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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385)화 (384/1,192)

제385화

황보주아도 태자를 따라 잔을 들고 가볍게 들이켰다. 많이 마시진 않았지만 살짝 취기가 올라온 듯했다. 촉촉한 눈망울에 흐릿한 열기가 번지고 볼에 바른 연지도 더욱더 선명해 보였다. 백천범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백천범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최근 살이 찌며 얼굴이 찐빵처럼 느껴졌다. 퀭한 두 눈까지 더해지니 생각할수록 자신이 초라해 보였다.

한번 초라함을 느끼자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 되었다. 곧 엄마가 되는데 눈앞의 황보주아에 비하면 자신은 너무나도 보잘것없게 느껴졌다. 늘 시시덕거리고 까불거리기만 하지 않았던가.

묵용감은 그런 모습까지 사랑스럽게 보았지만, 백천범은 그녀와 자신을 비교할 때면 어쩔 수 없이 속이 상했다.

태자가 또다시 묵용감의 술잔에 술을 따르자, 지켜보던 백천범이 입을 열었다.

“왕야, 조금만 드시어요. 많이 드셨습니다.”

묵용감은 조금 놀란 듯 시선을 옮겨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태자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왕비, 걱정하지 마십시오. 셋째의 주량이 굉장하니,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요.”

“지난번에도 취하셨잖아요.”

백천범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

“왕야, 조금만 드세요. 술이 과하면 몸이 상하십니다.”

묵용감은 눈을 내리깔더니 생각에 잠겼다. 황보주아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오늘은 제 생일인데, 흥을 깨지 마시어요. 이렇게 모이는 일도 쉽지 않은데 마음껏 마시며 즐겁게 보내고 싶습니다.”

백천범은 묵묵히 그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괜스레 가슴이 옥죄었다. 얼마 후, 묵용감이 천천히 잔을 집어 들었다. 자그마한 옥 잔이 그의 손안에서 가볍게 흔들리다 곧 식탁에 놓였다. 그가 짧은 웃음소리를 내었다.

“얼추 마신 듯하니 술은 그만하지요. 이제 차를 마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것도 좋지.”

태자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없어도 처소에 좋은 차는 아주 많다. 어렵사리 모였으니 특별한 차를 내주마.”

묵용감과 황보주아는 그를 따라 곁채로 향했다. 백천범도 일어나자 월규가 그녀의 팔을 살짝 꼬집었다. 부디 힘을 내라는 격려였다.

백천범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곤 곁채로 들어섰다.

식사를 방금 마친 터라 다들 자리에 앉는 대신 각자 흩어져 있었다. 직접 다기를 준비하는 태자의 곁에서 황보주아가 거들었다. 묵용감은 장식장 앞에서 두 손을 늘어뜨리고 골동품과 자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살며시 그의 옆에 다가간 백천범은 그의 손바닥을 살짝 찔렀다. 그의 기분이 상했을 때마다 하는 행동이었다. 그녀가 이렇게 문을 두드리면, 그는 빙그레 웃으며 그의 세상을 활짝 열어 주었다.

그러나 오늘의 그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손을 늘어뜨린 채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백천범은 다시 손을 내리고 태자 곁으로 향했다. 묵용감이 퇴짜를 놓을 줄이야. 마음이 쿡쿡 찔리는 듯 시큰거렸다.

태자는 차를 마실 때마다 이 방으로 오는 듯했다. 방 한가운데에는 기다란 탁자가 있고, 그 위에 작은 찻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오래된 나무 그루터기처럼 생겨 눈길을 끄는 찻상은 윤이 날 정도로 옻칠이 되어 있었다.

등불의 빛을 받은 찻상이 매끄럽게 빛났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정교한 조각까지 새겨져 있었다. 각종 꽃과 벌레, 사람까지……. 한동안 세심한 조각을 살피던 그녀가 놀라움과 부러움이 뒤섞인 감탄을 내뱉었다.

“정말 귀한 것이군요. 이렇게 정교한 조각은 처음 봅니다.”

