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3화
황보주아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셋째 오라버니는 체면을 중시하는 분입니다. 이번 일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니 감추려는 게 아닐까요? 만약 더 많은 사람을 배치해 두었더라면…….”
태자가 그녀를 흘겨보았다.
“한밤중에 다들 그 애의 처소에 있는 게 마땅하겠느냐? 주아야, 셋째는 무르긴 해도 똑똑한 애다. 연정에 사로잡혀 다른 건 신경 쓰지 않는 듯해도 유심히 따져보면 금방 알아차릴 테지.
말하지 않았느냐. 늘 퇴로를 남겨 두어야 한다. 서글픈 일이지만, 내가 황태자라 해도 당장은 그 애를 의지할 수밖에 없다.”
황보주아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가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
“왕비에게는 어찌 대한답니까?”
“아직은 모르겠구나.”
태자가 담담히 말했다.
“마음이 깊으면 상처도 깊은 법이 아니겠느냐. 이런 일에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았을 리가.”
황보주아가 비로소 웃음을 보였다.
“저녁이 되면, 모든 게 분명해지겠네요.”
* * *
사장풍이 처음 오수진에 왔을 땐 역참에서 묵었었다. 이후에는 돈 많은 장인이 사앵앵과 그를 이어주기 위해 연병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사장풍이 밤새 돌아오지 않아 사앵앵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사장풍의 집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별안간 마차 한 대가 대문 앞에 멈춰 섰다. 이내 그녀도 익숙한 얼굴이 마차를 열고 나와 펄쩍 뛰어내렸다. 초왕의 호위 무사, 가동이었다. 사앵앵이 의아한 시선을 보내자 그가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었다.
“잠시 도와주시지요.”
그녀는 영문도 모른 채 가동에게 다가갔다. 장막을 걷어 올리니 누군가 누워 있는 모습이 보였다. 몸집이 큰 사내였는데 마부와 가동이 힘을 합쳐 겨우 마차 문 쪽으로 옮겨 두었다.
그들을 도우려 더 가까이 다가가던 사앵앵은 비명을 내지를 뻔했다.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지는 줄만 알았다. 얼굴이 심하게 부은 탓에 바로 알아차리진 못했지만, 체구와 형태로 봐선 사장풍이 분명했다.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그녀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누가 한 짓입니까? 어떤 개자식이 이 꼴을 만들었습니까?”
가동이 사장풍을 업으며 말했다.
“우선 침대 좀 정리해 주십시오. 눕힌 뒤에 알려 드리겠습니다.”
사앵앵은 잠시 화를 억누르고 서둘러 가동의 말을 따랐다. 그녀가 이불을 젖히자 가동이 천천히 사장풍을 내려놓았다.
그녀의 눈에 비친 사장풍은 숨을 거두기 직전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토록 늠름하던 사내가 어찌 이런 꼴로 돌아왔단 말인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그녀의 입꼬리가 축 늘어졌다.
가동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그는 여인이 우는 상황이 가장 두려웠다.
“울지 말고, 참으십시오. 일단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사앵앵이 그를 끌어당기며 물었다.
“어서 말해 주시지요. 대체 어떤 개자식이 사람을 저 꼴로 만들었답니까?”
눈에 불을 켜고 말하는 그녀를 보며, 가동은 쓴웃음을 지었다.
“한 번만 더 개자식이라고 욕하면 저 애처럼 될 것입니다.”
사앵앵은 잠시 넋을 놓더니 조금은 알아차린 듯 눈이 커졌다.
“설마…….”
“제가 데려왔습니다. 누가 저 애를 때렸겠습니까?”
가동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보다 눈치 없는 사람이 있다니…….
사앵앵이 분을 못 이기고 발을 굴렀다.
“그래도 찾아가야겠습니다. 무슨 연유로 제 신랑을 저리 만들어 놓았단 말입니까?”
가동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백천범만큼 낯짝이 두꺼운 사람은 처음 본 터였다.
