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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384)화 (383/1,192)

제384화

초대를 받았으니 실례를 범하지 않으려면 구색을 갖춰야 했다. 월규가 서둘러 그녀의 치장을 도왔다. 선녀처럼 틀어 올린 머리에 구슬이 달린 보요를 꽂자, 가느다란 금술이 이마에 반짝이는 그림자를 드리웠다.

백천범은 담황색 윗옷과 하늘거리는 분홍색 치마를 입고, 허리춤에 옥구슬이 장식된 오색 술을 달았다. 그 후에 먹으로 눈썹을 그리고 연지도 발랐다. 이마에 비취색 화전을 그려 넣자 아름다운 자태에 사뭇 아름답게 보였다.

월규는 몇 걸음 뒤로 물러나 백천범의 차림새를 천천히 훑었다. 곧 그녀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왕야께서 마마의 모습을 보시면 금세 화가 풀리실 겁니다.”

거울 속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백천범도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그리 예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자꾸만 칭찬을 듣다 보면 더 꾸미고 싶어졌다. 묵용감이 그녀의 모습을 보고 기뻐한다면 그녀는 어떤 치장이라도 할 수 있었다.

월규는 백천범을 태자의 처소로 데려다주었다. 오색천과 빨간 등불이 여기저기 걸려 있는 게 꽤 잔치 분위기가 났다. 백천범은 황보주아에게 선물로 줄 작은 옥 불상을 챙겨 온 터였다.

문 앞에 다다르자 마침 묵용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아야, 네 생일인데 오라버니가 제대로 된 선물도 준비하지 못했구나. 이거라도 받거라.”

뒤이어 기쁨에 젖은 황보주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와, 황염경黄炎景의 서첩이군요. 찾기 힘들 텐데, 어디에서 구하셨는지요?”

태자의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셋째가 서첩을 찾는다고 온종일 밖을 헤맸다더구나.”

백천범은 가슴을 억누르는 시큰거림을 느꼈다. 성 밖으로 나갔다더니, 황보주아에게 줄 서책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때 옷소매를 당기는 감각에 백천범이 옆을 돌아보았다. 월규가 그녀에게 입꼬리를 올리는 손짓을 해 보였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백천범은 화사하게 웃는 얼굴로 방에 들어섰다.

황보주아 역시 한껏 치장한 모습이었다. 새빨간 치마를 입고 가지런히 올린 머리에는 머리 꽂이와 여러 개의 진주 장신구로 멋을 더했다. 각진 깃 사이로 기다란 목이 유난히 도드라졌고, 새하얀 귓불에는 은 술이 달린 귀걸이가 반짝였다.

원래도 붉은색을 좋아하던 그녀는 생일을 맞아서인지 짙은 붉은색 치마를 입고 있었다. 풍만한 가슴 위로 달린 기다린 끈이 성숙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백천범을 발견한 황보주아가 웃으며 맞이했다.

“왕비 마마, 오셨습니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황보주아의 시선이 그녀의 손에 있던 옥 불상으로 옮겨졌다.

“아, 저에게 주려고 가져오셨습니까?”

“네.”

백천범이 두 손으로 선물을 건네며 웃음 지었다.

“생일 축하해요, 언니. 오늘처럼 즐거운 날만 가득하길 바랄게요.”

“고맙습니다, 왕비 마마.”

황보주아가 선물을 건네받고는 유심히 살피다 미소를 머금었다.

“정말 예쁘네요. 마음에 듭니다.”

그때 태자가 장난스럽게 한마디 던져 왔다.

“선물을 각자 준비하다니, 너희 부부도 참 재미있구나.”

백천범이 퍼뜩 묵용감을 바라보았다. 그는 찻잔을 손에 쥔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태자의 말을 아예 듣지 못한 듯했다. 그녀가 애써 웃으며 말했다.

“왕야께서도 선물을 준비하신 줄 몰랐습니다.”

이런 일의 준비는 보통 여인이 하지 않던가. 그런데 따로 선물을 준비하고도 알려 주지 않다니. 그러고도 그녀를 탓할 수 있을까.

“왕비 마마, 어서 앉으세요.”