태자가 싱긋 웃으며 상의 설명을 해 주었다.

“훌륭한 조각공이 좋은 나무를 쓴 작품입니다. 아주 좋은 매목埋木인 만큼 재질이 단단해 조각하기가 무척 어렵다고 들었습니다. 이런 찻상 하나를 만들려면 적어도 삼 년에서 오 년 정도 걸립니다.”

백천범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찻상을 내려다보았다.

“삼 년에서 오 년 동안 상 하나만 조각한다고요? 그동안 조각공은 입에 풀칠도 못 하지 않겠어요?”

먹고 사는 건 언제나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황보주아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매목에 조각을 할 수 있다면 조각의 대가大家랍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길이 남을 명예를 위해 조각을 남기는 것이지요. 이 찻상은 대대로 이어지며 값어치가 크게 뛸 테고, 저 장식장에 있는 자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부 대가들의 손을 거쳤으니, 이 중에서 값이 나가지 않는 건 하나도 없답니다.”

황보주아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그녀의 차분한 목소리가 어느새 묵용감의 곁에 내려앉았다.

“이 매병梅甁 좀 보세요. 셋째 오라버니께서 좋아하시는 청화 자기입니다. 하얀 바탕에 은은하게 감도는 푸른 빛이 정말 아름답지 않습니까? 표면이 어찌나 윤기가 나고 매끈한지 모릅니다.”

그녀가 자기를 들어 올리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보였다.

“잘 깎은 옥처럼 감촉이 좋으니, 최상급 자기랍니다.”

묵용감이 웃으며 대답했다.

“둘째 형님의 방에는 응당 좋은 것을 두어야지.”

그가 자기를 받아들더니 유심히 살폈다.

“유약을 칠한 부분은 오리알처럼 푸른색을 띠는구나.”

이번에는 자기 바닥을 살펴보던 묵용감이 어딘가 확신에 찬 어조로 말을 이었다.

“밑바닥은 옅은 녹색을 띠는 게, 서강西江 덕경진德景鎭에서 만든 자기가 분명하구나.”

그때 태자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셋째의 안목이 높구나.”

또다. 백천범은 이들 사이에서 자신이 필요없는 존재가 된 듯했다. 장식장 앞에 선 묵용감과 황보주아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차분하게 격식 있는 대화를 이어갔다. 하늘이 이어준 한 쌍이라는 말은 저런 모습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낙천적인 그녀에게도 위기감이 엄습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묵용감의 비위를 맞추겠다고 다짐했지만, 자꾸만 푸대접을 받으니 억울하고 서운한 마음이 밀려 왔다. 그녀는 애써 심호흡을 했다. 그래, 한 번 해서 안 되면, 두 번, 두 번 해서 안 되면 세 번 하면 될 일이 아닌가? 그녀의 의지가 얼마나 굳세고, 낯짝은 또 얼마나 두꺼운데!

이렇게 생각하니 백천범은 기운이 다시 솟아오르는 듯했다. 다시 묵용감에게 다가가려는데, 태자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그녀를 붙들었다.

“왕비, 차 끓이는 걸 좀 도와주겠습니까?”

백천범이 태자를 바라보며 당당하게 말했다.

“안 괜찮습니다. 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

거절이 너무나… 직설적이었다. 백천범은 태자의 표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곧장 묵용감에게 향했다.

마침 황보주아가 나직한 목소리로 묵용감에게 설명을 늘어놓고 있었다.

“제가 제대로 본 게 맞다면, 이건 서강 지역에서 유명한 청화절지화권영락문팔방왜각여의매병青花折枝花卷瓔珞紋八方倭角如意梅瓶일 것입니다.”

백천범은 자신도 모르게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무슨 병이라고요?”

“청화절지화권영락문팔방왜각여의매병입니다.”

“청화절지화…….”

이토록 말하기 어려운 단어가 있을까? 백천범은 옅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재차 물었다.

“무슨 병이요?”

