녀의 배 속엔 묵용감의 아이가 자라고 있었고, 그녀는 초왕비였다. 감히 이들 모자에게 못되게 굴다니……. 흥! 어디 두고 보라지! 그녀가 속으로 이를 갈았다.
한참 딴생각에 잠겨 우물거리던 그녀는 자신에게 와닿는 세 개의 시선을 느꼈다. 여섯 개의 접시 중 다섯 개가 텅 비어 있었다. 남은 과자는 황보주아 앞에 놓인 접시의 장미 과자뿐이었다. 이대로라면 그 접시마저도 백천범에게 빼앗길 운명이었다.
그제야 백천범이 예를 갖춰 물었다.
“더 드실 거예요?”
황보주아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입맛이 죄다 떨어졌다는 표정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백천범은 그녀의 접시를 가져와 과자를 입에 넣기 시작했다.
잠깐의 침묵 끝에 태자가 감탄을 내뱉었다.
“식욕이 아주 좋습니다, 왕비.”
그가 밖에 있던 시녀들을 불렀다. 접시를 정리하러 온 시녀들은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사실 태자에게 다과는 장식에 더 가까웠다. 다과상을 치울 때마다 한두 개 정도만 손을 댔을 뿐, 거의 처음 내어온 그대로 물리곤 했다. 덕분에 과자는 하인들의 몫이 되곤 했는데, 오늘은 텅 빈 채였다.
밖으로 나온 두 시녀가 서로 속닥거렸다.
“태자 전하를 오래 모셨는데, 이렇게 접시가 빈 건 처음이야.”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지. 초왕비께서 계시잖아.”
묵용감이 백천범의 찻잔에 찻물을 부어 주며 말했다.
“단 음식을 많이 먹었으니 차를 좀 마시는 게 좋겠소. 갑작스레 위가 팽창되었을 테니 딸꾹질이 나지 않도록 조심하고.”
“감사합니다. 전 괜찮아요.”
그녀는 꼿꼿이 허리를 펴고 예의 바르게 감사를 표했다. 그 순간, 마치 기다렸다는 듯 목구멍에 공기 방울이 차올랐다. 그녀는 서둘러 입을 가렸지만, 손가락 틈으로 ‘딸꾹’하는 소리가 새어 나오고 말았다.
묵용감이 찻잔을 들어 그녀의 입가에 가져다주었다.
“차 좀 드시오.”
“아닙니다. 저는 정말… 딸꾹, 괜찮습니다.”
그녀는 아예 소매에서 손수건을 꺼내 입을 가렸다.
“개의치 말고 말씀 나누십시오. 괜찮습니다.”
태자가 그녀를 힐끔 보더니 다시 옛이야기를 꺼냈다.
“셋째가 전쟁터 이야기를 꺼내니 처음 출전했을 때가 생각나는구나. 주아가 어찌나 서럽게 울었는지…….”
“딸꾹!”
황보주아가 부끄럽다는 듯 대꾸했다.
“제가 언제 그리 서럽게…….”
“딸꾹!”
“…….”
“…저는 괜찮습니다. 어서 말씀 나누시어요.”
그래, 옛일이든 고상한 얘기든 시구든 마음껏 얘기해 보라지. 내가 그 입을 죄다 틀어 막아줄 테니까! 백천범은 속으로 낄낄거리며 연신 딸꾹질을 해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