“잠깐, 혼사를 올리지도 않았잖습니까?”
“초왕께서 정해 주신 혼사입니다. 조만간 치르겠지요.”
사앵앵은 여전히 성을 내며 말했다.
“아무튼, 무엇 때문에 저런 꼴이 되었습니까? 혼사를 정해 주셨으니 사 장군님은 제 사람입니다. 제 사람을 저 지경으로 만들어 놓다니요? 무엇 때문입니까? 알려 주십시오.”
눈치 없는 가동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쉽게 털어놓을 순 없었다.
“왕야의 일은 누설할 수 없습니다.”
가동이 더 말하지 않아도 사앵앵은 짐작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백천범 때문입니까?”
가동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머리끝까지 성이 나니, 사앵앵은 말을 가려서 할 정신이 없었다.
“초왕비가 뭐라고, 어린 계집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나도 꼬드기더니, 참 재주도 좋지. 초왕더러 저도 죽이라고 하십시오!”
가동이 펄쩍 뛰며 그녀를 나무라려던 찰나, 침대에 죽은 듯이 누워 있던 사장풍이 덜덜 떨며 성을 냈다.
“썩 물러나시오!”
그러나 그의 발음은 알아듣기 힘든 수준이었다. 이만큼 상처를 입고 저리 말할 기운이 있는 것만도 다행이었다. 알아듣지 못한 사앵앵이 침대 앞으로 다가가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필요한 거라도 있어요?”
사장풍은 눈을 부릅뜨려고 했지만, 얼굴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치솟는 화를 분출하지 못하니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오수진으로 돌아오는 내내 사장풍과 함께 있었던 터라, 가동은 그의 말을 어느 정도 알아들었다. 두 사람의 중매는 초왕이 되는 대로 이어준 것뿐이다. 사장풍이 그녀에게 애정이 없을 수밖에.
사앵앵은 사장풍을 바라보기만 해도 괴로웠다. 손수건을 꺼낸 그녀는 사장풍의 이마를 닦아 주며 나긋하게 말했다.
“제가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 장군님의 억울함을 꼭 풀어 드리겠습니다. 물 좀 드시겠습니까?”
사장풍이 입술을 들썩거리며 뭔가를 말하기 시작했다. 사앵앵이 고개를 숙여 가까이 귀를 가져다 댔다.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썩 물러나시오……!”
희미하고 낮은 목소리였지만 제법 분명한 발음이 들려왔다. 사앵앵은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물을 드시고 싶다고요? 잠시만요.”
가동은 어리둥절하게 눈을 깜박였다. 그녀가 노발대발할 줄 알았는데, 물을 따르는 그녀의 표정은 너무나 평온했다.
물론 사장풍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고 버텼다.
사앵앵이 그를 어르듯이 말했다.
“어서 드십시오. 드시지 않으면 제가 직접 먹여 드릴 겁니다.”
안 그래도 그녀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건만, 가동이 보는 앞에서 어찌 고분고분 따를 수 있을까.
미동도 하지 않는 그를 내려다보던 사앵앵이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럼 입으로 먹여 드리지요.”
가동은 웃음을 참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자신도 녹하 앞에서 뻔뻔한 사람이었지만, 그보다 한 수 위인 여인이 눈앞에 있었다.
사장풍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녀의 말을 순순히 들을 생각은 없었기에 고집스레 시선을 돌렸다. 결국 사앵앵은 물을 머금더니 그에게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겁에 질린 사장풍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 가동에게 살려 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가동은 매정하게 눈길을 피하며 문으로 향했다.
“사장풍, 몸 잘 챙겨. 또 올게.”
뒤이어 사앵앵에게도 한마디 남겼다.
“사장풍은 아가씨한테 맡기겠습니다.”
사장풍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가동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사앵앵은 문이 닫히자 기세등등한 미소를 보였다. 이내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그녀가 사장풍의 입가에 거의 다가와 있었다.