황보주아는 하는 수 없다는 듯 한 번 더 읊어 주었다.

“청화절지화권영락문팔방왜각여의매병이라고 합니다.”

백천범이 너른 소맷자락에서 손을 꺼내더니 손가락을 하나하나 헤아리며 되뇌었다.

“청화절지화권…….”

이내 그녀의 까만 눈망울이 다시 황보주아를 향했다.

“청화절지화권영락문팔방왜각여의매병입니다.”

“…….”

“청화절지화권영락문팔방왜각여의매병이요.”

“왜 그런 이름을 붙이는 거예요?”

결국 백천범이 볼멘소리를 냈다.

“이런 이름을 기억해야 한다니, 너무 고리타분한 것 같아요!”

황보주아는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

이 고귀한 명작을 두고 고리타분하다니!

“그래도 주아 언니는 기억력이 참 좋으시네요.”

말을 잇지 못하는 황보주아에게, 백천범이 태연히 감탄사를 늘어놓았다.

“이렇게 어려운 이름을 다 기억하고 읊으시잖아요. 전 못해요. 머리가 나빠서 복잡한 건 기억하기 힘들거든요.”

“말 한번 잘했소.”

그때 묵용감이 불쑥 끼어들었다.

“아직도 내 이름을 못 읽지 않소. 쓰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백천범이 입술을 삐죽이다 웅얼거렸다.

“너무 복잡한 글자잖자요. 그런 글자를 누가… 아닙니다, 돌아가자마자 연습해서 제대로 외울게요.”

묵용감은 의미 모를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황보주아는 이 기회에 그녀를 우스갯거리로 삼고 싶었다.

“왕비께서는 승상 가문 출신이시니 학식이 깊으시겠지요. 이런 자기 쪽에는 어떤 견해를 보이실지 궁금하네요.”

그 말에 백천범은 자기를 하나하나 훑어보았지만, 그녀의 눈에는 다 똑같아 보였다. 자기에 대해서 아는 거라고는 예전에 팔아넘겼던 묵용감의 청요 편병이 유일했다. 그마저도 별장의 여득귀한테 들은 게 아니던가.

때마침 그때 팔아넘긴 자기와 비슷한 병 두 개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비록 편병은 아니었지만 색과 질감이 제법 비슷해 보였다.

자신이 없긴 했지만, 그녀는 통통한 손가락으로 대충 가리켰다.

“청요靑窯가 아주 예쁘네요. 이 색 좀 보세요. 너무 파랗지도, 그렇다고 초록빛만 도는 것도 아니잖아요. 자색 빛도 섞이지 않은 호숫물처럼 맑은 푸른색이죠. 고르고 균등한 빙렬은 어떻고요. 질감도 매끈한 게 제대로 된 눈꽃 무늬예요. 눈처럼 투명하고 깨끗한 느낌이랄까… 아주 훌륭해요.”

별장 관리인 여득귀의 말과 골동품 가게 주인장의 말을 섞어 그럴듯하게 늘어놓았다. 이 정도라면 적당히 넘어갈 수 있으리라.

황보주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예상치도 못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전문가셨군요!”

백천범이 겸손한 웃음을 보였다.

“에이, 뭘요. 그저 아주 조금 아는 것뿐인걸요.”

그녀는 어느새 기세등등한 얼굴로 묵용감을 힐끔거렸다. 이 초왕비가 초왕야의 얼굴에 먹칠하는 일은 없을 거라는 의미였다.

묵용감의 얼굴에는 옅은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그녀의 추측대로라면 기쁨에 젖은 미소였다. 활짝 웃으면 될 텐데, 왜 웃음을 눌러 참는 걸까?

그녀가 말을 걸려는 순간, 은구슬이 굴러가는 것처럼 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황보주아가 오만하고 아름다운 웃음소리와 함께 말을 내뱉었다.

“왕비 마마, 정말 재미있으십니다. 여요汝窯를 청요라고 하시다니요. 둘의 차이가 얼마나 큰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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