황보주아가 그녀를 식탁 앞으로 데려가며 해사하게 웃었다.

백천범은 묵용감의 옆에 앉고 싶었지만 그의 왼쪽에는 태자가 앉았고, 오른쪽 자리에는 찻잔이 놓여 있었다. 결국 그녀는 황보주아의 자리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맞은편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모두가 자리에 앉자, 하인들이 줄줄이 들어와 음식을 차리기 시작했다. 태자가 웃으며 백천범을 바라보았다.

“기홍의 솜씨보단 못하지만, 그래도 나쁜 편은 아니니 사양 말고 마음껏 드세요.”

백천범도 웃음으로 답했다.

“사양 않고 먹겠습니다. 안 그래도 먹는 양이 늘어서 소 한 마리도 먹을 수 있을 정도거든요.”

태자가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일이지요. 두 사람 몫을 먹어야 하니까요.”

묵용감이 먼저 옆자리로 와도 되련만, 한참이 지나도 묵용감은 요지부동이었다. 마음이 불편해진 그녀가 그의 얼굴을 내내 힐끔거렸지만, 돌아오는 시선이 없었다.

기분이 좋았던 황보주아는 술잔에 직접 술을 따랐다. 그 모습을 본 묵용감이 그녀에게 넌지시 말했다.

“몸이 나아진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술은 마시지 말거라.”

황보주아가 장난기 어린 어조로 나무랐다.

“겨우 한 잔입니다. 제 주량을 아시지 않습니까.”

태자가 그녀를 놀리듯 거들었다.

“그래. 주아의 주량이 엄청나긴 하지. 어마마마께서 담근 과실주를 진탕 마시고 셋째 등에 업혀서 돌아가지 않았느냐. 집에 가서도 내려오지 않겠다고 마구 떼를 썼지. 셋째가 성격이 좋아서 망정이지, 어찌 감당했겠느냐.”

태자가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꺼내자, 황보주아가 얼굴을 붉히며 손사래를 쳤다.

“태자 오라버니도 참, 어찌 그 일을 꺼내십니까. 지금은 제 분수를 잘 알고 있습니다.”

묵용감도 옅게 웃더니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때가 몇 살 때였더라?”

“제가 다섯 살, 셋째 오라버니가 열 살이었습니다.”

황보주아는 조금 벅찬 기분이 드는지, 몽롱하게 말했다.

“시간이 언제 이리도 흘렀을까요. 그래도 어린 시절이 좋았습니다. 근심이 무엇인지도 몰랐을 때니까요.”

묵용감과 태자도 추억에 잠겼는지 미묘한 침묵을 지켰다.

세 사람의 틈에서 어떤 추억도 공요할 수 없었던 백천범은,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된 듯했다.

황보주아의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였지만, 세 사람은 시종일관 옛 추억에 잠겨 있었다. 묵용감은 처음엔 고개만 끄덕이고 있다가, 취기가 오르자 그들과 어울리며 담소를 나누었다.

백천범만 모르는, 그들의 어린 시절이 길게도 이어졌다. 선황과 선황후, 황보 대학사, 서석西席 선생, 위지문우 등등…….

소 한 마리도 먹을 수 있다던 초왕비는 어쩐지 거의 음식을 들지 않았다.

그녀의 부군은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고개만 들면 눈이 마주칠 테지만, 그는 술만 마실 뿐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평소 식사를 할 땐, 그녀의 접시에 음식이 수북이 쌓이도록 덜어 주고 손수 먹여 주며 따뜻한 눈빛을 보내지 않았던가.

비록 그녀에게 화난 얼굴을 보이거나 모진 말을 퍼붓진 않았더라도, 평소와는 온도가 다른 모습이 그녀의 하늘에 차가운 비를 쏟아붓고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음식을 넘기기 힘들어 젓가락을 가만히 내려놓았다. 때마침 태자가 그녀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이곳의 음식이 왕비의 입맛에 맞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백천범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간식을 먹었더니 배가 불러서요.”

희미하게나마 묵용감이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백천범은 곧장 그를 바라보았고 마침내 두 개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녀의 눈빛에는 속상함과 불만이 가득했지만, 그의 시선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접시에 반찬을 덜어 주었다.