사장풍이 급히 입을 열었다.
“내가, 내가 마시겠소. 내가 직접 마실 것이오.”
조급한 마음만큼이나 말도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사앵앵은 그제야 허리를 펴고 물을 삼켰다.
“꼭 이리해야 드시겠습니까?”
그녀는 조심스레 그의 목을 받치고 물을 흘려 넣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금부터는 제가 장군님 곁을 떠나지 않고 간호하겠습니다. 그러니 금방 나으실 겁니다.”
사장풍은 입에 있던 물을 그대로 뿜어내고 말았다.
* * *
아침에도 묵용감을 만나지 못했는데, 점심도 마찬가지였다. 식사 시간이 한참이나 지나도 그가 오지 않아, 백천범은 하인을 보내 상황을 확인했다. 그제야 묵용감이 성 밖 군영에 갔다는 사실을 들을 수 있었다. 그녀가 슬픔에 물든 한숨을 내쉬었다.
“날 피하시는 건가?”
기홍이 백천범을 위로하며 말했다.
“왕야께서도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싶으시겠지요. 생각이 정리되면 예전처럼 좋아지실 겁니다.”
녹하가 주먹을 불끈 그러쥐었다.
“이게 다 사장풍 그 작자 때문입니다. 제 눈에 띄면 한바탕 욕을 퍼부어야지, 안 되겠습니다.”
사장풍 얘기가 나오자 백천범은 작은 불안을 느꼈다.
“언니, 사부님한테 한번 물어봐 주세요. 왕야께서 사 장군을 어찌하셨을까요?”
그녀의 말에 월규가 벌컥 성을 냈다.
“사 장군 소식을 물어보시겠다고요? 그렇게 당하고도 부족하십니까?”
월규와 같은 생각이었던 녹하도 그녀를 흘겨보았다.
“왕야께서는 지금 마마를 보려 하시지도 않는데, 마음도 넓으십니다. 천벌 받아 마땅한 놈을 걱정하시다니요.”
기홍이 서둘러 상황을 수습했다.
“그만해. 마마의 마음도 불편하시긴 마찬가지야.”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던 터라, 백천범은 푹신한 의자에 기대앉아 옷을 만드는 월규를 지켜보았다. 그러다 잠시 낮잠을 자고 일어나니 하늘이 우중충한 빛깔로 물들어 있었다. 구름이 잔뜩 모여 있는 모습이, 한바탕 비를 퍼부을 기세였다.
백천범은 몸을 축 늘어뜨린 채 오디를 집어 입에 넣었다. 자줏빛이 맴도는 까만 오디는 살짝 시큼하면서도 달콤한 맛으로 입을 즐겁게 했다. 맛이 가장 좋을 때라며 기홍이 간식으로 내주었는데, 그 맛에 홀딱 반해 매일 입을 불그스름하게 물들일 정도로 즐겨 먹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은 오디의 맛이 어쩐지 희미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빠르게 어둠이 내려앉은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왕야께서 왜 아직도 안 오시지?”
월규도 그녀의 마음을 짐작한 듯 조곤조곤한 어조로 말했다.
“오랜만에 군영을 찾으셨으니 처리해야 할 일이 많으시겠지요. 일을 다 마치신 후에나 돌아오실 테니, 기다리지 말고 먼저 드십시오.”
월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무수리 한 명이 들어왔다.
“왕비 마마, 왕야께서 오늘이 황보 아가씨의 생신이라며 태자 전하의 처소에서 식사를 할 예정이니 마마를 모셔 오라고 하십니다.”
백천범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왕야께서 돌아오셨다고?”
“예. 태자 전하의 처소에 계십니다. 황보 아가씨도 오셨고요. 다들 마마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녀에게 오지 않고 곧장 태자에게 가다니… 정말 그녀를 피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돌아왔으니 되었다. 그가 그녀를 만나려 하지 않는다면, 그녀가 찾아가면 되지 않겠는가.