“왕비는 배가 고프지 않아도 아이는 먹어야 하지 않겠소.”

그 순간, 백천범은 하마터면 눈물을 쏟을 뻔했다. 그의 눈에는 아이밖에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그녀는? 그녀는 이제 안중에도 없는 걸까.

뒤에 서 있던 월규가 그녀의 등을 가볍게 찔렀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그녀에게 줄곧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절대 화를 내선 안 된다고 신신당부한 월규였다.

백천범은 그녀의 말을 상기하며 애써 웃음을 보였다.

“고맙습니다, 왕야.”

“그리 인사하지 않아도 되오.”

그때, 태자가 묵용감에게 말했다.

“셋째야, 오늘의 주인공에게도 덜어 주려무나. 주아가 무얼 좋아하는지 잘 알지 않느냐.”

묵용감이 곧장 뱅어 요리를 황보주아의 접시에 덜어 주었다.

“어릴 때 네가 이걸 무척 좋아하더니, 입맛이 그대로인지 모르겠구나.”

황보주아가 어여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저는 언제나 옛날이 그리운 사람인걸요. 예전에 좋아했던 거라면 지금도 좋습니다. 태자 오라버니께서 기억해 주시고 특별히 이 요리를 내어주셨지요.”

태자가 웃으며 거들었다.

“셋째도 기억하고 있었구나. 어릴 때 함께하면 쉽게 잊히지 않는 것들이 있지. 그 일도 기억하느냐? 신기에 가까웠던 문우의 궁술 말이다. 포고를 겨룰 때마다 셋째가 일등이었지만 기사騎射(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을 쏘는 것)만큼은 문우에게 선두를 내어주었지.

그러다 어느 해에 셋째가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고 다시 겨뤄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지 않았더냐. 문우와 몸싸움을 벌이더니, 그 일 때문에…….”

묵용감도 어린 시절을 추억하는지 감미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 일로 문우가 제게 활을 쐈고, 주아가 막아 주었지요.”

묵용감이 황보주아를 대견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네가 그리 용감할 줄은 몰랐는데, 대단하더구나.”

황보주아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면서도 겸양을 떨었다.

“고민할 새 없이 몸이 먼저 반응했었습니다.”

태자가 묵용감에게 말을 건네며 다시 한번 황보주아의 용기를 치켜세웠다.

“주아가 막아 주었으니 망정이지, 화살이 네 가슴을 겨누고 있었다. 부황께서 말리지 않으셨다면 문우는 제 아버지한테 맞아 죽었겠지.”

황보주아가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오라버니들 중에서 문우 오라버니가 가장 충동적이었습니다. 셋째 오라버니와도 여러 번 다투시지 않았습니까.”

태자의 한마디에 세 사람은 또다시 과거로 여행을 떠나고 말았다. 줄곧 황보주아가 생명의 은인이라더니, 방금의 이야기가 그 이유인 듯했다. 묵용감은 백천범은 안중에도 없는 듯 과거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땐 난리가 났었지. 어의까지 불러 치료를 했으니.”

태자가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기억을 되짚었다.

“화살에 가시까지 달렸더구나. 화살을 뽑을 때 주아는 차마 소리도 지르지 못할 만큼 괴로워했지. 우린 밖에 서서 치료가 끝나기만을 기다렸고. 그때 문우는 제 뺨을 철썩철썩 때리고, 너는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서 벌벌 떨고, 여섯째는 구석에서 눈물을 훔치지 않았더냐.”

그가 갑작스레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내저었다.

“이런, 나도 늙은 모양이다. 옛일을 이리 또렷하게 기억하다니.”

“태자 오라버니께서 늙으셨다면 전 이 생일을 무르고 싶습니다.”

황보주아가 불만이 담긴 목소리로 받아쳤다.

“아직 한창이신 분이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저야말로 생일을 맞이했으니 한 살 더 먹지 않았습니까.”

“이 오라비들 눈에 주아 넌 영원히 한결같은 모습이다.”

태자가 잔을 들어 올렸다.

“자, 주아의 영원한 젊음과 아름다움을 바라는 잔이다.”

“고맙습니다, 태자 오라버니, 셋째 오라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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